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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한 사람을 받으십시오 (롬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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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4:1-12
연약한 사람을 받으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또 직장에서 하나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교회는 같은 마음,같은 뜻,같은 비젼,같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교회,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그런데 종종 하나되는 것에 가장 걸림돌이 있다면 서로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집사님들이 장로님들을 비판하고 장로님들이 집사님을 비판하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목회자를 비판하고 목회자가 성도를 비판하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비판하고 판단하는 교회는 하나되기 보다는 나뉘어지고 쇠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판단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금기시하는 것을 봅니다.
판단과 비슷한 말 중에 분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분별은 생산적인 뜻을 가진 용어입니다.그러나 판단이라는 용어는 파괴적인 뜻을 가진 용어입니다.그래서 성경에서는 분별은 우리에게 장려하고 판단은 우리에게 금하고 있습니다. 분별과 판단을 이렇게 해석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별이란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여러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판단이란 ”어떤 사람의 한두가지의 행동을 갖고 그 사람에 관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외적인 행동만 갖고 그 사람을 보면 결국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교회의 교파가 많습니다.장로교만 하여도 약 130파 이상이 됩니다. 목사인 저도 장로교의 파를 다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서로가 차이점,다른 점을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를 파수하는 일은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나뉘어지더라도 그것은 고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문제들이 사소한 문제,지엽적인 문제들을 갖고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교회 생활을 하고 서로 함께 생활하다보면 많은 경우에 다르다는 점,다양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외모가 다르고 모든 삶의 환경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믿음도 다릅니다. 우리가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틀린 것은 서로 판단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믿음에 있어서 연약하여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1. 하나님이 형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

여기 ‘믿음이 연약한자“에 대해서 연약한 점 그 의심하는 점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연약하다”는 것은 “능력이 없다”“능력이 적은”이란 뜻입니다. 믿음이 연약하면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중에서 도마같은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났지만 그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도마를 비판하지 않고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손을 보고 네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훈련받고 기적과 이적을 보았지만 여전히 의심할 때 얼마나 주님 입장에서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도마를 받아주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12명의 제자들을 놓고 비판하고 판단하였다면 아마도 주님 곁에 남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들 모두는 주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에 결국 주님의 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받아주시고 믿음이 약한 사람도 받아주십니다.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서로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성도들 중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아야 합니다. “받으라”는 말은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연약함을 책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교회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시 로마 교회는 교회내에서 2가지 문제 때문에 큰 나뉨과 싸움이 잇었습니다. 여기 교회 속에서 문제는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믿음의 분량이 달라서 오는 문제였습니다.그 모든 문제는 서로 받아주지 못하여서 오는 문제였습니다.첫째는 우상에게 절을 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우상에게 절을 한 고기를 자유스럽게 먹었습니다.왜냐하면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꺼리킴없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우상에게 절을 한 음식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의 가정에서 제자를 드리고 났을 때 그 음식을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이런 문제로 인해서 차이가 있을때 서로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날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2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은 다른 날과 다른 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두 번째 의견은 안식일이나 다른 날이나 차이점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구별되게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주일은 특별한 하나님의 날이므로 다른 날과 구별되게 드려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리는 방식에 있어서는 이런 저런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점들이 많습니다.그런데 섣불리 내방식과 다르다고 하여서 우리가 판단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왜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것입니까?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두 믿음이 잇는데 믿음이 더 있는 사람이 있고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행동을 함부로 자기 기준에서 비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기서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주장하기 시작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자기와 같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판단하여서 비판하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 앞에서 서로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7: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판하면 비판을 받기 때문에 본인에게 손해가 되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자기도 잘못하고 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여러분 비판하면 결국 싸우고 형제를 잃어버립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이런 사소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알고 싸우고 비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을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약한 형제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여기 형제를 받아주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때 우리는 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저런 사람 보면서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면 싸움은 없습니다.그런데 “내 기준”에서 “그럴 수가 있는가” 생각하면 결국 교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받아주시득 우리도 부족한 상대방을 서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환영하시면서 서로가 주안에서 하나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을 세우는 것이 주님의 권능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성도가 “서고 넘어지는 것”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습니까?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합니다. 바로 주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도 주님에게 속했습니다. 강한 자도 주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의 “권능”으로 성도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잘 나서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목장의 목자가 잘 나서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모든 성도들을 만들어가시고 세워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섬기던 위대한 사역자였지만 “무익한 종”의식을 가졌습니다.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전3:22-23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것이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속에 만들어가시는것입니다.약한 사람은 약한 사람대로 하나님이 만들어가십니다.믿음이 강한 사람은 강한 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 만들기”는 각각의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다양성 있게 일하신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손길로 각각 사람마다 다르게 역사하시면서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각각의 다양한 믿음을 인정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5절에 강조합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나니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여기에서 자기마음에 확정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양심껏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각자의 자유를 허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성경의 많은 것들이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령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엿지만 구체적으로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성경에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소신껏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분은 주일날 예배 드리고 장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기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결정해야 합니다. 주일날 티이부이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주일날 공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주일날 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행동할때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각자가 자기 마음에 확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껏 소신껏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언제나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과여 이 말과 이 행동이 주님을 위하는 것인가? 하는 주님을 위하는 선한 동기를 가져야 것입니다.
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나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성도들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잇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기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일을 바로 지키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까? 그 원칙은 ‘주를 위하여’주일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주를 위하여’ 예배드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 해야 합니다.

제가 한번은 미국에 갔을때 어떤 장로님과 함께 주일날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장로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교회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도 목사님도 서로 어색함이 없이 서로 인사하고 맛있게 각자의 자리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심방을 갔다가 멀리서 온 아들 내외가 목사님과 어머니를 위해서 식사로 섬기는 것이었고 또 장로님은 한국에서 온 저희들을 위해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에 우리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한 것입니다. 그 중심 동기가 주를 위하여 아름다운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이 죄가 되는가?안되는가? 그 결과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중심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인가? 나를 위하여 한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주님중심의 신앙을 행해야 합니다.그래서 성도들은 무엇을 결정할 때 기준이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주님께서 인정하실까“ 주님에게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순수한 동기를 갖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주님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약한대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강한대로 주님께서 사용하시고 주님께서 세워가십니다.

저는 지금도 저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손길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중고등부다닐때 제가 제일 믿음이 없었습니다.제가 교회를 정식으로 출석한 것이 고등학교 1학년때였는데 그것도 거의 탁구치러 다녔습니다.그때 중고등부가 약 50명 정도되었는데 회장,부회장,총무,각 부서의 부장들을 모두 친구들이 했는데 전부 믿음이 좋았습니다. 찬송도 잘 부르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지식도 아주 많았습니다. 저는 오로지 교회가는 재미가 탁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치는 날이거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날은 교회가지 않았습니다.그런데 26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그때 회장하고 부회장하고 총무하던 친구들은 다 세상으로 나가 지금 믿음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3. 판단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가면 모든 것에 대해서 정확한 최종적인 판단을 받게 됩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2분의 목사님을 들라고 하면 스펄젼 목사님과 죠셉 패커 목사님을 들 수 가 있습니다. 이 두분은 영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섬기면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교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의견대립이 일어났습니다. 이럴때는 목사님들도 별수가 없어집니다. 그러자 서로를 향해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패커 목사님이 극장을 드나든다고 비판했습니다. 목사의 신분상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패커목사님은 스펄젼 목사가 담배를 피운다고 공격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자들은 담배피우는 것를 죄로 여겼습니다. 이 두분의 목사님중에서 누가 옳은 것입니까? 두 사람이 모두 잘못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각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이 심판대에서 우리는 죄로 인한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깨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광과 부끄러움을 심판을 받습니다.

고전3:10-15에서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2가지 종류의 신앙의 집을 짓고 살 것임을 말씀하엿습니다. 하나는 타서 없어지는 재료들입니다. 나무,풀,짚으로 짓는 집입니다. 이런 집들은 불로 심판하실 때 다 타서 없어지는 집입니다. 이땅에서 신앙생활의 공력이 헛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은 얻었지만 영광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얻습니다.
다음은 타지 않는 재료들입니다. 금,은,보석등으로 짓는 집입니다. 이런 집을 짓는 사람들은 불의 심판대 앞에서 그대로 공력이 유지되는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이땅에서 모든 공력이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광의 구원을 얻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성도들을 심판하실 때 기준이 무엇일까요?
얼마나 주뜻대로 순종하였느냐 충성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갖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가슴 아프게 여기는 죄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녀를 업신여기는 죄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조합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라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입술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야고보서3장8절에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혀는 죽이는 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마디 남을 무시하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파워가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남을 한번 칭찬하면 살릴 수 있는 파워가 말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가장 가까이하고 인정해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없고,배우지 못하고,약하고,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사람이 제일 서러울때,상처가 깊을때가 언제입니까? 업신여김을 받을때입니다.
믿음 좀 있다고 남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가 좀 많이 알고 믿음이 있는 것이 누구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비록 지금 내가 먼저 믿고 믿음이 있지만 주님의 심판대 앞에 가기까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수있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될 수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또 믿음 없는 사람은 믿음잇는 사람은 본받고 따르면서 더불어 하나되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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