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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요나 (사 5:1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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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요나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 1 ~ 7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옳은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서신서의 말씀: 히브리서 11:8 ~ 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 복음서 12:38 ~ 42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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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이 벌써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사순절이 한 주일 한 주일 지나갈수록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자꾸 가까워지고, 십자가 고난의 길이 가까운 만큼 부활의 길도 가까워집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께 요구합니다. “선생님이 선포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적을 좀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보면 믿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기적,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하늘의 증표! 기적이 있으면 믿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기적을 보아야 믿는 민족은 한심한 민족입니다.

기적 없이는 신앙이 불가능합니까? 기적이 없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기적입니까? 예수께서는 앉은뱅이를 고쳐주셨고, 눈먼 소경도 고쳐주셨고, 또 죽은 자도 살려서 무덤에서 꺼내주셨습니다. 이 정도면 엄청난 기적들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또 원합니다. 혹시 기적에 면역된 백성이 아닐까요? 기적의 이벤트에 취한 사람은 이벤트가 없이는 아마 인생의 재미가 없을 겁니다. 기적에 취한 사람은 기적 이외의 다른 것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도 답답해서 “그렇다면 기적을 보여주겠는데,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기적은 모든 사람이 아는 기적입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요나라는 선지자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따르기 싫어서 배에 숨어서 도망을 치다가 발각이 나서 결국 바다에 내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서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거기서 벗어나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니느웨 온 성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서 이야기의 무대는 중동지역입니다. ‘니느웨’라는 도시의 위치가 오늘날 어딘지 아십니까? 이라크 전쟁 때문에 이라크에 있는 몇몇 도시가 우리한테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 중에 하나가 바그다드 북쪽에 있는 비교적 안정된 도시라 할 수 있는 ‘모슬’입니다. 한국군 파병 지역으로 꼽혔다가, 나중에 다른 곳으로 정해졌습니다만, 모슬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북쪽에 있습니다. 그 모슬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강이 하나 흐르는데, 이 강 이름이 여러분이 잘 아는 티그리스 강입니다. 모슬 밑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위에는 티그리스 강이 흐릅니다. 현재 모슬 지역에서 한 300킬로미터 쯤 가면 티그리스 강이 있고, 그 강을 건너서 7킬로미터쯤 가면 강에서 동쪽으로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 니느웨 성이 있던 곳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라크의 모슬에서 보면 티그리스 강 반대편에 있었던 도시가 니느웨입니다.

이 도시는 당시 이라크, 이스라엘, 이집트, 또 사우디아라비아 북쪽 또 요르단 지역 전체를 지배하던 앗시리아, 지금의 시리아 전신입니다만,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가 니느웨 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요나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배도 지긋지긋한데, 그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그 강력하고 안 가진 게 없고, 악랄한 니느웨 주민들한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파멸을 피하라고 전해야 하다니, 하나님의 명령이 야속하기 그지없을 겁니다.

“제가 왜 하필 거길 가야 합니까? 우리 민족도 아닌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데도 이렇게 고생하게 하시면서, 왜 우리를 짓누르는 제국, 권력과 돈과 모든 것을 가진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 거대한 풍요의 도시에 가서 구원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저 같아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갔을지 모릅니다.

요나가 살던 시절에 니느웨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생긴 것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니느웨 인구의 삼분의 일이 이 병에 걸려서 죽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앗시리아 제국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지금 이라크의 전신인 바벨론 제국인데,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또다른 제국이 등장하는데, 그게 성경에서 파샤라고 하는 페르시아 제국, 지금의 이란입니다. 이게 무너지고 나면 등장하는 것이 헬라제국이고, 이 헬라제국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로마제국이 들어섭니다. 앗시리아, 바벨론, 그다음에,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데, 로마제국 때에 예수께서 활동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웃 강대국에 눌려서 생활하던 민족입니다. 이 민족이 선민이라고 자부해본들 사실은 초라한 민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초라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선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선민의 예언자가 이제 적대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외치라니,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뜻은 이스라엘만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적대국의 도성인 니느웨도 구원받고, 요르단도 구원받고,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선민이란 먼저 택한 도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민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을 멸망받을 이방 족속으로 규정했고, 그래서 주변과의 사이에는 적대관계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지니고 있었고 오늘날도 제가 보기에 주변과 적대관계로 살아오는 것 같습니다. 요나 역시 반앗시리아, 반니느웨, 이렇게 ‘반(反)’자를 붙이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제외한 온 세계에 ‘반’자를 붙여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에 다 ‘친(親)’자를 붙여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냉전시대가 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만 생기면 시청 앞에서, 도심 여기저기서 난리가 납니다. 외칩니다. 반미 친북, 아니면 친미 반북! 우리가 현재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난 선민입니까? 경제도 2만 달러 시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이 ‘반’자 ‘친’자 가지고 싸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요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명령과 요나의 도피를 생각하게 됩니다. “니느웨로  가라.” “저는 반니느웨 사상 때문에 못가겠습니다.” “그럼 너를 고래 뱃속에 집어넣겠다.” 결국 요나는 3일 동안 갇혀 있다가 고래 뱃속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니느웨를 구하게 됩니다.

‘반북’ 하면 북한이 죽고 통일이 됩니까? ‘반미’하면 완전한 ‘자주’가 이루어집니까? ‘반중’ 하면 이 나라 삽니까? ‘반러시아’, ‘반일본’ 하면 이 나라가 삽니까? 참된 자주는, 진정한 자주는 중국과 친하고, 러시아하고 친하고, 일본, 미국과도 친하고, 북한도 친한 가운데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면서, 그러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주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적극적 자주”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소극적 반대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나라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편합니까? 행복하십니까? 부부간에 적이 되면 편하십니까? 자식과 부모가 적이 되면 편하십니까? 이 사회에서 정당 간에 집단 간에 반대, 반대, ‘반’ 하면 사회가 잘 돌아갑니까? ‘반’ 하기는 쉬우나 ‘친’ 하기는 어렵습니다. ‘친’하려고 하면 스스로가 회개해야 되고, 회개해서 새사람 되어서 자아가 분명하고, 자신이 있고 자기가 똑바로 서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입니다. 적대국도 도와서 회개시켜서 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반’ 하지 않고 ‘친’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방해하는 사람은 고래 뱃속에 들어가라. 거기서 회개하고 스스로를 세탁하고, 고래가 토해내거든 그때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서신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요나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반’ 이게 없었습니다. ‘친’하나님 그게 바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냥 알지 못하는 길로 가게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포도나무라고 하면, 그 후손들에게서 알알이 맺힌 포도열매가 달리기를 기다렸는데, 포도 대신에 들포도가 열렸으니 어떻게 하랴! 이렇게 보잘것없고 얕고 좁아서야 어찌 선민이라 하겠는가? 포도밭을 갈아엎어야 하겠다. 비도 내리지 않게 해야겠다.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어야 하겠다.” 그래서 새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사람들은 기적을 원합니다.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은 십자가에 죽은 자가 죽음을 삼키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나 일을 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알 수 있지 않습니다. 제발 십자가로 돌아오십시오.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죽은 자가 죽음을 삼키고 새로운 생명의 주인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부활이야말로 기적의 목적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성서의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두 어머니가 아기 하나를 놓고 싸울 때, 그 아기를 둘로 갈라서 나눠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가 안 갖겠으니 상대에게 주라고 간청했습니다. 생모가 아닌 가짜 어머니는 반쪽이라도 갖겠다고 해서 결국 생모가 이겼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의 핵심은 솔로몬이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 헬라가 말하는 지혜의 최고봉입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왜 죽습니까? 죽는 게 무슨 지혜입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혜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아십니까? 부활의 생명이 어디서 움트는 줄 아십니까?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옵니다. 그 진리를 인간들은 바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서 부활의 생명이 용솟음쳐 나옵니다. 이것을 능가할 기적, 이것 이상의 지혜는 없습니다.

부활은 기적의 최고봉입니다. 그 최고의 기적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옵니다. 부활은 지혜의 최고봉입니다. 그 지혜는 십자가 속에서 용솟음쳐 나옵니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이 진리가 사순절에 우리가 묵상하고, 우리 삶에 담아내야 할, 우리가 함께 살아내야 할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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