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속에서 쉬지 말고 깨어 항상 기도하라 (엡 6:18)

  • 잡초 잡초
  • 563
  • 0

첨부 1



세속에서 쉬지 말고 깨어 항상 기도하라
젊은이 설교 홈 myhome.naver.com/chapelainkhj 천안외대 김홍진 목사
에베소서 6 : 18

  우리 교회 남전도회에서는 기도 많이 하는 집사님을 초빙해서 간증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직장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면서 하루에 10시간씩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시간만 10시간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증을 듣고 기도시간이 적다고 가슴을 치며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다고들 다짐했습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무려 30명의 남전도회원들이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났는데 새벽기도회에 그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가 참 어려운가 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무시로 언제나 항상 어디서든지 깨어 기도해야한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24시간 모든 장소에서 언제나 항상 깨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나 그렇게 기도하지 우리처럼 범인들이 세상일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쉬지 않고 무시로 항상 깨어서 어디서든지 기도하며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는 기도가 어디서든지 언제나 쉬지 않고 무시로 항상 깨어 하는 기도입니까? 어떻게 세상 속에 살면서 이런 기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의 성경에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 함께 읽어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바쁜 세상 속에서 무시로 언제나 어디서든지 쉬지 않고 항상 깨어 기도하며 살 수 있을까요?

  ■ 첫째로 먼저 우리의 기도생활의 현실을 어떤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쁜 생활 속에서 기도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바쁜 생활 속에서 기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중한 업무는 우리의 짐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는 기도의 삶을 가질 여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먹고사는 데 바쁜 현대인들은 기도의 시간도 없고, 기도의 삶을 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침 기도의 시간이 주어져서 기도 좀 해볼까 했는데 기도에 대한 훈련이 없기 때문에 5분 동안 하나님 뭐 주십시오. 하고 나면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설교 때마 외칩니다. "기도가 능력의 길이요. 응답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못하면 영적인 실패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설교를 들을 때면 성도들은 기도에 대한 열등감이 생깁니다. 기도에 대한 스트레스를 또 받습니다.
  그래도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열심히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고, 열심히 주의 일에 봉사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기도시간은 없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 둘째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오해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오해는 기도는 시간과 특별한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해야 바른 기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 시간을 따로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자칫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시간 이외의 시간은 기도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시간은 거룩하고 일상생활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특별한 시간을 정해 놓고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했고,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 생각은 기도는 거룩한 일이고 일상 일은 타락한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어떤 기도원에 가면 응답이 빨리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원은 영성이 깊고 어떤 기도원은 소위 영빨(?)이 세다고 하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가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시간에만 듣고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만 응답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하려면 산으로 가고 사막으로 특별한 은밀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며 하는 것이 중요한 기도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과 결판을 내는 기도를 하러 산으로 기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응답을 얻지 않고서는 죽겠다는 각오로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과 한판 겨루고 이겨야만 산에서 내려옵니다. 이런 기도를 해야 참으로 기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사람을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둘째 오해는 기도 시간을 길게 하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기도시간이 많은 것은 영성에 좋은 것이며 능력을 부여받은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시간을 정해 놓고 몇 시간 이상해야 하나님의 종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든지, 목사는 하루에 4식간, 장로는 하루에 2시간, 집사는 하루에 1시간은 기도해야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물론 기도시간이 긴 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시간은 길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영적인 사람의 평가 잣대가 된다면 이것은 기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런 사고는 기도가 영적 생활의 도구가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적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영적인 삶의 자체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생활자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을 당했을 경우 기도가 적어서 그렇다고 한다든지, 어떤 사람이 응답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기도시간이 적어서 그렇다든지, 아직 기도의 향그릇에 기도가 다 차지 않아서 응답이 없다고 한다든지 하는 말은 기도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셋째 오해는 기도는 세상의 삶을 끊고 오직 하나님에게 만 매달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면서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의 바쁜 생활은 이쪽에 있고 하나님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녁 때 하루 일과가 끝나면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장소에서 진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서 우리는 어리둥절해집니다. 우리는 신령한 생각들을 가지고 이 진공을 매꾸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기도시간이 우리를 채워주며 영성을 쇄신시켜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영성이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절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기도라는 것이 이 세상과 떨어져 있는 순간에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비추어 본 기도라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해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성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보면 이 세상은 속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곳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항상 콤플렉스를 가지고 기도의 열등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면 언제나 항상 어디서나 무시로 깨어 기도하라고 듣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 가정 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청년 여러분, 성경은 그런 기도생활이 가능하기에 그렇게 가르치고있지 않겠어요. 어떻게 무시로 쉬지 않고 항상 깨어 기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우리는 어떻게 세상 속에서 기도하며 살 수 있을까요?

  믿음의 길에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와 기도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기도하는 자만이 신자다"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철학자 닐스 페레(Niels Ferr )는 말하기를 "나는 기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재치 있는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룹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상징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를 어떤 하나님 앞에서 투쟁해서 얻어내는 어떤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칫 기도에 대해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기도의 의미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탄원기도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며 사귐이며 만남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뜻을 이 세상 삶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기도의 삶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영성의 길」이라는 책에서 "기도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며 그저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53p) 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이며 사귐이라는 말입니다.

  키엘케골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기도가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기도할 때 성도로가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어디서 기도 해야할까요?

  기도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합니다. 기도는 세상과 역사와 일기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 세상이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뒤로하고 공기가 희박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숨을 쉬기 어려운 것과 같이 어떤 장소에서 기도하기는 사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데 더 좋은 곳은 바로 이 세속적이 삶의 한 가운데서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기도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에서 "세속적인 거룩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속적인 거룩함"이란 내 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컨대, 전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날 그날의 생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의 전부를 거룩하게 보는 마음의 준비만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매 순간 매 사건 속에서 기도의 숨결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바로 세상은 타락했고 은밀한 장소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공간을 엄격하게 따라 정해 놓습니다. 그렇게 정해 놓고도 그 자리에서는 시간이 드뭅니다. 그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그 공간은 더 공허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간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기도로 가득 차 있는 생활이 넘쳐흘러서 이러한 공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권면을 하곤 합니다. "산에 가서 그 문제에 관해서 기도하십시오" 라고 경건한 충고를 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시다. 이런 경우 그 문제들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들을 껴안고 현장에서 씨름할 때 가장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올바른 선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노력할 때 가장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삶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기도는 먼 곳 어느 유명한 기도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의 현장, 내 살의 한 구석, 내 일을 한 모퉁이, 삶의 한 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든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삶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둘째, 어떻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어떤 시간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입을 열러 청원해야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는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어디서든 하나님의 기대를 바라고 내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때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선택을 하도록 기대하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경우에 이런 선택 저런 선택의 가능성을 놓고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방향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주여 주여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것만이 기도는 아닙니다. 물론 그런 부르짖음의 기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가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기도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열거해 놓고 만나서 상의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결국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기대하면서 내 마음을 열어 놓고 이런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이것이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중보기도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중보기도는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남과 함께 선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아파해 주고 그와 함께 고통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중보기도는 무언(無言)을 통해서나 사랑을 통해서나 행동을 통해서 그에게 귀 기울임을 통해서 남과 더불어 있는 것을 포함합니다. 제 삼자에 관한 이야기를 낱낱이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에 동참함으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아가페적인 사랑을 가지고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와 함께 있는 것도 중보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기도의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기도의 마음을 가지고 열면 우리는 기도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창한 말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는 마음 자체가 바로 기도 시간입니다. 이 기도의 축복에 들어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언제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사실 때가 없습니다. 항상 쉬지 않고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물론 이런 기도로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그를 위한 기도보다는 그를 만나기 위한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바라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기대하며 정말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바로 그 때에 나는 그를 위해서 정말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그를 위해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이 신음할 때 하나님의 영은 내 신음을 기도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과 구체적인 산 관계가 이루지는 것이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일단 뒤로 물러나 산에 가서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결론 즉 계시를 놓고 밝히 기록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도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이 활동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놓고 물러서서 은밀한 장소에 가서 홀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이 특별하게 거룩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시간이 반드시 더 영적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실 문제에서 떠나 한적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열매가 있기 위해서는 때와 장소와 은퇴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 자신을 이 세상 삶에 투신하지 않고, 나를 고립시키고서 어떤 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성령이 역사하는 시점은 내가 삶의 현장에 투신할 때 나와 함께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일을 성취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언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주님은 이 시간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자가 되기를 초청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기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살고 있는 그 장소에서, 내가 살고 있는 그 순간순간, 그 때에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의 삶, 이것은 헌신의 삶도 아닙니다. 선택의 삶도 아닙니다. 평범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패턴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이 기도의 잔치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시로, 항상, 깨어,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사십시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인가는 기도하는 사람인가에 결정됩니다. 주님과 매 순간마다 있는 처소에서 기도의 삶에 동참하십시오. 내 삶 속에서 기도의 삶을 만드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남의 삶에 동참하며 중보기도에 참여하십시오. 기도의 사람,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인생을 함께 거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