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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 (느 6: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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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루신 역사
느헤미야 6:15-19

의미 있고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부딪히는 반대와 장애에 우리는 쉽게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예로 들면 기도생활 좀 더 열심히 하고,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마음과 생각을 뒤 흔들어 다짐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 하도록 하는 반대에 부딪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가 만약 내 실수나 연약함에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허물을 인정하고 훈련하여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의 반대에 부딪힐 때는 먼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어둠의 세력, 사단의 세력이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를 봅시다. 느헤미야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완공과 더불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마땅한 모습을 목표로 시작했던 성 쌓는 일이 이제는 거의 완성되어 문짝만 달면 되는 시점에서 산발랏과 도비야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이들의 반대와 유혹에 부딪혀 포기했다면 하나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넘어지지 않고 극복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방법과 그러한 방해를 대비한 느헤미야의 자세를 보면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지혜를 얻기 원합니다.

첫째, 산발랏과 도비야는 ‘음모’라는 방법으로 느헤미야의 성 쌓는 일을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까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이 거의 완공되어 갈 무렵 산발랏과 게셈이 편지를 보내와 화친하자며 오노 평지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이제 당신은 문짝만 달면 되니 느헤미야 당신이 한 일을 인정해 주겠소. 그러니 화친하고 오노 평지로 내려오시면 어떻겠소.’ 이런 편지에 대해 웬만한 사람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친하자는 말을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산발랏과 도비야는 여태껏 비난과 조롱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음모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음모란 진짜 의도는 감추고 허울 좋은 내용으로 미혹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고정관념 속에 타협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타협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대통령과 국회가 타협을 하지 못하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노사간에도 타협을 잘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우리 민족은 정적이라 그런지 타협을 잘 못합니다. ‘좀 따져보자’는 말을 참 싫어합니다.

타협에는 원칙이 있는데 첫째, 타협하기 전에 목적이 같은지 분별해야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타협하자고 손 내밀었을 때 느헤미야는 목적이 같은지 살폈습니다. ‘저들이 나를 해하고자 함이라’(2절) 자신을 산발랏과 도비야의 영역으로 불러내어 해친 다음 성의 중건을 막고자 하는 의도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성을 쌓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느헤미야는 성을 쌓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바답게 살게 하려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 사이의 목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목적이 다를 때 하는 타협은 아주 본질적인 문제들을 조금씩 상하게 합니다.

사단의 타협, 그 교활함을 성경 속에서도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 하나님의 명령이라.’ 바로는 들은 채도 않습니다. 그러다 파리 재앙 후, 출애굽기 8:28절에서는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 하나님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는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예수를 믿되 그렇게 광신적으로 믿지 말라.’, ‘새벽기도, 심야기도 같은 것은 왜 하냐. 정서상 위안이 될 정도로만 하라.’, 즉 신앙생활에 너무 몰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생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교회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목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는 또 메뚜기 재앙 후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다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남자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고 오라고 말합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너희만 예수 믿으라. 너희 자녀들도 다 생각이 있고 삶이 있는데 그 애들에게 신앙 강요하지 마라. 너희 가족들까지 끌고 들어가지 마라.’라는 그럴듯한 타협안입니다. 사실 가족들 모두와 신앙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특히 자녀에게 신앙을 권유하고 가르치는 것은 때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영혼이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영혼과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 자명한데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을 전할 수 없다면 진정한 가족도 진정한 사랑도 아닌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에게 신앙의 확신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0:24, 흑암재앙 이후 ‘다 나가도 좋은데 우양은 놔두고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가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물질과 시간까지 희생하지는 말아라.’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분명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함께 자아관과 인생관, 가치관과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약속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주 교회 와서 기도하고 봉사 잘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 물질과 시간 사용은 하나님 말씀에 따르기보다 세상 흐름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지는 몰라도 역사를 변혁시킬 사명자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돈지갑의 회심 없이 진정한 변화는 없다고 했습니다. 수영, 운전과 같은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을 지라도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훈련하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두 가지를 견고히 했기 때문에 사단의 타협안 앞에서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자기 삶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는 것’이라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타협이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주신 목적을 가지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이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비전을 확인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전이 없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과 경험, 자존심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교묘한 술책으로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교회 정책이나 교회 구성원들이 진행하는 일의 목적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중에도 내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지 아니면 내 자존심과 입장 때문에 서 있는 것인지 항상 분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비전은 무엇인가? 교회를 통해 내 뜻을 한 번 펼쳐 보리라.’와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한 번 살아보리라.’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정한 비전인지 먼저 알고,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운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단이 주었던 타협안을 분명히 분별하시는 성도되시길 바랍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 아셔야 합니다. 내가 꿈꾸는 대로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하신다면 교회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속에 주신 의미와 뜻을 찾아 살겠다고 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간교한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째, 산발랏과 도비야는 ‘중상모략’이라는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했습니다(5~9절). 6~7절에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당신이 성을 쌓는 이유는 왕을 반역하기 위함이라고 하더군요. 유다 사람의 왕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진행 중이라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와 함께 대화해 봅시다.’라는 제안을 담아 편지합니다. 그런데 봉하지 않아서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고, 읽은 사람들을 통해 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교묘한 중상모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느헤미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왕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자리를 비우게 되고 중단된 성 역사와 더불어 기회만 엿보던 산발랏과 도비야는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나 위치에 위협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참 싫습니다. 많은 경우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가면서 할 필요가 있나, 여기서 안하면 그만이지.’하면서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마귀의 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중상모략과 비방을 받으면 너무나 억울해서 사람들을 만나 직접 해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만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계략에 말려들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면 성을 건축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물음에 ‘당신들이 지어낸 것이지 내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중상모략은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약간 삐딱하게 이야기를 흘립니다. 사람들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해질수록 이야기에 살이 붙어 처음보다 커지고 나중에는 기정사실화 되어버립니다. 소문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다 처음에 얘기를 시작했던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면 ‘그런 이야기한 적 없다.’ 발뺌 할 수 있게 됩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교묘한지요.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의 작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에 말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닌 것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밝히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사람의 문제는 사람이 풀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중상모략 하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고, 특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 전략을 쓰면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에 더 이상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시간 끌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맡기신 일을 더욱 열심히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수행하였는가.’ 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모함을 ‘소문’이라고 규정하고, 소문은 누가 유포했는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주로 과장되고 부정확하며 누군가를 헐뜯기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라 정치, 사회 곳곳에 중상모략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르간 블레이크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눌러 이길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한다. 나는 어떠한 건장한 사람의 건강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어떠한 담대한 사람의 인생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날개를 타고 바다를 여행한다.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며 정의로운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세계에 가지고 있다. 나는 바닷가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은 오해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결코 막 나가지 않는다. 나는 결코 용서 하지도 않는다. 내 이름은 중상모략이다.’

우리는 이러한 범죄에 참 많이 시달려 왔으면서도 범죄의 도구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세워놓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원칙은 ‘이것이 사실인가?’, 둘째 원칙은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셋째 원칙은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퍼졌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 형제에게도 유익한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 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씀합니다. 잠언 6:16~19절,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 6~7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혀와 관계된 것이 3가지나 됩니다.

우리 교회도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있다 보니 여러 이야기가 난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듣는 말마다 쫓아다니며 변명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이상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가끔은 울분도 터집니다. 저도 이런 일을 당하면 일단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하나님 앞에 문제를 들고 나갑니다. ‘하나님 만약 제게 잘못이 있으면 저를 징계하시고 제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일인데 사단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라면 소문을 낸 장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일상생활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하시거든 삶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손해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을 더욱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며 주께 나아가는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 산발랏과 도비야는 ‘협박’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했습니다. 종교적인 옷을 입은 협박이었습니다(10~14절). 산발랏과 도비야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느헤미야여, 당신이 오늘 밤 공격당할지도 모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자객을 보내 오늘 밤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니 성전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성전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와 함께 같이 기도하십시다.’

이 유혹은 얼마나 그럴 듯 해 보입니까! 선지자가 성전에 모여 기도하자고 하는데 느헤미야가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산발랏과 도비야는 자객을 보내 느헤미야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미워했고, 선지자와 성전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뇌물을 받고 일을 꾸몄음을 알아내었습니다. 분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느헤미야가 하나님 말씀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51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 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 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찌며” 와 민수기 3:10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리고 민수기 18:7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일찌니라”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말씀을 몰라서 성전에 들어가 피했다면 느헤미야는 합법적으로 율법적으로 죽임 당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요.

여러분은 저 조차도 다 믿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거짓되면 믿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분별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늘 마음에 두십시오. 경험이나 상식 혹은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교회를 좀 오래 다니면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입장에서 잘못된 해석과 견해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간교하게 구는지 모릅니다. 목사로서 목사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장로, 안수집사, 구역장, 교사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직분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거기에 내 마음을 내어준다면 곧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우리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하며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이 온 시기는 성이 완성될 즈음이었습니다. 시험은 무언가 완성할 시기에 쉽게 찾아옵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서 있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습니다. 잘 한다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합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의 지혜는 삶의 목적과 비전을 정립하고, 중상모략 앞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닌 것은 아니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겼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훈련 받고 배우며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내 인생에 기준이 되게 하십시오. 그럴 때에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오늘 나를 통해 이루길 원하시는 하나님 뜻에 맞게 살아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지혜가 있어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들을 통해 확장되고 승리가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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