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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이 열리며(겔 1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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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리며(에스겔 1 :1-26) 


1장 1절에서 28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 하늘이 열리며"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1절을 보면 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목을 말씀 그대로 하늘이 열리며, 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늘이 열리는 경우와 열리지 않는 경우는 전혀 양상이 달라 밤과 낮만큼 차이가 납니다. 즉 하늘이 열리는 그 사람과 하늘이 닫히는 사람과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또 하늘이 열리는 가정과 그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 가정, 즉 하늘이 닫힌 가정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 하늘을 닫아 버린 결과 그 나라가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나라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면 말로 다 형용키 어려운 곤경에 빠지는 겁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므로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와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닫히고 열림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이 열리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에스겔이라고 하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그 장면을 언제 체험을 했느냐 하게 되면 그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로서 그발강가에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는 그런 포로생활 중에서 선지자로 부름 받아 더욱 고생에 고생을 하던 때입니다. 이런 중에 그가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열린 하늘이 얼마나 복이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I. 신령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1-3)

1. 계시의 은혜 (1-2)

1절을 보게되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제30년 4월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이상을 보였다 하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완전한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보여준다 하여도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을 우리가 보았다던가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던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환상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중에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타날 때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과 마귀가 나타나는 가정은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에덴 동산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런데 마귀가 뱀으로 둔갑하여 찾아올 때 하와가 그 마귀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짓고 얼마나 어려움에 빠집니까? 나중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 그 다음에는 천추만대에 우리에게까지 불행을 주는 결과를 낳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그 집에 들어오니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담아 하고 불렀으나 숨었습니다 왜 숨었느냐? 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과 하와를 불러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말미암아 그 부끄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들어오더니 문제를 일으켰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결과는 문제를 풀어 주고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 하나님이 나타나는 사람은 참 복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에도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신령한 은혜를 받게된 에스겔은 먼저 계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에는 성경 속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날마다 계시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의 은혜 (3상)

3절을 보면 여호야 긴 왕의 사로 잡힌지 5년 그 달 5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라 하였습니다.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고 했으니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씀이 임하지만 나에게 특별히 임했다 말입니다. 특별히 임했다는 것은 지금 4부 예배 때 이천사오백명이 모였을 겁니다. 이렇게 모였는데 내가 똑같은 말씀으로 설교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시답지 않는 소리로 여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전혀 뜨겁거나 가슴에 부디 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가 똑같은 설교를 하는데 가슴에 부딪쳐옵니다. 참 이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또는 내게 힘이 된다. 혹은 위로가 된다하여 가슴이 뜨거워 지기도합니다. 이런 경우 그 말씀이 나에게 특별히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새롭게 느껴지고 그 다음에는 귀에 속속 들어오고 재미가 있고 그 다음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교 시간이 끝나면 아쉽고 다시금 기다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은혜가 아닙니까. 특별히 그 사람이 받는 말씀의 은혜는 2,500명이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1년 전과 1년 후가 전혀 달라집니다. 이처럼 에스겔에게 이런 말씀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면 여러분들에게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이런 말씀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권능의 은혜 (3하)

3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취직하면 그 다음에 직장에서는 자리를 줍니다. 사람마다 취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세상에서 활동하는데 내가 앉을 자리, 설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귀할 뿐만아니라 계장, 과장, 부장자리로 승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높은 자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입니다. 실력 없이 주어지는 그 자리는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러기에 실력을 필요로 하는 세상, 실력이 인정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또 실력을 알아주는 세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분과 그 직책이 만들어 주는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를 감당할 영적 실력은 더욱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고린도 라고 하는 곳에 바울이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다 쫓아내 버렸습니다. 귀신들려 집나 갔던 아내가 돌아오고 아들이 돌아오고 딸이 돌아옵니다. 그 가정은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고 활기를 되찾게됩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7형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쫓아내던 귀신을 일곱 명이 달려들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명했더니 귀신이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 웃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도대체 뭐냐고 대들었습니다. 형편없는 것이 까분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죽인다고 달려들어 억제하니 옷도 못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면 귀신이라는 놈이 우리들의 영적 실력을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문제, 영력이라는 문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혼자서 한 일을 일곱 명이 못 당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이치로 따지면 다수가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가문이 얼마나 좋은 가문입니까? 그렇다면 가문도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 또는 권세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계시의 은혜, 말씀의 은혜, 권능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II. 천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4-25)

4절에서 25절까지인데 내용이 길기 까닭에 제가 한절 한절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넷입니다. 사면을 향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개가 넷입니다. 또 날개 밑에는 손이 있어서 손이 넷이고 그 손 밑에는 바퀴가 있는데 역시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눈이 얼마나 큰지 전체가 눈이라 할 만큼 눈이 사면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분명히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도, 사람은 사람인데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면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너희도 본받아서 이렇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똑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와 같은 사람을 본받아서 천사의 경지를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1. 봉사의 손

그러면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교훈의 내용이 뭐냐 하면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날개 밑에 있는 손입니다. 여러분 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일하는 손이요 봉사의 손입니다. 더구나 천사에게 손이 있다고 하게 되면 무엇을 말합니까? 천사는 하나님을 받들고 하나님이 시키심을 따라서 구원 얻은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의 손은 성도를 섬기는 손, 하나님을 섬기는 손, 즉 봉사의 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봉사의 손을 가져야 됩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망했습니다. 폭격이 심했습니다.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교인들이 피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예배당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찾아봤더니 어느 구석에 묻혀 있었는데 팔이 떨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녹여서 다시 만들어 세우자 혹은 아니다 팔만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고 하는가하면 팔이 없는 그대로 세우자고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세워 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팔 없는 예수님의 동상 그 밑에다 쓰기를 예수님의 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교인들이 각자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인들의 손은, 성도들의 손은 바로 예수님의 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손은 봉사의 손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날개

본문은 분명히 천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제구실을 못합니다. 천사가 천사 구실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천사가 사람으로 나타나 성도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줬다면 바로 우리 성도들은 날개와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천사 노릇 할 수 있는 것이 날개라면 우리 성도가 성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다면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가는 정치할 때 정치가요 장사꾼은 장사할 때 장사꾼이요 학생은 공부할 때 학생이요 믿는 사람은 믿을 때 믿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날개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믿음은 날개와 같습니다.


3. 상징적인 얼굴

그 다음에는 생물에게는 네 얼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전체로 보면 한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얼굴이 넷입니다. 그런데 첫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가 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가졌을지라도 사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됩니다. 즉 인격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슨 얼굴이냐 하면 사자의 얼굴입니다. 사자는 산중의 왕이요 짐승의 왕입니다. 그 용기와 용맹은 천하가 못 당합니다. 사자는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지 않고 울지 않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자와 같은 용맹과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 울고 조그만 일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교회를 안 나오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신자는 이런 의미의 사자의 얼굴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들딸들이 조그마한 일에 울고 투정부리고 그 다음에는 낙심하고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 꼴을 어떻게 봐주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일어나는 장한 아들 딸들이라면 그 용기와 용맹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얼굴의 모습은 용기와, 용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소의 얼굴입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소는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바로 이런 모습을 지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은 하지말고 소처럼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반대로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불평이 많습니까. 그런데 봉사하는 소는 말이 없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지난번 내가 맥추절에 광고 드렸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집사, 권사, 장로 목사는 알아서 하고 그 나머지 교인들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직 이상은 책임지고 할 일입니다 했더니 며칠 안 있으니까 교회 나오는지 얼마 안 되는 평신도라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헌금을 짜내려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집사가 아니지 않느냐, 집사가 아니면 당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데 전화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분명히 집사이면서 평신도의 이름으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헌금을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할 때에는 미리 준비했다가,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힘껏 하며 정성껏 하고 인색 한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여도 되고 광성교회 김목사는 광성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하면 안 됩니까. 봉사 안 하는 사람이 무슨 일에든지 말이 많습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신자들은 일하는 소의 모습을 지니고 말은 하지 말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네 번째 얼굴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였습니다. 신령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회사에 나가면 한 책상에 너와 내가 일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신령한 면에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는 신령한 면을 지니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4. 순종의 바퀴

자동차를 타보고 운전해 보면 알겠지만 바퀴가 제 마음대로 갑니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가느냐 그 말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바퀴는 운전하는 사람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오른쪽, 왼쪽으로 가게하면 외쪽, 오직 순종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니요"가 없어야 합니다. 오직 순종뿐이어야 합니다. 즉 "아멘" 뿐이어야 합니다.


5. 소망의 눈

사면에 눈이 가득 하였습니다. 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눈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장사꾼은 장사꾼의 눈을 가졌고 과학자는 과학자의 눈을 가졌고 정치가는 정치가의 눈을 가진 것처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저 사람 저런 고난 속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자살할 지경인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이겨내겠는가? 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순교현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눈은 바로 소망의 눈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소망의 눈을 가지어서 남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보시고 항상 낙심하시지 마시고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천사를 통해서 성도들은 많은 교훈을 받고 천사의 경지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26-28)


1. 구원의 영광 (26- )

26절에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좌가 나타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분명히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람은 천사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보였느냐 하면 이다음에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준 겁니다. 똑같은 포로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이벳느고 라는 믿음 좋은 청년들이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므로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7배나 뜨겁게 하고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던짐 받은 사람은 셋인데, 나중에 보니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이요 신은 신인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보좌에 앉으셨는데 사람으로 보이신 그 분이 바로 풀무불 속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빨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왔더니 네 번째 사람은 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면 풀무불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런 도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 믿음 때문에 오히려 환난을 당할 적에 하나님은 손뼉을 치면서 잘한다 구경하고 관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같은 처지와 입장이 되어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풀무불 속에서 세 청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통해서 구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2. 심판의 영광 (27- )

27절을 보게 되면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 해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허리 이상은 단쇠 같았습니다. 얼마나 그 쇠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는지 단쇠가 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위까지도 분명히 불과 같더라는 것입이다. 그리고 허리 이하를 보니 역시 불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상징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24년이지만 성경을 읽는 중에 내가 전 주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를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큰 반역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에게 두고는 정말 기가 막히고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반역의 주모자가 고라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입니다. 그러니까 사촌이 잘 되니까 배가 아파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모양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수가 큰 아파트를 샀거든 절대로 크게 잔치 벌이고 뽐내지 마십시오. 고라는 250명의 불평분자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갈라서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세를 나의 일꾼으로 세웠는데 네가 뭔데 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더니 불이 나와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모세처럼 봉사하고 있을 때 그러지 않아야 될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속 썩이고 억울하게 한 일 있습니까? 그럴 적에 하나님은 전후 좌우를 전부 살피시고 시와 비를 가려 주시고 단 쇠와 같은 불로 철퇴를 내러 심판해 주십니다. 이 심판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됐고 모세에게는 승리가 되고 우리들에게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같은 단쇠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3. 자비의 영광 (28- )

28절 보니까 "그 사면 광채 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내가 보고 곧 엎드려 그 말씀하시는 자의 그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계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니 꼭 무지개 같더라는 말씀에 큰 뜻이 있습니다. 무지개라 할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노아 홍수 때 심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사랑 속에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이제 너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내가 이런 심판을 안 하겠다는 약속 끝에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노아의 가정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준, 축복의 표징으로 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의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지개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의 상징이요 언약의 상징이요 자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과 언약의 상징인, 축복의 무지개, 언약의 무지개, 자비의 무지개가 항상 나타나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은 굉장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해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의 어려운 중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삶이 여러분들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에스겔처럼 포로 생활과 같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열린 하늘을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 중에 에스겔은 열리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을 위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린 하늘을 통해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속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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