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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 (고전 10: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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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3월14일 말씀 
제목 :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 
본문 : 고린도전서 10 : 1 ~ 3   

성경은 역사상 계속된 베스트셀러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찾아내려는 관점에서 읽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는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렇게 살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를 나타내는 등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본보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과거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말씀한다. 이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본보기를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할 때에 홍해를 건너고,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함께 마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입술로 불평하는 죄를 범하는 등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행함으로 그들은 멸망을 받았다.

이러한 사건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나타난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본보기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학개서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망해서 성전도 무너져 내리고,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다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물리치고 다스리게 되었다. 포로로 온 사람들을 다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선지자 스가랴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른다.

그러나 한참 성전을 짓다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먹고 사는 일이 힘이 들어졌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는 압력이 들어온다. 경제적으로는 불황이고,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상황이요 압력이 들어와서 결국은 성전 건축을 중단하는 일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전을 짓던 곳이 황폐하여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학개가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하나님이 황폐한 성전을 보고서 몹시 노하셨다. 그 결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황폐한 성전을 보시고 하나님이 책망하신다. 그 결과는 씨를 뿌려도 열매가 없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아무리 돈을 벌어도 그것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기 식이다.

학개서에 나타난 이 말씀은 과거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성전을 짓고 있는 우리에게 해당하는 “본보기”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 성전을 잘 지어 봉헌한다. 성전을 짓고 난 백성들을 향하여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왜 없었는가? 성전이 황폐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몹시 노하였다. 그러나 성전을 짓고 난 후에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 말씀은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한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이다. 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복을 받기 원한다.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성전을 짓고 있는데 나의 생활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주변의 상황으로 인하여 위축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는 믿지 않는 것이다.
서기 1623년,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박해받던 조국을 등지고 신대륙, 미국 땅에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은 목적지에 닿아 짐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세운 건물이 교회였다. 믿음이 없는 삶은 지옥생활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세운 건물은 학교였다. 2세들에게 참된 교육을 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세 번째 가서야 그들은 자기네들이 거처할 집을 한 채씩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는, 누구나 교회를 중심으로 세웠고, 앞 창문을 열면 반드시 교회가 보이도록 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길을 닦을 때도 사방에서 교회로 통하도록 계획을 짰다고 한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 사람들의 조상이다. 이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믿음 때문에 오늘날 축복 받은 미국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명한 본보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된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이 성전은 건축의 기술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전은 단순한 돈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전은 성도들의 기도의 눈물과 수고의 땀으로 지어진다. 지난 집회 중에 연세가 지긋하신 권사님과 집사님이 건축헌금을 갖고서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들어오시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가 주를 위하여 바치고 싶습니다. 내가 목사님의 좋은 협력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그 권사님과 집사님의 눈물을 보았다. 함께 젖은 눈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귀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귀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바쳐라.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다. 제물로 바치는데 주저하지 않고 바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주신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아들 하나를 제물로 바치는 정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같게 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제물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다.
농사지을 때 보라. 흉년이 들었다고 하여 파종할 씨앗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버리면 다음 해에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씨앗을 심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사과 속에 씨앗의 숫자는 알 수 있어도 씨앗을 통하여 맺힐 사과 열매의 숫자는 모른다. 이 말은 결국 작은 씨앗을 통해서 나오는 열매의 풍성함을 가르쳐 준다.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다. 사르밧 과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느닷없이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갖다 달라고 한다. 집에 남은 것은 밀가루 조금과 기름 조금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그것을 갖고 오라고 한다. 그 후에 그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밀가루와 기름은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이 되었다. 결국 그 제물로 인하여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사르밧 여인의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한번의 사건이 아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본보기이다. 이번 성전을 짓는 과정에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몇 달 전에 유현무 장로님이 하루는 아들 유광희 집사와 내 방에 찾아오셨다. 봉투를 하나 내 놓으시는데 그 안에 건축헌금 2억이 담겨져 있었다. “목사님, 내가 아들에게 이렇게 바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같이 왔다고 한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로 수고하는 박전도사의 이야기이다. 고향이 동해인데 어머님이 성전을 짓는데 집을 바쳤다. 집을 바쳤으니 좁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자녀들은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큰 집에 살 때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고, 큰 집에서 살 때보다 더욱 소중한 것을 많이 얻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지금 성전을 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다. 나는 성전 건축헌금을 4억 2천만을 작정하려고 한다. 나에게 아파트가 있는데 이 아파트를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바쳤다. 약 4억 정도 될 것이다. 2천만원은 무엇인가? 한 구좌에 천만원씩하는 운동을 벌이는데 자녀들의 이름으로 하고 싶어서 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의 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다. 소록도에 가면 중앙교회가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예배당을 짓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태풍이 불어서 짓던 중에 지붕도 날아가고 황폐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가발 수출을 많이 하던 중이라서 할머니들은 머리 카락을 팔아서 건축헌금을 바쳤고, 온전하지 못한 손과 발로 벽돌을 날랐다. 손에는 피와 고름이 나오는데 시멘트로 만든 벽돌이 붉게 물들었다. 손에서 나온 피가 벽돌을 붉게 물들였다. 그들은 이렇게 성전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이 고백하기를 이 땅은 저주받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복의 땅이라고 고백한다. 우리의 헌신이 있을 때에 그곳이 바로 감사와 축복의 땅이 된다.
이제 성전 짓고 언제 또 짓겠는가? 이 정도 지어 놓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 한 몫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작정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도록 형편과 처지를 변화 시켜 주실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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