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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2) - 때깔이 좋지 않은 교회 / 마 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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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2)
- 때깔이 좋지 않은 교회 -

복음의 말씀 : 마태복음 13, 24-30

2000년 동안 자기 땅과 나라 없이 유랑생활하다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한 이스라엘은, 가까운 주변 아랍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과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을 겪으면서 하루도 평안할 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45년만에 1993년 12월 30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장 아라파트와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이스라엘 총리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조인하면서, 그 동안 끊이지 않았던 두 민족 간의 ꡔ뜨거운 전쟁ꡕ을 멈추고 첫 걸음마에 불과했지만 ꡔ차가운 평화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중동평화회담은 계속되었고 평화의 행진이 가속화되었는데 1995년 11월 4일, 수도 텔아비브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한 평화단체(Peace Now)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하여 ꡔ평화의 노래ꡕ를 부르고 내려오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극우파 이스라엘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에 의해 암살되면서, 안타깝게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을 향한 행진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라빈 총리가 그렇게 죽자 어렵게 형성되었던 평화의 무드가 산산 조각나고 이스라엘에서는 對 팔레스타인 강경파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평화와 공존 대신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상호 평화와 공존을 이끌어 오던 라빈 수상의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라빈 총리를 암살했던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왜, 무슨 이유로 평화주의자인 라빈 총리를 죽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라빈 총리를 죽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닌 그의 잘못된 유대주의(Judaism)적인 신앙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라빈 총리를 암살하였던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는데, 그는 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라빈을 암살했다ꡕ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일까요?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라빈 총리를 암살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빈을 암살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라빈을 암살한 한 가지가 이유가 있다면, 이삭의 후예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예인 아랍이 함께 共存할 수 없다는 이분법적인 유대주의(Judaism)의 그릇된 신앙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유대주의의 이원론(二分法)적인 신앙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인도의 국부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국가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대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대죄가 ꡔ원칙 없는 정치ꡕ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원칙 없는 정치의 원인이 무엇일가요? 그 대부분의 이유는 ꡔ눈먼 돈ꡕ과 ꡔ끝없는 권력욕심ꡕ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회가 앓고 있는 병리현상도 그 예외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사회 현실을 보면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 한 가지는, 우리 사회 속에 깊이 뿌리 내린 二分法的이고 二元論的인 가치관입니다. 얼마 전 한 주간 동안 선교지를 방문하는 동안 국내 뉴스를 전혀 듣지 못하다가 귀국하던 날 베트남에서 늦은 밤 시간에 비행기를 타기 전에 탄핵정국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야 3당의 공조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그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마음이 아팠고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방식 외에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탄식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습니다.

귀국해서, 며 칠 지나면서 더 실망한 것은 野 3당의 주도로 의결된 탄핵안보다, 탄핵정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을 보면서였습니다. 탄핵의결 이후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그 실망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여당인 열린 우리당의 지지도가 탄핵이 발의된 9일(화) 26.7%이던 것이, 탄핵이 의결된 12일(금)에는 32.4%, 17일(수)에는 46.8%로 수직상승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정국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각각 3%가량 지지도가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열린 우리당은 표정 관리하는 데 신경 쓰는가 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애써 태연해하면서 ‘열린 우리당’의 일시적인 지지거품이 곧 빠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반된 여야의 표정과 입장을 보면서 발전적인 민주주의를 꿈꿀 수 있는 국회상을 기대해대 좋을지 …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국민들의 가치판단 기준들이 어떤 사건 하나를 보면서 너무 쉽게 요동친다는 점입니다. 야당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잘못이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여당이 무조건 잘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신중함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에 너무 쉽게 좌우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고 위험스럽게 보아야 할 것은 이 역사의 현실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극단적인 가치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나 善이 되고,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자신과 같지 않는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태도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적인 가치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종교인)들 중에 자신의 신앙 기준에 따라서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탄핵의결 사건 하나 때문에, 갑작스럽게 열린 우리당이 그렇게 높은 지지를 받아야만 하는가? 만일, 열린 우리당이 야 3당과 유사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때는 하루아침에 열린 우리당 대신 野 3당을 적극 지지해야만 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고민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탄핵사건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정말 그럴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野 3당보다 與黨인 열린 우리당을 상대적으로 더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이분적인 대립논리를 버리는 일입니다. 이분법적인,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논리보다는 탄핵정국이라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면(裏面)에 감추어진 우리나라 정치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와 문제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직시할 줄 아는 지혜와 신중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같은 대립구도 속에서 어느 한 편이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한대해도 반대세력과의 화해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현실과 삶의 현실 속에서,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나아가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現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복음적인 삶의 方式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남보다 스스로 믿음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때깔이 좋아야 한다’는 의식意識입니다(거룩의식, 순수의식, 성결의식).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교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뭐가 이래?”라는 정죄하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ꡔ교회도 그럴 수 있지ꡕ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티나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미끈하고 때깔 좋은 위대한 한 사람의 위인偉人, 초인超人,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고 찾습니다.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국회의원을 뽑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목회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해서 의인 열 사람을 찾으셨던 하나님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니면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단 한 사람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城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탄식하시던 하나님의 그 애절한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와 생각이나 삶이 같지 않는 사람을 우리의 밭에서 제거해버리고 뽑아버리겠다는 의도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비유말씀은, 목회하는 목사인 저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목사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이고,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제 마음은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저는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만 하는 목사라는 것을 알기에 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간절한 소망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눅 19, 1-10)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를 부러워했던 이유는, 그는 예수님을 정말로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根據를 예수를 만난 직후에, 자기 평생 모았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한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정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배드리는 2천명이 넘는 교우들 중에 과연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가는 분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예수를 따라 다니던 수많은 무리들 중에, 삭개오처럼 예수를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복음을 듣는 자라면 내 삶이 변화되는 변화라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고통이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라 스침이고 마주침에 불과합니다. 만남의 증거는, 고통이 수반된 변화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변화로 주어지는 성숙함과 행복함이 있습니다. 변화된 복음적인 삶 곧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로 알려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를 복음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 많은 분들은 우리 중에 누가 곡식인가? 누가 가라지인가? 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구별의식(區別意識)을 가지고 자신과 남을 판단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본문에 나오는 종들처럼, 곡식 가운데 덧뿌려진 가라지를 빨리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가라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마지막 秋收 때에 審判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그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비유를 가르치셔야만 했던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 비유를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사회는 철저하게 정결과 부정, 성과 속이라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가치구조를 가진 사회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분리주의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는데(분리된 사람들이란 뜻, 참 나쁜 이름입니다, 고약한 이름입니다) 祭儀的인 淨潔과 宗敎的인 分離를 삶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稅吏와 罪人들은 곡식인 자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가라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 중풍환자, 혈루환자,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앓는 자들 역시 자신들과 함께 共存할 수 없는 가라지들이었고, 그들을 뽑아내버려야만 자신들의 聖潔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분리된 집단생활을 하면서 흰옷을 입고 수도생활을 하던 에세네파 사람들도 자신들만 곡식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이미 더렵혀졌다고 생각되는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城)을 떠나서 광야에서 그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집단생활을 했습니다. 또 젤롯당(열심당)이라고 불리는 자들 역시 철저한 분리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과 같지 않는 사람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신분의 사람들은 다 뽑아버려야만 하는 가라지 같은 대상들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善과 惡, 淨潔과 不淨, 곡식과 가라지라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종교사회적인 유대교의 신앙과 가치관이 팽배한 그 시대를 향하여,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선포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곡식과 가리지의 비유를 선포하신 목적은 그들의 그와 같은 이분법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종교관 가치관을 긍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즉,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곡식들만 모여서 자라는 밭과 같지 않다는 겁니다. 현존하는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곡식과 가라지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이루며 같이 뒤섞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존 속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ꡔ기다림의 나라ꡕ라는 겁니다. 당장 심판하고, 정죄하고, 분리하고, 뽑아내버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요, 특징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종들의 생각의 다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는 급한 마음으로 밭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밭에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秋收 때까지 가만 두어라 하십니다. 가라지의 뿌리와 곡식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이 비유의 진짜 의도 곧 복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와 정죄와 심판으로 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라지와 같은 존재에 대해서도 끝까지 공존하면서 기다림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겁니다. 기다림의 복음은 인내와 용서와 이해와 공존과 화해의 복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毒性이 강한 제초제(除草劑)를 뿌린 논밭에 잡초가 전혀 자라지 못하는 농약으로 중독 된 논밭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는 농사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논밭과도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벌레도 많고, 식물이 그리 크지도 않고, 볼품도 없고, 때깔도 곱지 않습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밥 먹을 때, 먹는 고추 하나도 매끈하고, 굵고, 때깔이 좋은 고추는 우리 몸에 그리 좋지 못한 것입니다. 구부러지고, 매끈하지 못하고, 때깔이 좋지 못한 고추가 농약이 덜 묻은 고추입니다.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뿌리는 제초제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땅 속에 계속 축적됩니다. 또 우리가 먹는 먹거리에도 잔류하게 됩니다. 생태계의 심각한 변화도 가져옵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전혀 다른 특정해충을 증가시키는 심각한 부작용도 초래합니다.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논밭과도 같습니다. 거기에는 가라지도 있고, 벌레도 있고, 때깔이 곱지 못한 먹거리들이 함께 자라는 곳입니다. 유기농업은 제초제나 화학비료 사용하는 농사보다 비록 생산성은 좀 떨어지지만, 안전하고 맛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파괴되지 않는 생명력과 회복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였던 존 칼빈이 범한 역사적인 오점은, 수많은 가라지를 뽑아내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자기와 다른 신앙체계와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복음보다는 자신의 신학적인 주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개혁자라는 생사여탈의 대권을 가지고 유아세례 반대와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키는 일로부터 칼빈의 이름으로 무려 58명이나 죽이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칼빈의 이 과오는 분명히 비복음적인 행위였습니다. 오늘 역사가들은 칼빈의 그와 같은 행위를 그의 일생의 과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예수님의 복음보다 자기 신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이분법적인 가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500여년 전에는 선이라고 생각되었던 사건이 500여년 후에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과오로 재인식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선이 반드시 내일의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텃밭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기 위해서 가라지를 뽑기 위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기다림의 복음으로 세리와 죄인까지도 품고, 그들에게도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복음적인 삶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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