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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소명 1 /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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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11                                               
“베드로의 소명 1”(The Calling of Peter 1)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처음” 혹은 “시작”이란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던 해에 일기장을 처음으로 선물 받은 기억이 납니다. 매일 매일 한 페이지씩 쓰도록 되어 있는 일기장이었습니다. 그 일기장은 또한 맨 아래쪽에는 격언이나 기타 훌륭한 인물들의 말 한마디씩 기록되어 있어서 그 말을 묵상하도록 되어 있는 자상한 일기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1월 1일자 일기장 밑에 기록되어 있던 말씀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단추를 다 잘못 끼우게 된다. - 괴테(Goethe, 독일의 문호)” 그 당시, 어린 제 마음에 이 말은 참으로 인상이 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단추를 다 잘못 끼우게 된다”는 말씀에서 “처음” 혹은 “시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었습니다.

이러한 “처음” 혹은 “시작”이란 말을 우리 기독교 신앙에 적용할 때, 쓸 수 있는 말이 바로 “소명”이란 말입니다. 즉, “부르심”(Calling)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즉, 신앙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이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어쩌면 이 자리의 우리 모두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 혹은 “소명”은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에서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후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의 이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가 부르심을 받은 모습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서를 쓴 누가는 이 사건을 깊이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행위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공관복음(Synoptic Gospel)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공관복음인 마태나 마가는 이러한 베드로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4:18-20에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또 마가복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막 1: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이렇게 어떻게 보면 간단히 기록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읽은 본문과 같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사건의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좀 더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역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리하다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때에 성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1장에는 예레미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분명한 시작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작점은 우리 신앙인의 모든 삶에 하나의 초심(처음의 마음과 자세)으로 우리로 하여금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지 않고 바르고 온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출발점에 대한 내용이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받은 부르심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자세와 방향을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소명을 받은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들의 신앙의 방향과 자세를 검토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부르심 곧 소명을 베드로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서 우리의 소명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이러한 소명에 대한 확인을 해 봄으로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네 가지의 질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 우리의 소명이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소명이 우리에게는 복된 모습으로 주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소명에는 나를 부인하는 그러한 자세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소명에는 결단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질문 중에서 오늘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나머지 세 가지의 질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소명이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두 종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3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첫 번째 말씀을 베드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일반적인 말씀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말씀은 오직 베드로에게만 하신 고유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종류의 말씀이 가져다주는 상관관계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의 모든 사람에게 하신 일반적인 말씀과 두 번째의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하고 고유한 말씀과의 관계 말입니다. 첫 번째의 일반적인 말씀은 두 번째의 특별하고 고유한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믿음과 근거를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일종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 당시 베드로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날, 밤이 맟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는 입질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밤을 새운 탓에 무척 피곤하여 다시 깊은 데로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씻은 그물을 또 사용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을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명령이지만 거기에 순종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베드로가 들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5절 보세요.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여기서 “말씀에 의지하여”란 표현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잘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일반적인 말씀은 두 번째의 구체적인 명령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근거와 힘이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먼저 잘 들을 수 있는 자세와 모습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첫 번째 말씀인 일반적인 말씀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넓게는 여러분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시는 것도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그 일을 잘 하실 수 있도록 교회에서는 구슬꿰기라는 보충자료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 교회 김유성 성도가 여러분들의 편의를 도모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도 이러한 일반적 가르침에 해당되겠습니다. 우리가 매주 수요일 저녁에 그리고 청년회는 매주 금요일에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일을 잘 활용하신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 기도회 시간의 성경 강해설교나 주일 예배에 듣는 설교 말씀도 이러한 일반적 가르침의 말씀의 한 종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 설교를 여러분들께서 경청하시고, 좀 더 깊이 새기기를 원하시면 설교 테잎을 통해서나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접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베드로는 운이 좋게도 이러한 예수님의 일반적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서 가르침의 그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러한 일반적 가르침을 잘 받으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물질과 시간의 투자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신앙서적을 이용하신다든지, 시간을 투자하여 성경공부에 참여한다든지 해야 이러한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나에게 고유하게 말씀하시는 그래서 내가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겠지만, 특히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경공부는 하나의 가르침이지만, 설교는 가르침을 동반한 명령적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명령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말씀 곧 가르침과 명령에 대한 이행여부가 우리의 소명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두 종류의 말씀을 모두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일반적 가르침으로서,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명령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준행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 부르십니까? 선생으로입니까? 아니면 주님으로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둘 다가 아닌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이 두 가지 모습으로 다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주어질 때에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이 곧 우리 신앙생활의 첫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 시발점과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종교는 그 시발점이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약하니까, 내가 불완전하니까, 내가 불안하니까 그래서 절대자를 찾고 “그 품에 기대야지!” 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적인 입장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죄를 짓고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 하와와 늘 수풀 속에 숨어서 생활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피신해서 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먼저 나아가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나서는 무서워서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이러한 가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먼저 나타나 주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제가 불안해서 살 수 없습니다. 저를 지켜주소서” 하고 먼저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일반 종교와는 그 성격과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소명도 그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에 대한 바른 이해요, 자세인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출발점을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괴테의 표현대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모든 단추를 잘 끼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7교회 중에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부르심의 그 소명을 재확인해보라는 권고요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을 온전하고 바르게 간직함으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여정이 온전하고 올바르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십시다. 이 모습이 이번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의 모습을 재확인하면서 살펴보아야 할 우리들의 모습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처음을 확인하여 바르게 간직할 수 있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온전하게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하십시다.

<기도>

우리를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르신 그 소명을 생각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말씀 가운데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씀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고 실패한 가운데서 찾아오셔서, 그의 배에 오르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귀찮고 힘들었겠지만, 들리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함으로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 신앙의 시작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이러한 신앙의 온전하고 바른 출발점을 간직하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과 동행하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보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을 바르게 간직함으로 부르심의 소망을 굳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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