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석녀에서 탈출하라 (창 18:9-15)

  • 잡초 잡초
  • 534
  • 0

첨부 1



석녀에서 탈출하라 창18:9-15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인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는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고 말썽 부리지 않고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하면 ‘저 사람, 믿음이 참 좋아요. . . .’ 이런 말을 잘합니다. 믿음이 과연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내 상식, 내 경험, 내 지식, 내 처지, 내 형편을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깨뜨리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참 믿음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어느날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저분은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 .’

1. 믿음은 그 약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위임입니다. 하나님께 전 존재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 자신의 전 존재(자신의 지식, 경험, 처지, 모두를) 위탁하는 결단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고향을 떠나라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창12:) 후부터 계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복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에게서 민족의 열왕이 나오고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 그런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의심합니다. 그러니까 창17:17에 보면 이미 아들 낳기를 단념한 99세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또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니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름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믿게 하시려고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 .이삭의 뜻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너 앞으로 웃게 될 거야’라는 뜻입니다.
이 약속을 주셨을 때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아마 아브라함은 어처구니 없어 웃었던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웃음, 불신의 웃음. . .

하나님은 투정하는 아들에게 자상하게 대하시는 아버지처럼 약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꾸짓지 아니하시고 눈높이를 낮추어 인내로써 사랑으로 지도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인내하며, 성숙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그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셔서 자상하게 권면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으면 아브라함 같은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약속을 존중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 한 여인과 남자사이의 결혼의 약속도 너무 쉽게 깨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오늘의 시대 사람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고야 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탕자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할 찌라도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두손 두발 다들고(눈물 찔찔. . .) 주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집 앞으로 나그네들이 지나갑니다. 그 나그네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비롯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분명한 뜻을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가는 분들입니다. 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행들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찬송,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 . .이기쁜 소식을 )

하나님의 오심은 항상 좋은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은혜를 가지고 오십니다.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사라에게 믿음의 힘을 부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굳뉴스를 가지고 오십니다.
이 말을 장막 뒤에서 엿들은 사라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석녀인 것을 자신이 알았기 때문에 웃었다고 했습니다.

석녀(돌계집,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창18:12에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보통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17: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나의 공주)에서 ‘사라’(여장부)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을 때, 웃었습니다. 기뻐서, 좋아서, 감사해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 . .
그런 면에서 이 아브라함 부부는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요.
하는 행동이나 믿음의 수준이 아주 비슷합니다. 두 부부 모두 불신앙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어정쩡쩡한 웃음(불신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처음에는 이랬습니다.

3. 사라의 실수와 아픔

지금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신지 여러 해가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내 사라는 조급증에 빠져서 여종 하갈 방에 남편 아브라함을 들여보냅니다.
조급증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신앙은 인내를 동반합니다. 인내 없이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급증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 까지 가고, 하나님이 머물라는 곳에 머무는 것이 신앙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조급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지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자 사라는 조급증에 빠져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 당시 자식이 없을 경우에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후사를 보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처음에는 이렇게 온전하게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말로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믿지 못하여 우습게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의 마음이 닫혀버립니다. 마음을 닫으면 믿음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라의 마음은 그리 넓은 편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는 일은 사라의 일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라의 능력은 필요 없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 ‘생리가 끊어졌다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라에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걱정들 때문에 잔뜩 낙심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믿으면서도 자기가 뭔가를 하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싸매고 걱정을 합니다. 염려합니다. 드러 눕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걱정은 믿음을 방해합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이런 걱정이 있습니까?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가 우리의 키를 한자나 자라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너무 깊이 골몰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편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어 해석하니 맞아들어가지가 않았습니다.
마틴루터(Martin Ruther)는 말하기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은 범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두뇌로 판단해서 축소하여 조그만 하나님으로 만들어 믿는 것입니다.
믿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을 자기의 합리적인 사고방식 안에 가두어 두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것 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고정관념, 선입관에 맞추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셔놓고 십년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자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들여 보내서 자기의 방식대로 일을 해결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도 사라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여종과 불화가 일어나고 남편과도 그 일들 때문에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라에게는 믿음보다 기쁨보다는 불신과 불만, 원한, 핑계. . .등등이 그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연약한 자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성공을 쟁취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실패는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실수와 아픔은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실수를 통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비젼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성공한 것만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또 다시 실패합니다.
성공은 종종 사람을 해이하게 만들고 안심시키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기업가들은 지금도 자신의 사무실에 사업에 실패했던 당시의 계약서를 걸어두고 일한다고 합니다. 실패는 좋은 스승이고 좋은 학교입니다.
두 부부의 믿음이 실수와 아픔을 통해서 조금씩 깨닫고 견고해 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았던 의인 노아도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했던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고, 충성스런 부하까지 죽음의 자리로 내 몰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성군이요, 메시아의 조상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도마는 인도의 최초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더 이상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주신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참아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라는 심령이 굉장히 약해져 있습니다.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감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믿음을 주고, 약속을 주기 위해 오셨는데, 사라의 마음은 차디찬 겨울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마음을 가진 성도는 없습니까?
이런 마음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라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금 찾아오십니다.
웃어도 정말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닌 가식의 웃음, 즐겁지도 않으면서 악지로 즐거운척 하는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셔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십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아브라함보다 사라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의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안타까움과 가련함을 달래고 위로하고 축복하고,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라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 앞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절망과, 한숨,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 이런 것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하나님께서 사라를 기다려 주었고, 아브라함을 기다려 주었기에, 로마서에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 19-22)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사라는 다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격려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몸도 뜨거워집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들도 실망에 찬 얼굴로 가다가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애기가 생기지 않는 사람들은 몸이 차서 그렇다고 합니다.(한의원)
마음과 몸이 뜨거운 사람, 즉 건강한 사람은 자연히 아기를 낳게 됩니다.
그들의 불신의 웃음을 진짜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진짜 이삭의 이름대로 전과 다른 웃음을 웃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웃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라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격려하십니다.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말입니다.
이 기회에 빨리 일어나십시오. 믿음의 회복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5. 영적인 석녀에서 탈출하십시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적인 석녀들이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출산을 하지 못한 사람을 영적 석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월부터 태신자 전도운동을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종로교회 전 성도가 영적 석녀에서 탈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태신자”라는 말을 들으면 생소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뜻은 “작정된 전도 대상자”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작정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작정해 두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삼는것”은 이는 마치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아기를 뱃속에 간직했다가 출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구원을 목적으로 불신자 세 사람을 믿음으로 작정하여 일정 기간(약 3개월 동안)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사랑을 쏟을 때 영적 출산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행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영적 출산의 능력이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어 있다”(행13:48)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생한 간증을 합니다(고전 2: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태신자 전도는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고,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챨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능력으로 우리의 전도 활동을 인치신다면 재능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으며 말도 시원치 않고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해도, 만일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능력으로 임재하신다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유창한 설교를 하는 사 람보다도, 그 가장 미천한 전도자가 더 성공적으로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라에게 주신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기도합시다. 성령께서 다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전도대생자를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재하시면 성공적인 영적 출산의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먼저 내 곁에 가장 가까이에 관계되어 있는 사람을 믿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태신자전도는 산모의 출산과 같습니다. 결혼한다/ 임신한다/ 태아가 발육한다/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태아가 출산한다/ 성장, 자립한다
밥잘 먹고 소화잘 되는 건강한 남녀가 결혼하면 자연히 임신을 하게 되고 아기를 낳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태신자 전도도 태신자를 찾습니다/ 태신자를 작정합니다/ 사랑의 씨를 심습니다/ 태신자에게 접근하고 전도합니다/ 태신자가 성장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부어줍니다/ 교회에 출석, 등록하게 됩니다/ 양육해서 일꾼으로 세우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가장 부끄러운 것은 영적인 석녀입니다.
석녀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태신자 전도운동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 모두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했는가 보다 영적으로 출산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이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코카콜라 회사는 몇 년전에 2000년 비전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2000년이 되기까지 전 세계 65억 인구가 코카콜라를 다 마시도록 하겠다. 즉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혈관에 코카콜라가 흐르도록 만들겠다.”지금 코카 콜라가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2000년 동안의 기독교 복음화보다 100년 밖에 안되는 코카콜라의 세계 점유율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통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원리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전 성도가 목사로부터 해서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모든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이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적 석녀에서 탈출하게 하시기위해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격려하실 것입니다. 새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