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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자의 생활(4)-주를 찬송하라 (엡 5: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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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자의 생활(4)-주를 찬송하라(엡5:15-19)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지으셨는데 옛뱀에 물린 인간은 사탄을 숭배하고 탐심으로 물질을 숭배하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의하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조의 목적이 찬송이요. 당신의 백성을 구속,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찬미올시다. 찬송을 부르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목적이요, 역사의 방향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고 그렇게 섭리하고 경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천연적인 혼적인 노래는 모두가 슬픔, 이별, 허무, 눈물이 주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생명 없는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우리 심령이 과거지향적인 미련과 한숨으로 가득 채워갑니다. 그 노래대로 운명이 결정 지워집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을 부른 차중락씨는 그해 가을 낙엽 따라 가버렸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는 그 노래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얀 나비를 부른 김정호씨는 나비처럼 이승을 떠나버렸습니다. 윤심덕 사의 애찬을 부르고 몸을 던져 죽음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쨍하고 해뜰날을 부른 송대관씨는 쨍하고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마귀와 탐심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이 백성들을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재창조를 이루십니다.

첫째 아들삼아 주심에 찬송해야 합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福)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榮光)을 찬미(讚美)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들의 영과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아바 아버지'부르게 하심으로 아들의 위치를 얻게 하여 상속받을 법적 위치를 확보해 주십니다.

둘째로 피값으로 죄값을 대속하시고 구속하심에 찬송해야 합니다.

(엡1:7-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셋째로 성령의 인치심으로 기업의 보증이 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엡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인침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주의 영은 우리 안에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갖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조성해 나가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요 그에게 속했음을 나타냅니다.

인마다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얻으신 것은 우리이며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이란 우리 몸의 구속 곧 변형입니다. 그 영의 인이 우리 속에 넣어졌지만 인치심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친바 되었고 계속 인치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영안에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안에는 인치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영안에 인침이 있는 후 우리의 생각,감정,의지속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적시는 것이요 적시는 것은 거룩케 하는 것입니다. 거룩케 하심은 변화되는 것입니다,.생각, 감정, 의지가 영으로 온전히 적셔질 때 우리의 몸도 그 영으로 적셔질 것입니다. 이것을 점진적인 성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 속에서 영이 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의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업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담보로 성령의 보증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인격과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 즉 그분의 사역 등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성령은 그러한 유업을 위한 보증이요 담보입니다. 보증 계약금 담보 등은 나머지 잔액 지불을 보장하는 지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날마다 기름 부어짐으로 하나님의 성분이 우리에게 더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그저 주신 은혜, 구속의 그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켄트 휴스라는 설교자는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찬양을 허락하신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증거의 하나가 "찬양할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라는 중국선교에 신화를 남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청년시절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소책자를 접하게 됩니다. 그때의 감격을 술회하기를 "--나는 갑자기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냥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찬양할 것 밖에 없음을 알았다. 나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생명 있는 주님의 사람들은 그 입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마음으로 주를 찬양합니다. 찬양은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지혜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찬양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흔히 말하는 Last Suffer, 마지막 만찬을 잡수십니다. 제자들은 그 뜻을 다 몰랐습니다마는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마지막 만찬입니다. 문자 그대로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래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잔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피다."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요,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이렇게 마지막 성만찬 예식을 행하시고 이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여기서 체포되고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자유가 있다면 지금 바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거기까지가 자유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체포돼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면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찬미하며 가니라." 찬송이 나올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는 길에 찬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찬송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6장 30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요절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믿음이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면서 찬미하신 주님은 찬송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니 에릭슨이라는 미국 여성이 있었습니다. 틴 에이져 시절, 미국 메릴랜드의 체스픽 베이 강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잘못하여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이런 몸이라도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며 살겠습니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직후에 입술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고, 그녀는 입술에 연필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알려지자, 유명한 볼펜회사에서 광고 모델을 제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그가 나오는 모든 광고 아래에 영어로 PTL이란 글자를 삽입하기로 하고 출연했습니다. PTL은 Praise the Lord-주님을 찬양하라!-의 이니셜입니다. 그 후 그녀는 복음전도자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미국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길

(엡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십니다.



지혜있는 자는

1)세월을 아끼는 생활입니다.(16)

2)주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17절)

3)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18절)

4)찬송하는 생활인 것입니다.(19절)

우선 본문에는 찬송의 여러 유형이 나와 있습니다. 시, 찬미, 신령한 노래 등입니다. 그 구별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자 FF부르스는 시의 초점을 감사로, 찬미의 초점을 고백(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으로, 신령한 노래의 초점을 우리의 간증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찬송은 감사요, 고백이요,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을 때, 고백하고 싶을 때, 간증하고 싶을 때 찬양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요? '찬송하라'는 말은 영어로는 'making melody'로 악기를 동반한 찬송을 의미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말만으로도(멜로디 없이 언어만으로)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화답하며'는 영어에 'speaking to one another'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는 것도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구역에서 혹은 성도간의 말씀과 삶의 나눔이 바로 찬송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의 구역교제 가운데 찬송이 풍성했으면 합니다. 또는 심지어 마음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입술로 표현되지 않았어도 마음에 감사가 담겨 있으면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내 입술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고 한 것은 이런 의미의 고백일 것입니다. 어떻게 찬송할까요? 한마디로, 주님의 거저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나누는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기도, 간증, 모든 방법으로 주님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슬기롭고 지혜롭게 행하여 세월을 아끼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성령 충만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기 위한 가장 쉬운 길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름으로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실 수 있는 심령이 옥토가 되어 주님의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되실 것이고 우리의 말과 간증은 영적이 될 것입니다.

찬양은 기적을 산출합니다.

6.25 사변 당시의 일화입니다. 한 때 장관을 지낸 박현숙 씨가 6.25 전쟁 중에 월남하지 못하고 3.8선 이북 지역에 머물러 있으면서 얼굴에 숯검정을 칠한 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니다가 인민군에게 잡혀갔습니다.

인민군은 그를 고문하고 때리면서 귀찮게 하였으나 그러한 고난을 치르면서도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하루는 인민군이 찾아와서 찬송가 364장(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라고 하여서 열심히 부르니까 인민군이 느닷없이 사정없이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찬송을 계속 불렀는데 이 찬송에 인민군이 감동을 받으면서 당신의 찬송 소리는 꼭 나의 어머니의 찬송 소리와 같다고 하면서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찬양은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르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찬양은 은혜 받은 자의 신앙고백입니다.

누군가 성가대원의 특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교회에 올 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까운만 뒤집어쓰면 되잖아요),항상 예약 석을 갖고 있다.,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내려다 분수 있다.,목사의 예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설교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설교는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은 하나님과 사람을 움직입니다.

성가대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이 부르시면 설교도 기도도 끝납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천사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 왕의 귀신이 쫓겨 나갔다고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임금으로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는 너무 기뻐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잔인한 죽음도 노래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신앙의 절정은 노래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내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18절) 그 이하는 성령 충만의 결과적 상태를 묘사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주경학자는 동시에 여기에 사용된 현재분사적 표현은 성령 충만의 조건으로 볼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찬양하게 되고, 찬양하면 성령 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도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서 찬양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샘솟습니다. 가장 위대한 찬송작가들은 시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양하기를 원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예배 때만이 아닌 항상 찬송해야 합니다.

크로스비는 여자로서 시각장애자였습니다. 어렸을 때 안약을 잘못 사용하여 앞을 보지 못하고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의 눈이 감겨졌으나, 영혼의 눈이 밝아져 많은 찬송을 은혜로운 찬송을 작사하였습니다.

① 주께로 한 걸음씩 왜가지 않느냐(323장), ②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321장), ③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424장) 등등 많은 은혜로운 찬송을 지었습니다.

죤 뉴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찍 독실했던 어머니를 잃고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노예선을 타야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코끼리 사냥하듯 강제로 잡아서 노예선에 실어다 파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그가 회개하기 전까지 세상에서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후에 얼마나 많은 은혜로운 찬송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405장)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들입니까!

식물도 동물도 찬송가를 들을 줄 압니다. 두 호박 넝쿨 옆에 라디오로 각각 다른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한 곳에는 찬송가를, 다른 곳에는 록 뮤직을 계속 들려주며 길렀습니다. 찬송가를 듣는 호박 넝쿨은 라디오 쪽으로 자라면서 라디오를 칭칭 감았습니다. 그런데 록을 듣고 자란 넝쿨은 라디오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듯이 자랐습니다.

일본의 한 대안의학자는 물에도 음악을 듣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물을 떠 놓고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들려주었더니 물의 결정체들이 잘 정돈되었고 반대로 분노에 찬 거친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결정체들이 흐트러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70%가 물입니다. 음악을 들으면 우리 신체도 잘 정돈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곡식이 자라는 들판에서 풍악놀이를 하였습니다. 풍년을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의 찬송은 능력이기 때문에 감옥문도 열었습니다.

폭탄충격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 폭탄이 터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살아난 후 실어증이나 불면증 대인기피증 등으로 시달리는 질환입니다.

2차 대전 후 이 증후군에 의해 실어증으로 크게 고통 받던 퇴역군인이 있었다. 어느 주일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 때 시편 100편이 낭송되고 있었습니다.

(시100:1-5) "온 땅이여 어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 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5)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 로다"

그 순간 퇴역군인은 자신이 실어증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입을 열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모습을 본 참석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찬양의 힘은 위대합니다.

일본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1938년부터 약 6년간 옥중에서 항거하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그의 일생을 오직 하나님께만 맡긴 분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기 직전 교인들과 그의 가족에게 남긴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마음먹은 바를 이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특별히 옥중에서 하나님 신앙을 지키기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며 끝까지 싸울 것이오. 설혹 내가 옥중에서 죽은 일이 있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내 말을 지켜주기 바라오.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혹 나를 칭찬하지 말기 바라오. 오로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주시오. 그분만이 모든 되어지는 일에 찬송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오."

주기철 목사님은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공과 의를 알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 거룩한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진정 감사함으로 영광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은 세상을 떠나면서 "'참 아름다워라' 이 찬송을 불러다오" 그래서 온 집안이 돌아가실 때 계속 '참 아름다워라'를 불렀대요. 장례식에서도 '참 아름다워라'만 불렀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김용식씨라고 아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전 장관으로 지내셨는데, 그분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죄인오라 하실 때 나를 불러주세요.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김활란 박사님께서는 내 장례식에 장송곡을 부르지 마라. 축제와 같이 기쁜 찬송을 불러다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은 축제였습니다. 눈물이 없는 완전한 음악제로 그렇게 그렇게 장례식을 지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가시면서 찬미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찬송의 주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피값으로 사주시고 아들의 권세를 주시며 기업의 보증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닌 성삼위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승리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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