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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한 웰빙을 위하여 (요 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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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풍성한 웰빙을 위하여
본문 : 요한복음 10:7-10


요즘 현대인의 관심을 끄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웰빙(Wellbeing)이란 말입니다. 영어로 웰(Well)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뜻이고, 빙(Being)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직역하면 ‘잘 있다’는 뜻입니다. 사전에는 복지, 행복, 안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웰빙이란 삶의 질을 높여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스트레스 안 받고 행복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선진 국가에서는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자연히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합니다. 또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늘었습니다. 긴 노년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주 5 일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여가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에서 해방되어 휴식과 오락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레저와 스포츠가 결합한 레포츠라는 합성어가 생겼습니다. 교육과 오락을 합친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말도 새로 생겼습니다.

만화 - 웰빙

이 웰빙 열풍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요즘 광고를 보면 웰빙이란 문구가 많이 눈에 뜨입니다. 어떤 햄버거 회사에서는 ‘웰빙버거’라는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탤런트 이영애 씨가 인기가 있으니까 광고 모델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영애 씨가 나오는 광고를 모은 ‘이영애의 하루’라는 유머가 생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이 비누로 세수를 하고 엘라스틴으로 머리를 감고, 오전에 오기로 한 웅진코웨이 아줌마를 기다려서 정수기 필터를 교환합니다. 깐깐하게 정수한 물을 마시며 조금 쉬다가, 영어 공부를 합니다. “두유 해브 애니 익스피어리언스?” 오후가 되면 외출 준비를 합니다. 엘지카드를 들고 나가 헬스, 펜싱, 쇼핑, 당구, 나이트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저녁이 되어 돌아옵니다. 승용차에서 핸드폰으로 집에 전화를 겁니다. 그러면 컴퓨터에 연결되어 자동으로 실내 온도가 맞춰지고, 커튼이 걷힙니다. 그리고 전자 밥솥이 작동되어 저녁밥이 지어집니다. 쇼윈도에 걸린 빨간 스웨터를 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엄마생신! 내일이었다. 어쩌나! 그러나 냉장고에 떠오른 사랑스런 남편의 모습~ ‘장모님 빨간색 좋아하시지?’ ‘여보오~’ 고마운 남편, 그리고 다시 저녁파티에 가기 위해 여성 핸드폰 드라마를 들고 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몰래 나갑니다. 파티에서 돌아왔는데, 이어지는 남편의 화려한 이벤트. 냉장고를 둘러싼 수백 개의 초와 함께 팔 떨어질 정도로 무거운 꽃다발에 파묻힙니다. 이렇게 이영애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웰빙이란 말은 본래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상업화되어 있습니다. 자기네 상품을 사서 써야 웰빙을 이루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래서 주로 건강식품, 미용 화장품, 패션 등에 기업들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 웰빙 문화가 기형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자기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여가를 즐기자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웰빙문화가 개인주의로 흐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개개인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어디로부터 왔는가가 중요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데서 행복을 찾는다면 여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은 IMF 시대보다 더 어려운 불경기입니다. 아직도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직 국민 소득 2 만 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일찍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교회에도 이 웰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쾌적한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추세에 맞춰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 줘야 합니다. 냉난방 시설은 기본이고, 최첨단 음향 영상 장비를 갖춰야 합니다. 현대 감각이 넘치는 짧고 인상적인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딱딱한 나무의자에서 푹신한 개인 의자로 교체되었습니다. 예배 후에는 친교를 위한 소그룹 룸이 제공되어야 하고, 차를 제공하는 카페는 기본입니다. 기독교 용품과 종교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깔끔한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과 스낵 코너도 있어야 합니다. 주차장 공간도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성경공부와 세미나를 골라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설교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웰빙을 제공하는 교회로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일평생 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갈수록 힘이 듭니다.

편하게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는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주일 예배만 참여할 수 있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감각적인 목회 프로그램을 가진 대형교회에는 매 주일마다 수백 명씩 교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타워형 아파트가 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노라면 주눅이 들 정도입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별나라 백성들 같습니다. 그 안에서 부자가 부자답게 사는 것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이 진정한 웰빙일까요? 비타민을 종류대로 먹고, 유기농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면 웰빙입니까? 기 운동을 하면서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까? 명품으로 온 몸에 두르고, 미용 마사지를 받고, 성형 수술로 예뻐지면 웰빙입니까?

진짜 웰빙은 사실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천국입니다. 교회는 크리스천들을 이 웰빙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웰빙은 진정한 웰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스턴트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움을 줄 수는 있지만 오래도록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웰빙을 누리는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는 웰빙이란 단어가 풍성한 생명이란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받는 웰빙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존재의 넉넉함이 있습니다.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웰빙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비유로 소개하는 구절이 일곱 번 있습니다. 나는 빛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떡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 우리의 문이다.

본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순진한 동물입니다. 저녁에 목자가 양을 우리에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지 않고 그 문 앞에 목자가 누워 잠을 자면, 양들은 목자를 넘어 우리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침에 목자가 일어나 길을 터줘야 나옵니다. 양은 철저히 목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밤에는 목자가 직접 양을 지키는 양의 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 예수님을 통과하면 두 가지를 얻습니다. 하나는 구원이고, 하나는 꼴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9>

구원은 들어가야 얻습니다. 구원은 예수님 밖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있습니다. 꼴은 들어가며 나오며 얻습니다. 우리 안에는 목자가 준비한 꼴이 있습니다. 목자는 풀을 베어 샤일로에 보관합니다. 젖산발효를 시켜서 요구르팅을 해둡니다. 그 꼴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영양을 보충하는 아주 중요한 양식이 됩니다.

밖에는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지켜주는 가운데 이 풍성한 꼴을 얻게 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풍성히 얻는 다는 것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10 절을 9 절에 대입해서 보겠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풍성히 얻는 다는 것은 보면 꼴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그 구원을 더 풍성히 해야 합니다.

양은 목자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양을 노리는 이리가 있습니다. 이리는 양을 늑탈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리는 도적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웰빙과 세상이 주는 웰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웰빙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곧 공허해집니다. 잘 먹고 잘 사는데서 진정한 행복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웰빙은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웰빙은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서 희생하는 목자이십니다. 양을 지키는 양의 문이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행복하셨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웰빙의 비결이 있습니다.

풍성함이란 차고 넘치는 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풍성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넘치는 사람은 생명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 넘치는 생명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명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까? 그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들이 살맛나게 되었다고 환호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시들어가는 화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생기가 돋게 만들 수 있습니까? 물과 거름을 줍니다. 햇빛을 쏘여 줍니다.

주변에 시들시들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찾아가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십시다. 나의 차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웰빙의 관심은 건강관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웰빙은 건강관리를 넘어서 영혼의 건강까지 챙깁니다. 사실 영혼이 건강해야 진정한 웰빙이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의 웰빙은 쇼윈도에 전시된 상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웰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헌신과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난과 승리를 통해 이룬 값비싼 결정체입니다.

세상이 웰빙을 외치고 있을 때, 80%의 사람들은 그 웰빙에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세상 웰빙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나머지 사람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 있고 능력 있는 자들만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웰빙은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철저히 상업주의의 시녀로 놀아나고 있습니다.

우리 멋진교회 둥지는 기독교 웰빙을 이루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웰빙은 철저히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둥지 모임을 통해서 풍성한 삶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 풍성함은 곧 연약한 삶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시들거리는 삶은 이웃의 풍성한 영적 삶을 통해서 다시 생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풍성한 꼴을 얻고 계십니까?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이 풍성한 꼴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생기를 얻는 좋은 영적 기간입니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서 세상의 중독과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서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목요일은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금요일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응원하시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토요일은 밥상을 차려주시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기도훈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새벽에 못나오는 분들이야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출근할 때는 지하에서부터 10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5 층이 지나면서 숨이 가빠오면서 힘이 듭니다. 고생스럽죠. 그러나 하루에 한 번이라도 그렇게 운동을 하니까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힘들에서 귀찮다고 안 하면 그 만큼 편하게 지낸 댓가를 치루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새벽 제단을 통해 영적 건강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시는 풍성한 생명, 영원한 웰빙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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