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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함이 없는 자 (엡 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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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이 없는 자(에베소서 6: 21-24) 

24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변함이 없다고 하는 말은 한결같다 혹은 꾸준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말로 변덕, 변절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변덕이란 것은 무척 피곤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을 만나 사귈 때 변덕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좋다고 할 때에는 자기의 살이라도 다 먹일 것처럼 하다가도 얼마 안가면 완전히 돌아서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럴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봐서 그렇다면 손해를 배상해 주면 되는 것이고 다른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사과하고 고치면 되는데 이런 저런 이유도 없이 싫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덕은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어 보십시오. 그 장난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흔들어 대면서 좋다고 합니다. 죽을 것처럼 좋아하다가도 하루 이틀이 지난 후에 다시 집어 주면 집어 던지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이들의 변덕인데 이처럼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참 피곤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님께 싫증을 느끼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에 변덕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의미로 변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절이란 좀 다른데 반드시 이해 관계가 따릅니다. 그래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면 절대 변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혹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안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 변함이 없는 사람, 꾸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뜻입니다. 여하간 변덕쟁이가 되거나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함이 없는 자』이 말씀으로 자신을 한 번 반성하고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I. 변함없이 협력하는 자(21절)

본문에 보면 변함 없이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변함 없이 협력하는 주인공은 두기고인데 그의 협력은 세 가지였습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여기보면 두기고는 바울 사도를 만난 후로는 바울 사도와 죽음으로 갈라놓기 전에는 일평생 동안 협력을 아주 잘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으로 협력하였습니다(21절 상반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을 받은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항상 받기만 하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랑이란 반드시 서로 주고받을 때에 오래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기고가 사도 바울에게 늘 사랑을 받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온 교우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기고도 사랑을 받은 것만큼 또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오래 지속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 중에도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말하기를 상대방에게 사랑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교회에도 불평을 합니다. 가끔 광성교회는 사랑이 없어서 못나오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이란 받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주려고 찾아보면 그 대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고 또 주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니 그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람일수록 남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 내 결혼식에는 온 교인이 다 와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됩니까?

여러분! 사랑이란 마치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나누어주면 메아리처럼 되돌아옵니다. 작게 소리를 지르면 작게 돌아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 큰 소리로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주지는 않고 오직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두기고는 사랑을 많이 베푼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첫째, 사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과 참견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참견은 해도 관심은 잘 갖지 않습니다. 밤 놔라, 배 놔라 하고 참견하면서 흉을 보고 다닙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게 되면 잘못은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말하기를 사랑은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관심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에 끼여들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들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때는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일이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책임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남의 말을 들어주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 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도둑이라 해도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이웃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면서 좋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면 줄수록 더욱 사랑은 깊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협력할 때에 진정한 협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기고가 바울 사도를 만나 주의 일을 할 때에 끝까지 변함 없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의 협력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의 일에 이렇게 사랑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진실한 협력자이어야 합니다(21절 중반절)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을 바꾸어 말하면 믿음으로 협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에도 진실하다는 뜻은 없고 믿음직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꾼이라는 뜻은 교회에서 쓰는 말로 집사라는 뜻입니다. 즉 믿어도 좋은 집사, 믿을 만한 집사, 정말 믿음으로 협력하는 집사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를 어떤 계급이 올라간 것이나 세도 부리는 직책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집사는 봉사 많이 하고 섬기기 잘하라는 직분입니다. 집사라는 말은 본래 음식점에서 접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기독교에서 사용하면서 집사라고 했습니다. 자기 음식점을 찾아온 사람에게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고 봉사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어 다시 찾아오게 하는 사람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광성교회라는 훌륭한 음식점의 접대원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접대원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집사가 주의 일에 협력할 때 꼭 믿음으로 해야지 어떤 이해 타산을 내세우거나 감정과 기분으로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 모든 일에 협력하는 사람입니다(21절 하반절)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유대 사람에게는 탈무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랍비들의 교훈이 모아진 책입니다. 랍비라는 말은 성경에서 선생이라고 번역하는데 기독교에서는 목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랍비 문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랍비 하나가 문밖에 나가보니 거지 한 사람이 이가 끓어 자기 집 담에 몸을 자꾸 문지르면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가 불쌍하여 자기 집에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혀주고 한 상 잘 차려 배부르게 하고 떠날 때는 노자 돈도 두둑히 주어 보냈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자 얼마 지난 후 또 거지 부부가 똑같이 담에 몸을 문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랍비는 전과는 대조적으로 야단을 쳐서 보냈습니다. 이 거지 부부가 쫓겨가면서 왜 이렇게 전과 달리 화를 내느냐고 물었더니 랍비는 혼자일 때는 긁을 수 없어 담에 문질렀으나 부부일 때는 협력하여 서로 등을 긁어주면 되는데 왜 서로 협력은 하지 않고 자꾸 남의 도움만 받으려 하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도움 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갈 때에 모든 일에 협력하고 서로 서로 협력할 때 변함 없는 협력이 됩니다. 이 일에는 협력하지만 저 일에는 협력 못하겠다, 혹은 내 이름 나는 일에는 협력하지만 이름 안 나는 일에는 협력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협력이 아닙니다. 주의 일이면 무엇이든지 협력하는 것, 이것이 진정 모든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랑으로 협력하고 믿음으로 협력하고 모든 일에 협력하는 자로서 변함 없이 협력하는 자가되어야 하겠습니다.


II. 변함없이 바로 사는 자(22절)


우리는 인생을 잘 살기에 앞서 바로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부자는 많이 있으나 이 부자도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이 가난하든 부자든 바로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첫째, 구별하는 삶(22절 상반절)

본문에 보면 바로 사는 사람으로 바울을 말합니다. 이 바울 사도를 22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바로 사는 삶이 무엇이냐 하면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란 두기고가 알게 한다는 말인데 바울 사도가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여 세워 놓고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에베소서를 보내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고린도서를 보내고 갈라디아 교인에게는 갈라디아서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교회마다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공적인 일만 쓰지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일을 말하고 싶을 때에는 그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두기고가 편지를 가지고 가서 내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리라. 즉 편지에다 사적인 일은 전혀 얘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공과 사를 구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별하지 못하면 교회 30년 다녔다 해도 그것은 제대로 믿은 믿음이 아닙니다. 가령 국가 공무원을 예로 들어보면 공무원이 공적인 자리에 앉아서 나라를 위한 일과 자기를 위한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공무원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공무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교인들도 이것이 교회를 위한 일인지 나만을 위한 일인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일에 내 이해타산을 개입시켜서는 안됩니다. 공과 사를 구별 못하고 교회생활 30년 했다고 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바로 믿어야 하고 바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삶이 바르게 사는 삶이요 바르게 믿는 신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위로해 주는 바른 삶(22절 중반절)

본문에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혼자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다 보면 피곤하게 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행동하나 하나가 만나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여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처럼 항상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생활이 바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해 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헬라말로 '카타클레오' 인데 여기서 '카타'란 곁으로 혹은 아주 가까이란 뜻이고 '클레오'란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일 외톨이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아 상처를 받고 혼자 울고 있을 때 곁으로 가까이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대화를 통해 마음의 용기와 위로를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할 때 쓰는 말과 똑같은 뜻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항상 가까이 부르시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영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항상 위로를 주시는 영이라면 그 성령에 의해 예수 믿는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 위로를 주는 것이 바른 믿음, 바른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삶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해 주는 자가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일꾼을 키우는 삶(22절 하반절)

본문에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고하였는데 저라는 말은 두기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소아시아 사람으로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에 전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과 함께 믿음 생활하며 바울에게서 학습과 세례를 받았습니다. 믿음이 점점 자라서 집사가 되고 바울과 함께 주의 일을 하며 진실한 일꾼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큰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맡아서 할 만큼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내가 저를 보냈노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두기고가 큰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누가 크려고 하면 그를 비난하고 헐뜯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라는 사랑을 계속 잘라 버리는 것이 바른 삶입니까? 키워주는 것이 바른 삶입니까? 바울의 예를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사람을 만나서는 이렇게 큰 일꾼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함 없이 바로 살아야 하는데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삶, 남에게 위로를 주는 삶, 다른 사람을 키워 주는 삶으로 우리도 일평생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고 바로 사는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III.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23-24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를 변함 없이 사랑할 때 오는 세 가지 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평안의 복(23절 상반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 평안의 복입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내가 진급을 못하다가 한 자리 한 자리 올라갈 때 그 자리가 주는 평안이 있고 그것을 한동안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자리를 빼앗겨 버리고 말 때에는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다시 빼앗아가 버리고 말기 때문에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주는 평안,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평안을 사도 바울은 늘 누리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중에 갇혀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매맞으면서도 찬송 할 수 있었으며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하늘이 주는 평안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도 바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 가운데서 3년 동안이나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삼층천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천국의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보고 바로 여기가 나중에 영원히 살게 될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몸이 다시 깨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돌아와 보니 세상의 돈, 명예 이런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분명히 보고 와서 세상을 보니 너무 비참하여 빨리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감옥에 가도 좋고 매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주는 평안입니다. 주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미래가 약속된 평안의 복이 있는 줄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의 복(23절 하반절)

본문에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겸하여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모든 믿음을 겸한 사랑, 즉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믿어주는 사랑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동네 사람들이 아내에 대한 별별 흉을 다 보아도 남편이 아내에게 '나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믿음을 겸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주님이 나를 믿어 준다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하만민이 뭐라고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믿어주는 사랑의 복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은혜의 복(24절)

본문에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카리스'라는 말로서, 즐겁게 해주는 쇼(show)라는 뜻입니다. 쇼를 보면 즐겁듯이 은혜를 받으면 즐겁다는 뜻입니다. 즉 은혜를 받으면 지워지지 않고 두고 두고 생각나며 즐겁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큰복입니다. 두고 두고 나를 즐겁게 하며 지워지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은혜를 신령한 복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므로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 은혜, 이 은혜가 여러분의 복이 되길 바랍니다.

결론으로 우리는 변함 없는 자가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변함 없이 주의 일에 협력하는 자, 변함 없이 인생을 바로 살아가는 자,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변함 없는 자가 될 때 평안과 믿어주는 사랑과 은혜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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