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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④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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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좋은 교회 ④
성경본문 히브리서 11:5-6

설교내용 

좋은 교회는 여러 가지로 정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서 “에녹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또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이렇게 설정을 하고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이 말은 대단히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에녹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했다는 이야기로 소개를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년을 동했는데 거기에 구체적인 사례로 이러저러한 일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삼백년을 동행했다고만 했지, 어떻게 동행했는지 그 사례는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이 말도 매우 추상적입니다.

  믿음의 가치 위에

  저가 있는 방의 보일러 리모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리모콘이 그 방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전선이 끊어졌다가 붙었다가 합니다. 어떤 추운 겨울날은 방에 들어가니까 서늘해서 보니 전선접촉이 불량이 되어서 작동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으면 또 되고, 이 전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보일러 작동이 아주 불규칙한 것입니다. 상태가 안 좋은 것입니다. 결국 전선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리집사님 보고 하나 바꿔야 되겠다 해서 바꾸고 나니까 아주 안전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겠다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이 전선처럼 전선이 연결되어 있으면 전기가 들어옵니다. 전선이 끊어져 있으면 전기가 끊어집니다. 불이 안 옵니다. 작동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예수 믿으면 그것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 안에 살면 이것은 믿음의 사실이 우리 안에서 삶으로 형성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이 말은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믿음이 믿음으로 사는데는 연속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은 단회적이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번에 주어지지만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항상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전선이 붙어있는 상태처럼 항상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총회회관 상담소에 어떤 분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몇 년 전에 교회를 이동했는데 이상하게 그 교회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시 본 교회로 돌아가려고 해도 잘 안되고 제삼의 교회로 이동하려 해도 그것도 어렵고 그래서 힘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는 상담입니다. 막연하였습니다. “지금 교회에 왜 적응이 잘 안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안수집사인데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취임을 해줄 분위기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집사로 취임을 해야 자리를 잡고 신앙생활을 하겠는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분위기가 안 되고 시간만 자꾸 가니까  지금 불편한 것입니다. 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집사님이 안수집사로서 교회이동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쪽 교회서 안수집사를 안 하겠다고 교회를 이동한 것인데 왜 직분에 그렇게 연연합니까? 안수집사를 받았던 교회를 떠나왔으면 이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주든 안 주든 연연하지 말고 충성하세요.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안수집사직을 받는게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안수집사직에 연연하지 마시고 충성하세요. 그러면 갈등이 물러갈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을 맡았으면 제대로 하고 직분이 없으면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충성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표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에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권면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교회봉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표적은 벌써 놓쳤습니다. 내 신앙생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흔적도 없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좋은 교회를 세워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이 말이 매우 막연한데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 됩니다. 그 분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그 분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하는 것인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말씀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살 길을 가르쳐 주셨고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 사람들의 업적을 말씀 안에 소개해 두었고 에녹같이 우리에게 신앙의 선배로 길잡이가 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젓가락

  어느 지방에 효부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집안에서도 아주 칭찬이 자자합니다. 왜냐하면 시부모님들이 며느리 봉양을 통해서 아주 건강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식생활을 통해 몸이 불편해서 힘들어 하던 노인들이 며느리 봉양을 통해서 식사도 맛있게 하고 그렇게 노년에 건강하게 살게 되고 집 안에서도 보게 되니까 이 며느리를 그렇게 칭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수가 효부상을 내렸는데 어떻게 시부모님을 봉사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어찌해서 그렇게 어른들이 식사도 잘 하고 건강도 좋아지게 되었는가?” 이 며느리 대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제가 어른식사를 받들어보니까 음식을 이것저것 하는데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이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체크를 해서 계절별로 봄에는 우리 아버님이 뭘 잘 잡수시는가? 여름에는 뭘 잘 잡수시는가? 하는 것을 체크해서 어른들 젓가락이 자주 가는 그 반찬을 기억해서 그 메뉴를 따라서 봉양을 하니까 노인들이 그렇게 식사도 잘 하고 건강도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비법은 그것 하나뿐이랍니다.

  저는 그 효부의 이야기 속에 ‘아하, 하나님도 젓가락이 계시겠다’ 싶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내 밥상의 어디에 젓가락질을 자주 하시나? 내 하루 생활 속에, 내 일년 생활 속에, 내 일생의 밥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젓가락질을 자주 하시는가? 그것을 일찍 파악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젓가락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생애는 여호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밥상입니다. 월요일엔 월요일 밥상을 하나님 앞에 차려드려야 됩니다. 매일매일 여호와 앞에 밥상을 차려드리는데 하나님이 기꺼이 젓가락질을 하실 수 있는 밥상이 되어야 합니다. 솔직하게 어른들이 밥상을 거부하면 아주 난처합니다. "얘야, 입에 맞는 반찬이 없다” 하고 밥상을 물려버리면 그 며느리는 황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드시지 못하는 밥상을 매일매일 차려드렸는지 의식도 안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밥상, 하나님이 즐겨 드시는 밥상이 되도록 우리가 살아 드려야 합니다. 그 분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몇 주 전에 모 대학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거기에 저가 아는 후배가 한 사람 왔었습니다. 그 후배 목사님은 “목사님은 세미나를 자주 오십니까?” 그럽니다. “아니요, 나는 작년 같은 경우는 한 번도 못 갔고 이번에 오랜만에 왔습니다.” “예, 그런데 저는 세미나에 자주 옵니다. 여름휴가 때는 두 세 개의 세미나도 참석을 합니다”라고 세미나에 많이 참여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친구는 거의 월중행사로 세미나를 참여합니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와서 세미나를 참여하려면 경비도 제법 듭니다. 그것을 보고 나쁘다 할 수 없고 한데 그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세미나에 많이 참여해서 배우는 것도 많이 있는데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보니 세미나 중독증에 걸린 후배였고 또 세미나만 다니는 목사님들이 더러 계십니다. 그래서 제게 묻길래 훈수를 떠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세미나를 자주 안 다니시는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설교준비를 합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김 목사, 내가 하는게 기준은 아니지만 내가보니 자네는 세미나를 너무 많이 다니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 보게. 세미나는 일년에 한 두 번만 가도 되고 서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지만 글을 좀 써보고. 메모도 해보고 서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면 세미나를 그렇게 많이 안 다녀도 되네. 나는 지금까지 그런 형식으로 많이 하는데 그것이 내게 많이 유익하네. 자네가 내 방에 한번 시간이 있으면 와 보게.” 제 방에 오면 조그만 메모지가 굉장히 많습니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TV의 강의를 들은 느낌을 전부 메모로 다 적어 놓습니다. 예배당에도 많이 갖다 놓았는데 이것은 새벽기도 때 인용하려고 갖다놓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면서 이렇게 적어보고 정리하는게 중요하지 세미나만 다닌다고 답이 안됩니다.

  생각하면서 살자

  여러분도 바쁘게 사신다고 잘사는게 아닙니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그것을 한번 정리를 하십시오. 안 그러면 평생 방황하고 끝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게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관심을 안 가지면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게 뭔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게 뭔지 잡혀집니다. 그러니까 어려우면서 쉽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게 막연한 것 같은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자고 결심을 하고 여호와 앞에 기쁘시게 하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많이 보여집니다. 우리 믿음의 눈은 항상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소망을 가져야 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낮은 곳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낮은 곳을 보아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많이 보입니다. 우리는 낮은 곳을 보는 일에 굉장히 인색하고 무관심합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면 첫째, 그는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아버지로서 가정을 거느리면서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으니까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가정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단위로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헌신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믿음으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결정이 됩니다. 에녹이 자녀를 낳으면서 삼백년을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가정을 통하여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됩니다. 가정은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가정은 에베소서 5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이 말은 히브리어를 가지고 해석을 붙이면 이것은 일방동행이 아니고 왕복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께 응답하고 우리가 주고받는 왕복동행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왕복동행입니다. 그는 주었고 받았습니다. 그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그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가 삼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 성경에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했다고 하는 그것이 꼭 증거로 남아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가 받으신 것으로 끝나면 됩니다.

  오늘 저가 젊은 청년에게 사탕을 하나 받았습니다. 화이트데이라 하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살맛이 나는게 발렌타이 라고 초쿄렛을 주는 아가씨도 있고 사탕을 주는 젊은 청년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탕 하나입니다. 이 조그마한 것을 저를 기억하고 준다는게 대단한 것입니다. 받는게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마 이 사탕을 준 청년은 내게 준 것으로 또 기뻐할 것입니다. 내게 준 것을 계획을 하고 작정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 목사님께 화이트데이를 기념하자고 준 것입니다. 주고받는 이것이 그렇게 좋습니다. 왕복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주면서 받는 삶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사도 바울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마지막 말로 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는 것도 기쁘고 받는 것도 기쁩니다. 그런데 그 둘 중에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여러분이 잘 새겨서 적용을 해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주는 행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줄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받을 때는 받아야 되지만 계속 받아야 되는 사람은 아주 불쌍한 사람입니다. 평생 받고 사는 사람만큼 비참한 인생이 없습니다. 남한테 안 받으면 안 되는 인생은 정말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는 것은 계속 줄수록 그 삶이 풍요해지고 복된 것입니다. 받는 것은 계속 받으면 망가지는데 주는 것은 계속 줄수록 우리가 풍요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로부터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십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해서 내가 주었다, 내게 오는 게 있어야지 하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기다리지 말고 주십시오. 계산하지 말고 주십시오. 집착하지 말고 주십시오. 우리는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연호씨라는 사람은 기자출신이고 작가입니다. 이 사람이 한 때 반미주의 운동의 주동자로서 몇 번 사고를 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내가 반미운동을 하려면 미국을 알아야 되겠다 해서 미국유학을 갔습니다. 이 사람이 8년간 공부를 하고 나서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어려운 제목의 책을 썼는데  미국을 8년동안 보고 나니까 ‘아, 미국을 이길 나라가 없다. 한국은 절대로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놀라움을 가지게 되었는가? 미국이란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지구촌의 어떤 나라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 그 이유 중에 이 사람이 제일 감동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 무엇이냐 하면 미국은 발론티어 정신, 즉 자원봉사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왜 강하냐? 그 속에 들어가서 보니까 이것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정신적인 유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미국에 머물던 그 때의 공식적인 통계로 미국국민 중에 사천만명이 자원봉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횟수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한 번한 통계가 아닙니다. 사람을 계산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열 번 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이 다섯 번 할 수도 있는데 회수가 아니고 참여한 사람 수인데 자원봉사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잠시 살아본 사람들은 잘 실감합니다. 저도 잠간 있어보았는데 저도 이 사람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게 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이상합니다. 자원봉사 정신이 굉장히 강합니다. 어린 아이들로부터 교육이 됩니다. 부모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면접시험을 볼 때 자원봉사 경력을 따집니다. 하버드대학에 들어가려면 자원봉사 경력이 평점을 못 받으면 안됩니다. 미국의 일류대학에는 자원봉사 경력이 면접으로 증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원봉사가 몸으로 가서 참여하는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반드시 이 사람들은 기부금을 냅니다. 이 미국이란 나라가 왜 강하냐? 명분이 있는 일에는 조건없이 기부금을 내는 것입니다. 신문의 광고를 보고 ‘아, 저 일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다, 국가를 위한 일이다, 저 일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다’ 하면 조건없이 기부금을 보냅니다. 미국에는 카운티 신문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종로구청 신문, 서대문구청 신문처럼 카운티 신문이 있는데 그 신문에 보면 여러 가지 기사가 많이 있는데 거기에 도움을 요청할 때 누가 도와주겠느냐 싶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줍니다. 그게 미국사회입니다. 미국사회는 도움받은 사람은 자기가 어떤 힘을 또 가지면 반드시 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기부문화, 빌 게이츠부터 상징적으로 앞서 있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가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번 사람인데 자기가 번 돈의 이분의 일을 미국사회에 기부를 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이분의 일을 기부한 것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280만불이라는 돈입니다. 그 사람은 돈이 많아도 그렇게 하고 또 돈이 없는 사람도 의미가 있는 일에 기부문화에 참여하는게 미국문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오연호씨가 미국을 이길 나라는 이 지상에 없다, 한국은 절대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지금 한인교포들이 이 기부문화에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돈 벌어서 흑인들 앞에 테러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벌었으면 사회로 돌리는 것이 미국문화, 기부문화입니다. 발론티어 정신입니다. 이것을 이행을 하지 않으면 미국사회에서 드러나 버립니다. 아이들부터 자원봉사 하는 것을 가르치는 미국사회의 정신은 미국을 그렇게 강하게 무장시키는 정신이라고 한 작가가 우리 앞에 증언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는 자는 강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준 기쁨은 받은 기쁨과 비교가 안됩니다. 준 기쁨이 강합니다.

  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어떤 분의 글 속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 줄 때도 항상 빼앗기는 마음을 가지면서 준다. 줄 때마다 마음을 담아주지 못하고 늘 주고 나서는 빼앗긴 기분으로 계산만 하고 있다.” 우리는 주고 나서 자꾸 계산만 합니다. 그리고는 ‘아깝다. 왜 주었나?’라고 탄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드려놓고 ‘아깝구나, 빼앗겼구나’ 늘 빼앗긴 기분입니까? 그런 마음이니까 위로부터 주시는 것을 하나님이 유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는 삶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는데 해당되는 그 대상들이 전부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예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98년 8월14일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우리가 수혜나 재난을 당하면 의연금을 거두는데 한 할머니가 조선일보에 수재의연금으로 오천만원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할머니 여기 기탁소에 주소, 성명을 써 주세요.” “나는 그거 필요없고 이 돈만 접수하고 끝내세요.” “할머니 이 귀한 일을 하시는데 이름을 좀 적어주세요.” 기어코 안 적는 것입니다. 기자가 “할머니 이 돈을 어떻게 모으셨어요?” 하니까 “예, 아들하고 나하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틈틈이 모았는데 내가 하나님께 쓸려고 모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안 드리고 신문사로 가지고 왔습니까?” “기도하는 중에 내가 수재민들을 돕는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줄 깨달았기 때문에 가져왔습니다.” 할머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는 기자의 말에 기어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할머니 중심에 있는 행복을 부러워합니다. 그 할머니가 그렇게 순수하게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줄 기도 중에 깨달았기 때문에 드리고 간다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사례지만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줍니다.

  맺는 말

  보이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그러므로 안 보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많은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의 삶 속에 적용을 해야 됩니다.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 오늘도 하나님의 젓가락질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내 삶속에 어느 대목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하는 일 어느 대목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어느 대목에 하나님 젓가락이 머무시는가? 그것을 좀 생각해 보는 신앙생활이 됩시다. 정리해 봅시다. 메모해 봅시다. 이제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영천교회가 다른 특징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 교회위에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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