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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5) / 마 5:7, 마 25: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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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5)
< 본 문 > 마5:7, 마25:31~40

요즘 세상을 보면 겉으로는 풍요로워지고 화려해지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해괴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이게 인간 세상인가 할 정도로 섬뜩합니다.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밀쳐 죽이질 않나, 보험금 타 먹겠다고 가족을 살해하질 않나 ... 얼마 전엔 평택에서 한 초등학생이 실종됐는데. 범인을 잡고 보니까 그 아이의 계부였습니다. 딸아이를 죽이고 야산에 암매장했던 것입니다. ‘인면수심’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들이지만,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사악하고 잔인한 면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롬1:18 이하를 보면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모습을 여러 면에서 묘사합니다. 그 중에 롬1:31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 ...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예수님 당시 고대에도 무자비한 인간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은 잔인하기로 유명합니다. 긍휼 혹은 자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한 철학자는 긍휼을 가리켜 ‘유약한 영혼의 병’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짓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생사를 아버지가 결정해 버립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면 살리고, 아래로 내리면 죽여 버렸습니다.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거나 내다 팝니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도 무방합니다. 콜로세움만 해도 지금은 관광 명소지만 사실은 뭡니까? 맹수와 사람을 싸움 붙여 피 흘리게 해 놓고 열광하던 광란의 현장 아닙니까? 유대인들도 만만치 않았죠. 이방인들을 괄시하고 심지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며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떨까요? 더 심각해질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봐도 그렇고, 성경의 예언을 봐도 그렇습니다. 딤후3:1 이하를 보면 말세의 인간성 타락을 언급하는데, 그 중에 이런 표현이 있죠.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 ” 무자비한 인간성이 더욱 심화될 것을 경고합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인간성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무서워집니다.

이렇게 살벌해져가는 인간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정말 막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살벌한 세상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자비로운 사람이 복되다는 겁니다. 얼핏 생각하면 수긍이 안갑니다. 살벌한 세상이기에 더 강해지고, 거칠어져야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유약해서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또 주변의 인생들을 보십시오. 무자비하고 거친 사람들이 강한 것 같지만 다 망했습니다. 로마도 망했고, 나치 독일도 망했습니다. 독재자들의 말로는 한결같이 비참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약해 빠져서 처질 것 같지만, 사실은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증하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또 한 가지 행복의 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긍휼’이란 말의 의미

긍휼은 요즘 잘 쓰지 않는데, 자비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확하게 긍휼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란 말은 성경 원어 헬라어로 ‘엘레오스’(ελεος)입니다. 이 단어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동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음 속에서나 느끼는 감상적인 게 아닙니다. 남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마음’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고통을 제거해 주는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동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로 Sympathy가 있죠. 이 단어는 합성어인데, ‘함께’ 라는 말(sym)과 ‘경험’, ‘고통’을 뜻하는 말(pathy)이 합쳐진 것입니다. 또 Compassion이란 단어도 있죠. 이 단어는 함께(com)라는 말과 고난, 고통이란 말(passion)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긍휼’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긍휼을 표현하는 단어가 몇 개 되는데, 그 중에 두 개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라하밈'입니다. 이것은 혈육에 대해 느끼는 뜨거운 정을 의미합니다. 시편 103:13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게 곧 긍휼입니다. 이사야 49:15에도 나타나는데,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 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란 부모가 자식을 한없이 사랑하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헤섿’입니다. 이 단어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이해타산도 하지 않고 지 않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인간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본질 상 죄인이요 무자비한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긍휼이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인 것입니다. 엡2:4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온갖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셨습니다. 히4:15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체휼’이란 단어가 긍휼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이 인생고를 몸소 체험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면서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겁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삶’의 구체적인 방법

①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고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히 여기는 삶의 기본 전제입니다. 우리 안에 참 긍휼이 없기에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해야 합니다. 엡5:1~2 “그러므로 사랑(인용자 註 - 긍휼과 같은 의미)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본 받는 자’라는 것은 ‘모방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본받을 때 비로소 긍휼을 베푸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받는 자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긍휼을 베풀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상적인 적선이나 자기과시적인 자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죄인임을 애통해 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의를 사모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며 긍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긍휼을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 됩니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마18:21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인데, 그 자체로도 엄청나죠. 그런데 여기서 7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히 용서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마 베드로가 무척 황당했을 겁니다.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일곱 번도 될까 말까 한데 ... 주님은 이어서 비유의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한 주인에게 종이 있는데 1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이것은 쉽게 생각해서 자신은 물론 온 식구와 모든 것을 다 팔아도 못 갚을 빚입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줍니다. 얼마나 신났을까 상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종이 돌아가다 길에서 친구를 만납니다. 자기에게 1백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 친구 멱살을 잡고 빨리 갚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옥에다 가두기까지 합니다. 1달란트는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백 달란트도 적지 않은 액수이긴 합니다. 그래도 주인에게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 껌 값도 안 되는 겁니다. 그 소식이 주인에게 들어갔습니다. 당장에 호출되었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끼리만 생각하면 한두 번 용서해 주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남에게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옛날 영국에 토마스 무어 경이라는 신실한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고히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참 억울할 텐데,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일조를 했지만, 나중에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아마 그 둘은 천국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비록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재판장이 충격을 받고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선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때 무어 경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저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구제, 위로)

막1:41 보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병자의 환부에 손을 얹고 말씀하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문둥병자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 손으로 만지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구절을 보면 “ ... 민망히 여기사 ... ” 그랬습니다. 민망히 여긴다는 게 곧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그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는 겁니다.

눅10:25 이하를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못 본 척 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혼혈족인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데려다가 치료해 주고 요양하도록 여관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사마리아인의 자비,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공감하고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먼저 긍휼을 받았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만일 이런 구체적인 행위가 없다면 참 신앙인인지 의심스러운 겁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신문에서 본 기사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잘 이시죠? 흑백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연을 했던 분입니다. 그 청순한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그분의 신실한 신앙이 더 귀합니다. 특히 말년에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 기아들을 끌어안고 봉사한 일이 전 세계인들에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을 기념해서 유엔과 한 민간단체에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는 소식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얼짱(얼굴이 예쁜 사람), 몸짱(몸매가 좋은 사람) 등 외모지상주의 열풍이 상당합니다. 미모가 나쁜 건 아니죠. 그런데 좀 심합니다. 얼마 전에는 보니까 강도 얼짱이 잡혔는데 얼굴이 짱이니까 용서해 주라고 해서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얼굴이 예쁜 것보다 마음이 예뻐서 긍휼을 베풀 줄 아는 ‘맘짱’이 진짜 짱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래야 되는 건 알지만 내 능력이나 여건이 미치지 못하니까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가진 게 없잖아.” 그러나 이것은 핑계입니다. 물질이 아니라도, 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한번은 길을 가는데 걸인이 동냥을 합니다. 그런데 마침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그 걸인의 손을 잡아 주면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걸인은 오히려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감격했습니다. 그동안 자기에게 돈 몇 푼 던져 준 사람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말입니다. 나이팅게일이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수여받은 훈장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으면 눈물로도 할 수 있다.”

④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만 긍휼을 베풀면 곤란합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프면 아야~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아야~ 소리를 못 냅니다. 사실은 죄로 인해 병들어 있고 영원히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육체의 병도 오히려 자각증세가 없는 게 더 심각하지 않습니까? 영혼의 아픔을 바라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를 위해 운다면, 하나님이 떠난 영혼을 위해 당연히 울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시신을 부둥켜
안고 운다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구제는 복음 전도입니다. 행3:1 이하를 보세요. 베드로가 성전에 가다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걸인을 만납니다. 줄 돈이 없었지만 그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성전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돈 몇 푼보다 그의 육체와 영혼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전해 주었던 겁니다. 최고의 것을 준 셈이죠. 그렇습니다. 빵과 돈을 주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항상 그래야 되지만 특히 이 기간 중에 보음 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좋은 제안을 하나 합니다. 사순절 시작일인 지난 2월 25일(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미국에서 영환 한편이 개봉되어 야단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멜 깁슨 감독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Jesus Christ)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영화 중에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독이 자비로 제작했는데 며칠 만에 몇 배의 수입을 올릴 정도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입장권이 매진되고, 새벽부터 표를 사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재미 교포들이 보고 나서 전화를 걸어와 꼭 보라고 야단입니다. 3월 하순에 한국에도 개봉된다고 하니까 여러분도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의 불신자들도 시켜 주세요. 좋은 전도 기회가 될 겁니다.

[3] 긍휼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

마5:7 후반절 보면 긍휼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 ...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풍성히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에 긍휼을 베푸는 거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이 더 풍성한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기며 사는 사람은 이런 사이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 긍휼히 여기는 삶 → 하나님의 더 풍성한 긍휼 → 긍휼ㄹ히 여기는 삶 → 하나님의 더 풍성한 긍휼 → ...” 얼마나 놀라운 행복의 길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임하게 될까요?  

① 하나님의 평강 :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면 우리 영혼에 평강이 임합니다. 딤전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잠11: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신령한 복입니다.(요14:27 참조) 가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50세 되던 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시력도 약화되고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재벌이면 뭐합니까? 소망이 없이 병원에 갔는데 벽에 걸린 성구를 보았습니다. “주는 자가 복되도다!”(행20:35) 그것을 보고 인생의 전환이 이뤄진 겁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업한다고 바쁘다 보니까, 가치관이 변화되지 못하다 보니까, 소유지향적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소유를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단을 설립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 그랬더니 마음에 평안이 오고 육신의 건강도 회복됐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반 생애는 긍휼을 베푸는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었습니다.

② 담대한 기도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긍휼을 실천하며 살아가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담대한 기도가 나갑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런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약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말하자면 능력 있는 기도생활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보상 : 잠19:17 보니까 남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우리가 받은 게 얼만데 ... 그러니까 다 드려도 당연한데도,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 그것을 당신이 꾼 것으로 잡아준다는 겁니다. 사람은 꾸고 안 갚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풍성하게 보상해 주십니다.(눅6:38, 빌4:18~19 참조)

여러분, 요셉을 보세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총무로 죄수들을 섬겨 주었습니다. 한번은 전직 관원장들이 꿈을 꾸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나중에 바로 왕에서 추천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작은 긍휼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실직을 해서 직장을 구하다가 어렵사리 한 회사의 면접 통보를 받았습니다.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가는데, 길가에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 옆에서 한 중년 부인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겁니다.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 지나칠 수 없어서 도와주었습니다. 끝내고 부리나케 갔지만 지각입니다. 면접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탁 치며 말합니다. “내일부터 출근해요!” 돌아다보니까 길에서 도와준 그 부인입니다. 바로 그 회사의 여사장이었던 겁니다. 기가 막힌 우연 같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르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긍휼로 갚아 주십니다.

④ 하늘나라의 상급 :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늘의 상급입니다. 오늘 본문 마25:31 이하를 보면 임금이 모든 민족을 한 사람 한 사람을 양와 염소로 심판합니다. 임금은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각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때 의인들이 천국의 영원한 복을 받습니다. 누가 의인인가요? 참 믿음을 갖고 평소의 삶 가운데 긍휼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아주 자연스런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들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마25:37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하지만 주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당신에게 하신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십니다. 마25:40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부디 이 말씀을 명심하시고 매일의 삶 가운데 긍휼을 실천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넘치는 긍휼로 행복한 인생, 승리하는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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