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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자를 크게 쓰시는 하나님 (삿 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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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크게 쓰시는 하나님 (사사기6:12-16)


어려움에 처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나라 지도자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12일 국회에서 가결되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역사에 있어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왔듯이 특별히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국민을 볼모로 한 정쟁의 극치를 지켜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고 정치인들이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정치상황을 탄핵 정국으로 몰아감으로써 국민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주고 국가경제에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함으로써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정치권과 정부 당국은 허탈감에 빠져있는 국민을 위로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며 한국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위기 앞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겸허히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권, 국회의원들은 국민에게 심려를 끼친데 대해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발생한 작금의 상황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무엇을 먹어야하는 식욕과 더불어 배가 부르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단 한번 뿐인 생을 보람되게 살다가 명예롭게 죽어야하겠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일생을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일만을 위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일생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이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본능적인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과연 보람된 삶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까? 하는 일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고 그 일을 위해 남은 생애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고 사방을 둘러보면 자기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 바로 오늘 나라면 비록 그러한 나일지라도 남은 생애를 보람되게 살고 싶은데 과연 그 같은 열등감이나 죄의식을 훌훌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고 남은 생을 보람되고 명예롭게 살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은 하찮은 일을 시키는 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면서도 까다로운 시험과 면접을 절차를 통해서 유능한 사람을 고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내가 약할 때 강하신 하나님이 약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결코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랜 동안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방인의 침략을 받아 위기를 만나게 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시는 중에 어느 때는 평범한 가정주부 드보라를 세워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쳐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로 인해 40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면 서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 징계를 자초하였습니다.

(삿 6: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벌써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이 같은 일을 네 번이나 경험하였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40년이라면 한 세대가 지났음을 뜻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면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하였으면서도 그 사실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가 계속되는 동안 신앙교육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미디안의 침략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미디안 족속은 원래부터 강대국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날 역사를 돌이켜보면 미디안 족은 출애굽 시에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했으나 이스라엘에게 대패를 당한 족속이었습니다(민31:1-12). 그 같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이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동안 다시 힘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7년간 압제를 하였는데 그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든지 토굴 속으로 피신할 정도였습니다. 미디안과 연합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종을 하면 토지소산과 식물과 소와 나귀를 남기지 아니하고 다 빼앗아 갔기 때문에 당장 생계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7년 동안이나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이탈할 때 과거의 승리와는 상관없이 오늘 사면에서 에워싸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미디안처럼 괴롭히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Matthew Henry) 오늘의 승리가 영원하리라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을 앞세워 현실에 안주하고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삿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는 말씀처럼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자신들의 힘으로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미약하다' '와이달'은 '쇠하게 되다'(be brought low)란 뜻 외에도 어원적으로 '가난하게 되다'(be impoverished)란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입자들로 인해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겼으므로 그들은 더욱 나약하게 되고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과거 그들의 조상들처럼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 하에 심히 곤궁하자 구원자 '하나님'을 애타게 찾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했었음과 더불어 모세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계명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6:7;19:5,6)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구별된 삶이 아니라 이방에 완전히 동화된 구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령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흠모하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모방하며 살아갈 때 그들의 신앙은 변질되고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는 타락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한 그 이방 세계를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그들이 추구하였던 물질의 고통을 맛보게 하심으로 그들의 잘못된 삶을 깨우쳐주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무조건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비록 하나님께 크게 범죄 하였을지라도 잘못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잘못된 삶을 바르게 고쳐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기드온을 부르심과 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땅에 큰 구덩이를 파서 포도주 틀을 만들었는데(사 5:2) 기드온이 미디안을 피하여 몰래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도 미디안 사람들이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고 핑계하면서 굴속에 숨겨논 양식으로 겨우 연명만 하고 있을 때 기드온은 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지혜롭게 포도주 틀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열심히 타작을 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공통점이 바로 일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이며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향해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를 룻 2:1에서는 '유력한자'곧 '재산과 덕망 그리고 세력을 겸비한 사람'으로도 번역되었는데 이는 기드온은 본래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을 할 정도로 연약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능력으로 큰 용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영광스럽게도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삿 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기드온이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사람과 대적하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이며 또한 자신의 가문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도적 위치에 있기는커녕 극히 약하여 보잘 것 없는 므낫세 지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담하면 선악과, 아브라함 하면 독자, 모세 하면 홍해, 여호수아 하면 여리고 성이 떠오르는 것처럼 성경이나 역사 속에 위대한 사람은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기드온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300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매우 용감한 장군 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기드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용감한 사람은 아니라 이처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를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를 아브라함이 대접한 것처럼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염소 새끼를 준비하고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담고 국을 담아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그 것을 먹는 대신 제단의 불로 응답하였으며 그 날 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중대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은 기드온이 우상을 박살낸 사실을 후에 동네 사람들이 알고서 기드온을 죽이려고 한 것만 보아도 잘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위험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밤중에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위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일을 다 마쳤습니다.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훼파한 일 때문에 성읍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기드온의 부친 요아스는 참 신은 징계하나 거짓 우상은 벌하지 못한다는 참신과 거짓 우상,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였을 때 기드온에게 아무런 저주도 임하지 아니하자 사람들은 기드온을 가리켜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으로 '여룹바알'이라는 이름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삿 6:33)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는 말씀처럼 미디안이 쳐들어오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용사처럼 자리를 떨고 일어나서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같은 기드온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은 제일 작은 자라고 하였던 옛날의 기죽은 모습이 아니라 큰 용사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삿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 성령이 기드온에게 강력하게 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강림하시니'로 번역된 원어 '라바쉬'는 '옷을 입히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갑옷을 입히시듯 온통 감싸심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11:29;13:25;14:6;사 11:2;요 20:22;행 13:2;고전 12: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때마침 침략한 대적들로부터(33절)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게된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삿 6: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는 말씀처럼 기드온에게로 돌이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미디안에게 고난 받는 이스라엘의 청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고난 받는 동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애국심을 다 갖고 있었지만 문제는 소명감과 자신감의 부족으로 인해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 역시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말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삿 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약속 하에 모세와 함께 하셨고(출 3:12)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수 1:15).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 하셨던 것처럼 이제 기드온과도 함께 하사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두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드온의 불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온 백성들에게 증거하여 기드온을 따르게 하는 좋은 증거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기드온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삿 6:37)“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양털만 이슬에 젖게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밤에 사면은 이슬에 젖고 양털만 마르게 해 달라는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양털에 이슬이 내린 것이 우연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며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심으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셨으며 기드온은 제일 작은 자에서 큰 용사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기드온은 약한 사람이었으나 그들을 큰 용사로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을 때 큰 용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문이 비천하고 실력과 재주가 없고 무능력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와 부족을 알지 못하고 교만한 것이 문제이며, 자신이 작은 자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기드온을 찾고 계십니다. 주의 일꾼이 되기 전에 자신의 일에 충성하며 자신이 제일 작은 자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하며 주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누구든지 큰 용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약한 모습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옛날 기드온을 만나셨던 평강의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향한 기대를 품고 부르고 계십니다.참된 신앙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어떤 불평도 핑계도 다 받아 주십니다. 문제는 그분께 나아가든지 그 분의 부르심에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다가 슬픔과 실패로 가득 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보다 더 내가 하나님께 기드온처럼 붙잡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게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창 41:38,39), 예언(민 11:25,26), 비상한 체력(14:6,19)등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약한 자를 부르시며 그 약한 자에게 큰 기대를 거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은 나약하지만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결코 약하시지 않고 전능하심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의 위로자가 되시며, 강하게 하시며 도우셔서 마침내 큰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제일 작은 자라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은 그 제일 작은 자를 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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