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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터치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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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터치 (마태복음 3:13~17)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29세 때와 30세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예수님의 29세 때까지 기적과 능력과 말씀 등은 감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30세가 되면서부터 지상에서 볼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들을 행하시며 천국의 말씀을 전파하시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께 어떤 분기점이 있었고 그로 인해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을 찾아간 예수님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기적과 능력들을 많이 행사하셨습니다. 그런 중에 위기, 고난, 핍박, 시험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믿어 보려고 하면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흔들림 없이 가던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었을까요? 거기엔 비밀이 있습니다.
원래 죄인이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활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면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을까요?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게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일곱 번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즉 일곱 번의 터치(Touch)가 있습니다. 그에 대해 7회에 걸쳐 설교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하던 요한복음을 잠시 내려놓고, 7회 시리즈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놀라운 사역의 비밀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처럼 7가지 축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첫 번째로 성령 터치입니다. 13절 말씀을 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놀랍게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서 먼저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온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눅 3:16, 요1:27)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가 시작된다는 점은 매우 의아한 일입니다.

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어떻게 인간을 찾아가실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셋,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세례를 받으시며 아버지의 능력을 입는 것이 순서상 옳은 것이 아니냐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찾아가셔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구원자로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13절 말씀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을 찾아간 이유는 바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존심, 경쟁심, 반항심마저 버리시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존심, 반항심 등 모든 사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특징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체면이나 지위 따위를 생각지 않으시고 세례 요한을 찾아 겸손히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섬길 때 하나님의 기적들은 나타나게 됩니다.

둘째는 원래 세례는 죄인이 회개한 후에 받는 것인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세례를 받아야 하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죄인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겸손과 자기희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복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 위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을 때 충격을 받은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존재했고 그분의 앞마당을 쓸고 있었으며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평탄케 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시다니 요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강경하셨습니다. 극구 사양하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억지로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이 신념이거나 고집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상처 받아가면서 끝까지 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것은 아집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애정, 사랑, 헌신, 눈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 ‘나에게 세례를 주라. 이를 통과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이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의도를 즉시 알아차리고 곧 태도를 바꿉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허락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정한 겸손은 세례 요한을 찾아오신 것이고, 세례 요한에게 진정한 겸손은 예수님의 요구를 허락한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다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선생으로서 솔선수범해 겸손을 보이시며 세례 요한을 찾아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겸손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떨림과 두려움 가운데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요한은 물로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세례 공동체로서 세례 중심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세례를 주고 있는데 주일마다 세례를 베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물세례뿐 아니라, 성령 세례의 축복도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세례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모두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16, 17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 가지 영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한 번 임하시면 계속 머무시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를 흔히 불세례라고 말합니다. 셋째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런 영적 사건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예수님의 공생애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영적 사건으로 하늘이 열린 것은 하늘이 허락하시고 하늘과 통했음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이 이뤄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래가 열린 사람이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가 닫힌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즉 하늘이 열린 것은 하늘이 허락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스스로 결정하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시고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역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자주 갈등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하지 않고 인간족인 생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곧 죄사함을 받으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 영적 사건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머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터치이며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29년 동안 조용히 지내시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마치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합심으로 기도하던 중 오순절을 맞아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기운이 120명의 머리 위에 임하셨습니다. 저들은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텅 빈 영혼에 성령 충만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터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성령님의 생기와 능력들이 각 개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스며들어 사고와 언어와 행동들을 주관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라는 것입니다. 어떤 영, 말씀, 인격이 나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외롭던 영혼은 풍성해지고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게 만듭니다.
하늘이 열려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을 때 예수님께 성령 터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지십니다. 마귀의 세력을 꺾고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을 만나주시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억압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들을 보여주십니다. 천국 말씀을 선포하시고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시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는 등 권능의 삶을 사시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기능이 탁월한 첨단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열쇠를 넣고 돌렸더니 가볍게 시동이 걸리면서 첨단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동차에 올라타고 가지 자동차를 밀고 가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개인의 힘, 이성, 의지, 선행 등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고 해도 밀고 간다면 힘듭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타고 갑니다.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 중·고등부를 거치면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재수할 때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 CCC 학생 단체를 통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예수님을 믿었고 봉사, 전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한 것은 한참 후였습니다. 30~40년 전의 그 일이 마치 어제와 같이 아직도 저의 가슴에 불길처럼 일어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체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 실수가 있고 결심했다가 무너뜨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연약함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한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AD와 BC로 구분하듯이,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AD와 BC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것을 계기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AD와 BC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준으로 성도님들의 생애가 이전과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이후 삶에서 전도를 하면 잘 되고 영적인 일들이 일어나며, 기도에 모두 응답을 받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성령 터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17절 후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후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공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의 체험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 세례 없이 듣는 것은 마귀의 소리요, 자기 묵상의 결과일 뿐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고,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서 핵심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음성만 들을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작고하신 저의 장인께서 손주들을 많이 두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의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손주들이 이야기하고 뛰어다니면 시끄럽다고 야단하셨는데, 저의 아들에게만 모든 것을 용납하셨습니다. 저의 아들을 아주 편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항상 좋고 무조건 기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이 하는 짓이라면 모두 좋고 마냥 예쁘게 여깁니다. 그렇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좋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로 기뻐하는 자로 여기십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험한 세상을 이기고 주님 안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할렐루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령 세례가 임하게 하시옵소서.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에게도
성령 세례가 임하게 하시옵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아직 영혼이 어두운 사람들에게도
성령 세례가 임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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