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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은혜 입혀 주시면 (사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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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은혜 입혀 주시면 (사 6:6-8) 


살다 보면 도무지 어렵고 안 되겠다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어떻게 좀 해 보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방법도 없고 모든 문제의 결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다만 흘러가는 대로 바라만 볼 뿐이고 도무지 내 의지를 가지고 살던 삶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 때를 인생의 좌절이라고 하고 또는 한계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이런 것이 우리들에게 가끔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은 상태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하여 패배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고,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 꿈을 축소시키고 포기하는 편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아주 중요한 차별화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이제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한계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 삶의 동력의 공급선을 바꾸어 에너지를 공급하라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한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기대로 삶의 대 전환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활 속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자라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런 순간이 자주 반복되다 보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사로잡히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결단이 생기고 삶의 역사가 기술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참된 헌신의 과정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이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길 소원 드리며 오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출발과 진행, 그리고 마침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마쳐집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우리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노력도 인내도 의지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헌신하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던 중에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 앞에 우리를 비춰볼 때 우리 자신의 누추함과 내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숨을 곳이 없는 절박한 심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6:5에서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뵈었으니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 스랍 천사 하나가 화저로 제단에서 취한 핀 숯불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그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이사야는 그의 죄가 사하여지고 새로운 삶의 세계에 접어드는 순간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즉각적인 헌신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의 죄악이 사하여지고,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는 담대하게 과거의 죄악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하나님의 축복과 부르심과 사역과 헌신에 응답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혀 주시는 순간 변화된 사실과 사람들을 살펴봄으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입어 새로운 삶의 지경 속에 은혜와 헌신을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첫 번째 생각하려는 것은 우리 인생의 특별한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입혀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쇠하여졌지요. 삶에 지치고 이리저리 원하는 소원을 이루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제까지 믿음 생활을 했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가물가물할 때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저 내게 있어서 믿음생활이라는 것은 나의 삶을 유지하는 한 끈이 되지 내 삶 전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전부가 되지 못할 때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은혜를 입혀 주십니다. 오늘 이사야는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을 본 순간 자신의 죄악을 보았고, 그 죄악을 본 순간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의 죄가 사하여졌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서약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헌신의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사십 년을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아갔던 모세,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사십 년 동안 길러지며 온갖 학문과 능력과 가지고 있는 모든 분야에 최고를 달렸던 모세가 이제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무능하게 양이나 치고 사니 이제 그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뿐입니다. 비록 그가 아무리 애굽의 최고의 학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하는 무료히 양이나 치고 살았다면 과거의 것은 그야말로 과거의 아득한 추억이지 더 이상 그의 능력이 아님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는 하나님 앞에 사양하지만 그것은 모세의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고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을 지내 오면서 그는 이 전의 바로의 왕궁의 왕자가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그야말로 사십 년 동안 그는 미디안의 목동으로서 그는 충분하게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나타나십니다. 밤에 몰래 포도즙 틀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던 때에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마른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배를 만들기를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고 그는 도무지 물리적으로도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어 뽕나무에 올라가야만 하는 이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주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이와 같은 때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그의 죄를 회개하고 그가 남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뿐만 아니라 재산의 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서약을 하는 이와 같은 대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소망이 있기에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결국 그의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왜, 이 여인의 마음에 내가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그 여인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에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삶 속에 있어지는 모든 것들은 내가 스스로 생성하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9:17이하를 보면 아들이 귀신 들려 물에도 불에도 마음대로 던져지는 이와 같은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22절에 이릅니다. ‘하실 수 있거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좀 나를 도와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23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 아버지는 고백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용서하소서.’예수님은 그 믿음에 감동하여 그 아들의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수로보니게의 여인은 예수님께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누가 주셨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누가 주셨냐 말이에요. 우리의 습관이 우리를 이 자리에 오게 했습니까? 그러면 그 습관은 누가 주셨냐 이 말이에요.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누가 주셨으며,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누가 주셨으며, 주님께 대한 간절한 소망을 누가 주셨냐 이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담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강하고 담대 하라. 네가 밟은 모든 땅이 네 것이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능력 있게 만드셨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우리 삶 속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전히 나타나셔서 주의 역사를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는 결국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요셉은 갖은 환란 속에서도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문구가 있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셨더라.’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으로 고난을 이기고 환란을 극복하며 마음에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극복하고 생활 속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의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의지하여 은혜가 입혀집니다. 이것은 그렇다고 우리의 무능과 나태해도 괜찮다는 무능과 나태의 근거가 아니라 감사와 겸손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있었을 때 모세는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 자신을 한탄했습니다. 내가 광야에서 이와 같이 사십 년 동안 지냈는데 내가 애굽의 왕궁으로 사십 세의 혈기 방장하던 때에 힘도 있었지만 이미 나는 힘도 전과 같지 않고 팔십 세의 나이 든 사람이고 또 뿐만 아니라 나는 이제 내 삶에 있어서도 이전의 전성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했고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광야에 사는 일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그러나 쓸모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긍휼을 입혀 주십니다. 능력이 없다고 하니 지팡이를 들려주시고 말이 무능하다고 하니 아론을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면 마음이 강하여집니다. 여건이 구비됩니다. 능력이 생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이 창조된다 이 말입니다.

전 부모님들께서 자녀를 데리고 기도를 부탁할 때 꼭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다면 우리의 지혜를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순전한 주권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포도즙 틀에서 곡식이나 털어서 먹고자 하는 이와 같은 소심한 기드온이었지만 미디안의 대군을 만나 담대하게 민족을 살리는 사사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엘리야를 볼까요? 모든 선지자 중에 능력을 행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능하게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이나 먹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식객으로 얹혀 있었던 이런 엘리야에게 서서히 그의 시대가 열려지고 있음을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사와 겸손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혜롭다 하면 그 지혜를 누가 주셨습니까? 내가 건강하다면 그 건강을 누가 주셨습니까? 내가 의지력이 굳다면 그 의지력을 누가 주셨습니까? 내게 좋은 여건이 있다면 그 여건을 누가 주셨고 내가 능력을 가졌다면 그 능력을 누가 주셨냐 이 말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주장할 것도 없고, 남을 업신여길 것도 없고, 내가 교만할 것도 없고,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 속에 우리는 감사하며 또한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될 때 나는 좌절할 필요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면 된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가슴의 뜨거움으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좌절한 모세에게 민족에 대한 꿈이 주어집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심정이 일어나는 것은 골리앗과 이스라엘 백성이 대치하고 있었던, 블레셋과 이스라엘 백성이 대치하고 있었던 이와 같은 전쟁의 상황입니다. 아버지가 그 형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그에게 위문품을 주어서 전쟁에 보내지 않았다면 다윗이 어찌 골리앗과의 싸움을 이루는 전쟁터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 장면을 목격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분을 느꼈고 그 의분으로 말미암아 골리앗을 처단하였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지경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보이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어느 날 문득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리 삶에 분명한 목적이 생기게 되고 그 목적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꿈이 생기고 그 선한 꿈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무엇인가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의 의도가 생긴다 이 말 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 속에 날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어떤 때 기도응답이 이루어집니까? ‘하나님 이렇게 이루어 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반복되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가 상달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응답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이루어 준다가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져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이 대개의 경우가 아닙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면키 원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끝에 그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끝에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침내 그는 십자가를 졌고 그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역의 완성을 이루셨고 마침내 인류를 구원해 내시는 대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의 군대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민족이 멸망할 지경 앞에 그는 모든 백성이 다 일어나 하나님 앞에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마침내 은혜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러저러한 많은 고통이 있고 많은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이 말입니다. 내 삶 가운데 그렇게 기도했지만 내 삶 가운데 그럼에도 어려움이 있고 내 삶 가운데 그런 가운데도 고통이 있고 지금도 괴로움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여러분, 한 번 말씀드릴까요? 여러분, 적어도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수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손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시편40편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나누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우리가 이제까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아름다운 보석으로 가공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귀한 자 되어 주의 역사로 존귀하게 사용되어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즉각적인 삶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으로 인하여 사도행전의 새로운 역사를 씁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예수님을 떠나서 도망갔던 자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숨어 다닌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던 중에 성령 충만의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변하여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오천 명이 회개하고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그들은 복음을 전하며 마침내 순교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한다 이 말입니다. 전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두 사람이 있죠? 롯의 아내, 그저 소돔성에서 멸망의 지경 가운데 구출을 받죠.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을 받는데 결국 뒤를 돌아봄으로 말미암아 다시 옛 생활에 빠져서 소금기둥이 되고 마는 롯의 아내의 비극을 봅니다.
또 하나,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누구냐면 저는 성경에서 삼손인 것 같아요. 삼손은 민족의 사사로서 성경의 어디를 보아도 삼손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힘이 To서 그는 일거에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일 수 있는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왜 비극적인 삶을 살았냐 하면 그는 민족을 위해서 힘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을 위해서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정욕을 위해서 살았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삼손이라는 사람이 너무 너무 처참해요.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삼손에게 시대가 구분되는데 어떻게 시대가 구분되느냐 하면 딤나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던 시대, 그 다음에 가사의 기생과 지냈던 시대, 그 다음에 소렉 골짜기에 들릴라와 같이 지냈던 시대, 엉뚱하게 그의 시대는 이 여자의 시대, 저 여자의 시대, 다른 여자의 시대 이렇게 구분돼요.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 민족의 사사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될 사람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이방여인들과 더불어 세상의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이 그의 인생의 구분의 시기가 되고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의 사사로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소원이 되어서 거룩하게 드려진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답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와 같이 허우적대고 있는 삶을 살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삼손에게 있어서 마지막 순간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는 블레셋에게 잡혀가 두 눈을 뽑힙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서 연자 맷돌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내 두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하시고’ 그 마음에는 민족을 위하여서 또한 그 마음 속에 의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삼손이 왜 이렇게 바뀌었냐 이 말이에요. 이제까지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그 민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대신 자기 정욕을 위해서 살아갔던 삼손이 왜 마지막 순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순간이 있었냐 이 말이에요. 삼손의 일대기를 보아도 어디 한 번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아무데도 없어요. 삼손의 일생 중에서 사사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적은 이 순간 딱 한 번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그 한 번의 기회가 삼손에게 있었냐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 외에는 해석의 길이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은혜를 주시니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운 마음이 일었다 이 말입니다. 이전 같으면 내가 힘을 다하여 싸우리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이 한 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하나님께 그의 힘의 근원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삼손의 마음이 이렇게 변했겠습니까? 자기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했을 텐데 그는 이제는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저는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여러분, 아주 유명하죠? 저는 그 성경을 보면 참 기가 막혀요. 어떻게 그 어린 아이들이, 그 어린 것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서 우상에게 주었던 고기를 먹지 않고 우리는 오직 식물만 먹고 지내겠습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그들은 어릴 적부터 구별되어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 어린 것들이 뭘 알겠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셨으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면 무능하고 좌절되었던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내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를 갖지 못하고 내 인생은 벌써 끝났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순간부터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이 말입니다.
여기 있는 누구 하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나이 드셨다고요? 제가 어제 신문을 보니까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80세인데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박사학위 받은 분 중에 제일 고령의 박사학위를 받으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작년에 저한테 두 번이나 오셨어요. 그래서 같이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에요. 내 여건이 문제가 아니고 내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 입혀 주시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반전시킵니다. 이전까지 우리의 일을 보아도 특별히 아름다웠던 시대는 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시절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위하여 우리들에게 특별히 찾아오시면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기드온은 매우 소심했던 사람이에요. 그는 용사가 못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 미디안의 대군을 단 삼백 명을 가지고 일거에 훼파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소심함과 자신 없음에 위축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기드온은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디안의 대군이 아무리 수다한 해변의 모래같이 많아도 적어도 삼만 이천 명이 삼백 명보다는 나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의 군사가 모였을 때 ‘다 보내라. 삼백 명만 남겨라’ 할 때 기드온은 ‘예’ 하고 하나님 앞에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었던 것이라 이 말입니다. 마지막 승리의 마감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용기를 주셔서 결전을 치르게 합니다. ‘자, 가봐라. 너에게 승리가 있다.’ 내가 가 봐서 적진을 보니 그들이 꿈 이야기를 해 주는데 기드온이 승리하게 되어 있더라 이 말입니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삼백 명이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가지고 ‘기드온의 군대라 하나님의 군대라’ 그는 담대함을 가지고 미디안의 대군에게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반전을 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의 인생이 전혀 다르게 바뀐 것을 봅니다. 그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담대하게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열심이 있고 능력이 있던 사람이나 그의 열심과 능력은 의미 없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 막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핏발 선 눈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군중의 빗나간 열심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빗나간 열심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12 이하에서 고백합니다. ‘나 자신은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늘 채무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채무감은 그의 겸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간 최고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비록 음습한 로마의 감옥에서 그의 생을 마쳤다 할지라도 어디를 보아도 그는 당당한 인생의 승리자였습니다. 달려 갈 길을 다 마치고 후회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내 마음의 용기가 달라지고 내 마음 속의 자신감이 달라진다 이 말입니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감에 달려 있어요. 문제는 어느 순간 우리가 그 자신감을 상실할 때 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니 능력이 없고 내 주변의 여건을 보니 여건이 안 되고 상대를 보니 너무 강하고 될 만한 여건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이 말입니다. 자신을 상실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내 자신을 다시 개발하고 능력을 생성하며 내 주변 여건을 바꾸어 간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능력이 더욱더 새로워지고 내 주변 여건을 만들어 간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 여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여건을 능가하여 통제하고 새롭게 생성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사모하는 것은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우리는 진정한 헌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사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마침내 그에게 소원을 묻습니다. 솔로몬은 민족의 치리를 위하여 지혜를 구하나 하나님께서는 지혜에 더하여 부와 귀를 그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영화를 누리던 중에 자신이 고통 받고 압제 당하는 히브리 민족임을 알게 되었을 때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왕자의 자리를 그는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의 어리석은 열심이 고난을 자처했지만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손에 합당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광야의 지리에 있어서 모세만큼 정확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의 고난은 그의 삶에 가장 귀중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사모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취였습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에게 그 죽음의 위협 가운데 쫓기는 생이 없었다면 과연 다윗이 그렇게 구구절절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애절한 마음으로 간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윗이 볼 때 그는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그 고통의 삶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원치 않는 상황이 나에게 전개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이루게 된다 이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열왕기하 20:1이하에서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음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집안을 정리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얼굴을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시고, 나의 이전을 추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합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네가 올라가겠고 십 오년의 생명을 연장 받고 나아가 앗수르왕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왜 히스기야가 최후의 통고를 들었을 때 그의 마음 가운데 그의 삶을 이제 마감할 마음의 각오를 가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느냐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역시 그의 마음에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하여 소원을 가지게 된 것도, 모세의 마음에 든 것도,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도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은혜 입은 자는 헌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마지막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 순간까지 그 백성을 축복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확신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눈물로 따라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27을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에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숨죽여 그 사실을 바라볼지라도 자신에게 해가 될까 싶어서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도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십자가의 행렬을 따라 갔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으면 삶의 기준이 달라지고 은혜를 입으면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5:17이하를 보면 베드로 일행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잡혀 갑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께서 감옥 문을 열므로 나와서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 다시 잡혀가 공회 앞에 세워집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는데 왜 전하게 되었느냐고 그들에게 힐난하고 문초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29에서 그들은 담대히 말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입으려는 자의 모습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무능과 연약에 대하여 좌절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새로운 역사의 창출을 기대합니다. 작심삼일의 능력밖에 없어도 괜찮습니다. 쾌락을 좋아하는 죄악성이 있는 삶이어도 괜찮습니다. 거짓을 좋아하는 우리의 강퍅함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의 의지가 굳어지고, 우리의 쾌락을 사랑하는 죄악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며, 거짓을 좋아하는 우리의 타락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은총과 사랑과 진실을 사모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까를 사모하게 되며 나 자신을 주님의 은혜에 맞춰 가게 됩니다.
은혜를 입는 자의 모습은 내게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려 오천 명이나 먹고도 남는 역사를 이루게 하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헌신의 마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사모함처럼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사모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면 자신이 생기고,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면 능력이 달라지고,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시면 우리의 주변 여건을 바꿔 갈 수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복권처럼 요행수로 임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결단과 각오와 실제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것은 기복주의자들의 저급한 행위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믿음의 백성으로 당연한 겸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것은 거룩한 백성의 진실한 귀한 모습입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선한 목적이 있는 축복의 간구는 거룩한 성도의 당연한 의무요 믿음의 백성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축복을 입기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그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의미를 알고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 인생을 향한 뜻은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 선 고귀한 백성으로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보다 높은 인생의 의미를 위하여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낭비가 아닙니다. 내 삶의 진정한 의미의 발견이며 가치 확립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도 하나님을 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성공을 해도 하나님을 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성취해도 하나님을 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중심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함 속에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 영광 속에 함께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된 것만으로 감격해 하는 진정한 겸손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듯이, 기드온이 민족을 살리는 사사가 되었듯이, 삼손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이르렀듯이,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 그의 삶의 새로운 시대의 획을 그었듯이,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의 삶을 던질 수 있듯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계신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내 삶이 달라지고 내 주변이 달라지고 새로운 영광과 능력과 헌신을 이루는 응답의 삶이 있기를 소원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는 영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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