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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② (엡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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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좋은 교회 ②
성경본문 에베소서 4:11-16

설교내용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믿는 이것은 신앙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지어가는, 교회를 섬기고 교회 안에서 자라가는 믿음은 사명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믿음은 능력의 회복입니다. 이 세 가지가 늘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사명이, 능력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믿음

  좋은 믿음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좋은 믿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었지만 구원의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좋은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부인해 버리면 구원도 성립이 안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죄를 모르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뱀이 한 말은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별 것 아닌 신이야,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참으로 이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그렇지 않다 눈이 밝아진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부인하게 하는 이것이 사탄의 전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인해 버리면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되느냐?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영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부인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왜 믿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구원도 영원하다.” 기독교에서 아주 의미 깊게 쓰는 용어가 ‘영원’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영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영원이라는 말은 미래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영원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포함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누린다고 할 때 죽고 나서 영생을 누리는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기독교의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그 과거가 이 영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고 사는 나의 축복이 영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좋은 교인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교인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교인이 많아야 좋은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보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음이라” 사망에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길에 매우 중요합니다.

  세 가지 의미

  제가 구원에 대해서 세 가지 설명을 곁들이겠는데 이 세 가지 방면에 여러분은 아멘을 가진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사람들이 왜 구원의 확신에서 흔들리는가? 그것은 제가 설명한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 가지가 해결이 됩니다. 이 세 가지 해결에 대해서 아멘 하는 믿음이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았는데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항상 흔들립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충성을 못합니다. 자기 신앙관리도 안 되는데 어떻게 남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합니까?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해결된 믿음,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첫째, 인생관의 해결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대한 해답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위기가 와도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었다 하는 것은 인생관이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살든지 죽든지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믿음입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죽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를 주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관의 해결입니다. 죽음문제의 해답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치관의 해결입니다. 예수 믿고 어떤 불행이 닥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 믿고 고난이 오고, 내게 절망이 부딪쳤다 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믿음이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내게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이 나의 주되시는 그것이 모든 고통을 극복하는 열쇠가 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 어려움은 사는 가치관을 가지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우리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장애라도 그런 장애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 마음 안에 주가 되어서 그 불행이 찬송의 근거가 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너무 좋아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서, 자기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는 ‘이대로가 좋다’고 그 사랑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위로합니다. “장로님, 얼마나 힘드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멀쩡하게 일하던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휠체어 인생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그 장로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휠체어에 갇힌 몸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자유 했습니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 마음대로 활동할 때는 예수님의 은혜를 몰랐고 자유를 몰랐는데 휠체어에 갇히고 보니까 예수 안에 아주 넓은 자유의 세계가 있습니다.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게는 충만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가치관을 해결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몇 푼의 돈 때문에 가치관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인정 때문에 가치관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어떠한 불행 앞에서도 나는 아멘이요 행복하고 자유가 있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다는 가치관이 해결되는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치관이 없는 신앙생활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가치관이 예수가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성된 사람은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기독교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열 마디를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생을 던지고 사는 사람은 한 마디만 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속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길에는 쓴맛이 있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 주님을 위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충성하고 살려면 힘이 드는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그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헛된 가치관과 참된 가치관

  저는 20세기 최고의 부귀영광을 누린 사람은 희랍의 선박 왕 오나시스 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세계적인 부호입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세계도처에 가장 경치 좋은 섬 열 개를 사서 초호화 별장을 만들어 놓고 온 세계를 유람하며 즐기고 살던 사람입니다. 호화 요트를 여러 척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와 염문을 뿌렸고 그가 소유하고 싶은 여자들은 다 소유했습니다. 이 땅에 비교가 안 되는, 그 누구도 경쟁이 안 되는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 여사까지도 자기 손에 다 넣었습니다. 수천억을 투자해서 재클린을 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여자든 요트든 별장이든 무엇이든 다 가졌습니다. 그런 부귀영광을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비참한 종말을 맞았고 그 자신도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여러분, 권력과 돈은 인생의 답이 아닙니다. 대통령이라는 지위는 어마어마한 권력의 자리입니다. 대통령이 부르면 모든 장관들이, 모든 비서관들이, 모든 국회의원들이 모든 판검사들이 안 올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를 수 있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여러분은 인생의 가치관을 어디에 걸고 있습니까? 돈 문제입니까? 권력입니까? 거기에 답이 없습니다. 왜 예수 믿으면서 왜 땅위의 것 때문에 예수님 이름을 더럽히면서 삽니까?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기둥서방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예수보다 더 좋아하는게 있는 이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형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형성된 사람은 땅위의 것을 구해도 언제나 그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땅위의 것을 얻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던지는 것입니다. 휠체어 인생 장로님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설교를 주고 있는 분입니다. 육신이 불행하다고 주 앞에서 충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육신이 너무 형통하기 때문에 충성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지금 컨디션이 너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가치관의 위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팔일된 아이가 양피를 자른 그 부위가 퉁퉁 붓고 무슨 면역성이 있습니까? 그 아이로서는 죽음을 통과하는 고통을 치르는 일입니다. 그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아이를 키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아법입니다. 어릴 때부터 무슨 금덩이처럼 그렇게 얼르는게 아닙니다. 고난부터 가르칩니다. ‘네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고난을 먼저 알라’ 이것이 할례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얼음물에 담갔다가 끄집어냈다가 하는 그런 훈련법을 거친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도 전통적인 중국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의 육아법은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혓바닥에 초를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강한 신맛 때문에 애가 자지러지게 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맛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금을 입안에 넣어서 그 짠맛 때문에 아이가 또 못 견디는 경험을 하게 한답니다. 그리고 아주 쓴 식물성 엑기스를 혓바닥에 떨어뜨려서 쓴맛도 알라고 교육을 시킨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바늘을 가지고 혓바닥을 콕콕 찌르면서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는 마지막에 꿀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그런 민족들의 육아법에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고난의 맛을 알고 단맛을 알아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기쁨을 얻어야 됩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길인지, 예수 믿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여기에 대한 의미를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받아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을 받고 가치관의 해결을 받은 사람은 어떤 위기 앞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너무 꿀맛부터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꿀맛부터 자꾸 추구하면 쓴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도움은 근본적인 문제인데 사람의 도움을 무시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에게 얽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인생관의 해결과 함께 가치관의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축복

  세 번째, 육신문제의 해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육신의 문제를 배제하는게 아닙니다. 예수 믿고 육신이 잘 되는 이것이 구원의 한 영역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질병이 고침을 받거나 물질의 축복을 받는 이것도 구원의 한 영역입니다. 이것을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물질의 회복을 받는 이것도 구원의 확신의 한 영역입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이 물질적으로 복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 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관의 해결, 가치관의 해결이 희미하면 물질을 가지면 위험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등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것이 확실히 된 사람은 물질을 아무리 가져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물질을 쓸 줄 압니다.

  양은 약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됩니다. 또 양은 장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월감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겸손과 봉사를 항상 같이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항상 조심해야 되고 근신해야 되고 겸손해야 되는 게 바로 그런 점입니다. 물질을 가졌다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런 약점이 우리한테 있기 때문에 항상 근신하고 겸손해야 됩니다. 그 가치관을 가지고 물질의 회복이 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공간적으로 하늘에서,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땅에서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예수 믿으면 하늘에 계신 하늘나라 생명책에도 내 구원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하나님 뜻이 함께 이루어지는 게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서 흔들리면 안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의 영역에서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다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전부 구원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죽음 앞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그 가치관 앞에서도 그리고 물질의 궁핍과 부요함 앞에서도 당당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그 세 가지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세 가지 문제 앞에서도 언제나 아멘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믿음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교회직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사도로 선지자로 목사와 교사로 복음전하는 자로 전했다, 그런데 왜 그 사명을 주셨는가? 그 사명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또 우리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직분의 사명이 그렇게도 분명합니다. 16절에 보면 “그에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으므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안에 “역사하여” “몸을 자라게 하며”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런 말씀들이 얼마나 우리를 채찍질하는지 모릅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믿음을 가졌습니까? 역사란 말은 일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분량대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을 자라게 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자라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스스로 교회를 자라게 하고 세워가는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내 믿음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자라고, 내 믿음 때문에 주님의 몸이 자라가는 믿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교회가 자라가는 것, 그 믿음에 너희들이 포함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드는 것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본문 14-15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함이라” 성숙하라는 말이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라가는 믿음, 예수님을 향하여 자라가는 믿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피상적으로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고쳐야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저 교회 다니는 정도는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대해서 정말 깊이 생각하고 예수 믿기 바랍니다. 믿음이 그렇게 쉽고 가벼운게 아닙니다. 주일날 교회 빠지지 않고 교회 봉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에 진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불구가 될 때가 많습니다. 평생 교회는 다녔는데 신앙은 불구자입니다. 그것을 일찍 극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연날리기를 해보셨습니까? 저는 연을 만들어서 날려도 보았고 연줄에 유리를 먹여서 연 싸움하는 것도 제법 잘했습니다. 그런데 연은 끈이 떨어지면 정말 비참합니다. 끈 떨어진 연만큼 비참하고 무능한게 없습니다. 줄에 실려 있는 연은 별 것 아니라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끈이 떨어진 연은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다 끈을 달고 있습니까? 사람에게 물질에게 무엇에다 여러분 믿음의 끈을 매어놓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믿음의 근거를 추적해 보면 우리 신앙의 끈이 엉뚱한데 매여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연은 줄에 매어 있어야 됩니다. 이 줄 외의 연은 다른데 의지해 가지고는 답이 안됩니다.

  믿음의 끈

  저는 신앙적으로 외롭게 출발을 했습니다. 내 위로 우리 집안에 목사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늦게 믿은 집안인데 신앙적으로 아주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내게 다가온 그 믿음의 끈이 누구냐 하면 박치덕 목사님입니다. 제가 한산도에서 떨어진 지섬의 기도소에 첫 전도사로 나갔는데 귀향을 간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소에 당회장으로 계신 박치덕 목사님이 순회를 오셨습니다. 거기서 그 어른을 만났는데 내가 만나 처음으로 교제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저를 잘 보아주셨는지 시무하시는 교회에 전도사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른 밑에서 제가 총각 전도사이지만 자식처럼 사랑을 받고 그렇게 수년을 지냈는데 이 분이 부산으로 이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내 끈이 그만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동한 교회에서 또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내가 두 번이나 같은 목사님께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은 내가 쓸 만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그 분 밑에서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나를 두 번이나 불러서 6년 동안, 내가 신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나를 키워준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서울로 와 버렸습니다. 정말 내가 인간적으로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끈이 떨어졌습니다. 제가 끈이 떨어져 가지고 살 길을 찾아야 되겠다, 나를 세 번째 불러줄 리는 없고 이제는 내 길로 가야 되겠다 하고 교회개척을 나선 것이 그 때의 일입니다.

  여러분, 저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믿음의 끈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유일한 끈입니다. 저는 내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도 나를 사랑합니다. 저는 내 아내가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면 안됩니다. 아내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마세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처럼 하든지 하나님보다 더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 잃었다고 인생이 끝나고 아내 잃었다고 인생이 끝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땅위에 아무리 귀한 것을 잃어버려도 그 분 안에서 우리는 답이 있는 인생입니다. 우리 믿음의 끈이 하나님입니다.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을 보신 분들은 잘 압니다. 달걀 안에서 병아리가 밖을 나오려면 껍질을 깨어야 됩니다. 달걀이 아깝다고, 껍질이 아깝다고 그냥 두고서는 병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껍질을 깨트리고 알을 깨고 그 안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의 것을 깨트리세요. 육의 껍질에 쌓여서 하나님의 사랑의 진미를 평생 모르고 인생이 끝나는 그런 신앙인이 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 그 분의 사랑의 깊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물질의 벽을 깨야 됩니다. 인간적인 가치관의 벽을 깨야 됩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 믿음의 회복이 일어나야만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교회 성전건축에 물주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물주를 벌써 찾았습니다. 조물주 하나님만큼 큰 물주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슨 걱정을 합니까? 하나님이 이 땅위에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한 물질을 주셨고, 우리 개개인에게 주신 물질이 얼마나 많은데 전부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그 물주가 조물주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물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좋은 믿음을 가져야 좋은 교인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가치관 앞에서, 육신적인 문제 앞에서 언제나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이 삶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한없이 용감하게 합니다. 자유롭게 합니다. 땅 위의 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믿음의 장애를 빨리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우리 모두가 좋은 믿음을 가진 좋은 교인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영천교회가 정말 이 시대에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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