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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義)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암 2:6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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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아모스 2장 6 - 16절       
제 목 : 의(義)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변의 여섯 나라와 또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인 유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마치고 똑같은 방법으로 아모스 예언의 주 대상자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을 합니다.

주변의 여섯나라에 대한 예언은 주로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대하여 예언하였는데,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나라 안의 모습, 공동체 안의 모습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먼저 <6-8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의 실상을 밝혀주고 <9-1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케 하고 <13-16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심판을 자초한 죄악이 무엇입니까? <6-8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돈으로 매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은,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경제적 타락의 단면입니다.

<7절>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공동번역에 의하면,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으로서 약자를 압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착하고 마음이 좋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자를 압제하고 착하고 좋은 마음의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 정치가 부패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부자(父子)가 한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며" 여기서 부자는 돈많은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성적타락, 사회의 도덕적 문란의 정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성적 타락, 음행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맨 처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이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무엇이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합니까? 인간의 음행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8절>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백화점에서 훔친 밍크코트를 버젓이 입고서 예배당에 와서 자랑하는 것이나 노름에서 딴 돈으로 술 사 가지고 와서 예배당에서 마시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는 종교의 타락, 종교의 부패를 말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영역에서 부패한 모습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죄악의 구렁텅이에 있음을 깨우치고 지적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나라가 다 기울어져서 파산 직전인 때가 아닙니다. 도리어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제일 안정적인 때였고 사회적 여유가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찾는, 자알 살고 있는 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별 문제가 없는 때였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같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 돈이 우상이 되어 심각한 빈부격차가 있고, 정치적 안정 뒤로 부당한 압제가 있고 문화의 융성 속으로 음란이 물들어 있고 종교의 양적 성장 뒤에 질적 타락, 세속화가 있는 모습이 있는 한, 진정으로 잘 돌아가는 때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서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부르짖는 모든 예언적 멧세지는 정의가 무엇인가를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저희가 아모스서를 통해서 정의를 배우고 우리 마음과 삶에 세워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의 문맥에 따르면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입니까? 이스라엘의 죄악의 반대의 모습입니다. 즉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약자를 존중하는 것, 성적인 순결 그리고 신앙의 순수성이 정의입니다.

이러면 혹시 생각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여러분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사도 야고보가 참된 종교, 참된 신앙, 참된 경건을 이야기하며 지적한 것입니다.

<약1:27>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은 가난한 자를 외면치 않는 것, 연약하고 소외된 자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도덕적 순결과 영적 순수(純粹)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저희 교회가 신앙의 곧은 길, 맑은 물근원을 기도하고 추구하는 것은 바른 영적 공동체, 주님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우고자 함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소외된 자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또 윤리적 순결과 순수신앙을 맑게 흐르게 함으로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가계부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있습니까? 연약한 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더 따뜻함으로 존중하십니까? 당신은 성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여 불결한 것을 멀리하십니까? 또 당신의 신앙은 순수합니까? 혹시 신앙을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지요?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평면적 죄악만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명백히 드러난 죄악을 깨우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타락한 근본적 원인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9절에서부터 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 말 개역한글판에는 9절이 그냥 시작하지만, 성경원어 히브리어 성경에는 9절 앞에 접속사가 하나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yet라는 접속사로서 표준새번역 성경에 "그런데도"라고 번역하였습니다. 

<9절> "그런데도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오셨는가를 행해 오셨는가를 상기시킵니다.

의미상으로는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가를 기억하여 보아라 아모리 사람도 멸하였고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인도하였고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키지 않았느냐 과연 이것이 사실 아니냐..그런데도 너희는 이런 죄악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은혜들을 베풀었건만 그런데도 이스라엘아 왜 은혜를 져버렸느냐?"고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9절>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앞에서 멸하였으며" 이 아모리 사람은 키가 백향목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다고 하지요. 아무도 싸움을 해서 이 아모리 사람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 아모리 사람을 다 물리치셨지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셔서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준 것입니다. 오늘 누리는 평안과 풍요의 근거가 무엇인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제 아무리 용을 써서 지혜를 내고, 기를 써서 힘을 낸들 당해낼 재간이 없는 아모리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안히 거할 거처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을 베풀어주셔서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둘째는 <10절>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애굽은 이스라엘이 종, 노예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것, 이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이한 능력과 권세로서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도록 얼마나 놀랍고 큰 능력을 행하셨습니까? 믿기 어려운 일들을 행하셨지요?

그리고 광야생활, 아무런 대책도 보장도 없는 광야의 생활이지만 하나님께서 만나로써 먹이시고 메추라기로써 배불리시고 바위틈에서 물을 나게 하시고 옷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인도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국가에서 있어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게 한 시작입니다.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의 왕, 조선시대의 왕들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는 다 기억하지요? 처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의 공적은 높이 평가하며 기립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서의 출발이 가능하게 한 출애굽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종교 규례와 사회생활의 율례를 세워준 광야 생활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들의 존재 근거였는데, 그 은혜를 너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연약한 자를 압제하고 도덕적, 영적 간음을 일삼는 이유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장꒩잔은 그 한 순간의 곤경에서 구출해준 신부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삽니다. 그 한번의 경험이 그의 평생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책을 대하며 많은 사람들은 "나도 그 신부가 장꒩잔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한번 경험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나에게는 그런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의 연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주목할 주인공은 신부가 아니라 "장발쟌"입니다.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은혜에 응답하며 살았는지 장발쟌의 모습에 더 주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일생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여러 차례, 그 은혜를 바라보도록, 장발쟌에게 은촛대와 같은, 삶의 경험을 베풀어 주십니다.

신부처럼 나에게 은혜를 경험케 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들이 불의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의 은혜를 평생 기억한 장발쟌과 달리,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은혜를 잊어 버리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깐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경험케 하신 감동적인 순간, 감동적인 만남, 감동적인 사람...

우리 아이들이 "엄마 내 돈 꾼 것 갚아!" 하며 가끔 성화를 냅니다. 우리 집에만 있는 일이 아니지요? 아이들의 세뱃돈, 부모가 보관해줄게 하고 영구히 보관하는 일.. 어느 가정에나 종종 있는 일입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만할 때,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쓸고 아버지 구두를 닦고 해서 하루에 10원씩 계산해서 한 달에 300원의 용돈이 책정되었습니다. 사실 용돈이 책정이 되었지 꼬박꼬박 받은 것같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필요할 때마다 달라는대로 다 주셨지요.

그런데 제가 어느날, 어머니 옛날 제 용돈 내 놓으십시오. 한 달에 300원이니까 일년이면 3,600원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6년 했으니까, 21,600원, 물가 상승률 고려하면 한 50만원 줘야 되겠네요 한다면, 여러분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니 부모를 두 번 죽이는 거다, 편견을 버려!." "으이그, 너는 언제 철 들래?" 그러지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따금 부모에게 반항기를 거칩니다. "우리 부모는 영 아니야, 자기들 맘대로 하기만 하구, 인격이 틀렸어, 틀렸어.." 하곤 합니다.

자기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이 반항적인 태도가 언제 없어지겠습니까? 언제 철이 듭니까?

어느 아이가 엄마에게 청구서를 요구했습니다. 엄마 제가 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비용이어요 하며 종이를 보여 줍니다.

설거지 도와준 것 일 주일에 두 번, 5,000원
슈퍼에 물건사러 심부름간 퀵서비스 하루에 한번 일주일에 7,000원
엄마, 아빠 안마해 드린 맛사지비용 일주일에 한번 2,000원
방 청소 도와준 것 하루에 한번 일주일에 7,000원
도합 21,000원

그러자 지혜로운 어머니가 답신을 보냈습니다. 봉투에 21,000원과 함께 편지를 한 장 넣었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밥값 21끼 X 3,000원 =    63,000원
  일주일 동안의 숙박비  7일 X 10,000원 = 70,000원
  일주일 동안 입은 옷값                100,000원
                간식비                  20,000원


  도합 253,000원, 이건 네가 엄마에게 주어야 한다.

자녀가 언제 철이 듭니까? 부모의 은혜를 깨달을 때입니다. 나에게 상처도 많이 주고 내 하고 싶은대로 못하게 가로 막기도 많이 하고 내 사정 잘 모르시면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어디가서 기죽고 살지 않도록, 그래도 넘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라고 가슴앓이하며 뜬 눈으로 밤을 보낸 날들이 허다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고한 날들이 허다하며 희생을 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식의 부모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마음으로 깨달았을 때, 그의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원숭이보다 조금 나은 포유류 동물이 언제 사람이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 이것이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되는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용을 쓰는 재주를 해도 죄의 노예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았습니까? 제 아무리 발버둥을 해도 죄인의 굴레를, 사망의 운명을 벗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로 우리가 자유케 되었고 생명을 얻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넉넉한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영원한 인도자가 되어 주심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은혜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동물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다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 진리를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이십부터도, 사십부터도 아닙니다. 인생은 십자가에서부터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아니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살아봅시다. 저희가 주님의 부활하신 요일, 주일마다 주의 만참에 참여하여 예배를 드림은, 첫 사랑의 애틋한 추억보다 더 소중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리며 품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배를 드릴 때에 비로소 성숙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구원의 은혜, 죄악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게 살도록 가르쳐 주시고 새로운 삶을 세워주시고 당신의 기이한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심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도록, 의롭게 살기를 바라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며 연약한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며 도덕적, 영적 순결을 지키며 살라는, 사랑하며 거룩하며 살라시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이 은혜를 망각하고 나아가 이 은혜를 짓밟고 죄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12절>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 고의적으로 짓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심판합니까?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흙을 눌러서 움푹 패임같이 누른다고 하지요? 꼼짝도 못하게 누르심으로 심판하십니다.

원래 선지자 아모스라는 이름의 문자적 뜻이 '누르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그시 누르시니 꼼짝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힘을 쓰고 재주를 부려도 그 곤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이 고달프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답답하고 무겁고 고통스럽고 어떻게 힘을 써 볼 수도 없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짓누르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짓누르십니까? 멸망하라고 누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누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짓밟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드리라고 당신의 삶을 때로 지그시 짓누르실 때도 있습니다.

아모스, 심판의 예언의 선포 가운데도 이 예언의 말씀을 받아들여 회개하는 자, 남은 자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 더 풍성한 은혜의 소망을 약속하듯이,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뜻에 합당한 삶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확실한 능력의 도움을, 넉넉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오늘 우리에게 의롭게 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까? 가난한 자를 배려하며 사는 것, 연약한 자를 존중하며 사는 것,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영적으로 순수하게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처럼 의롭게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좌우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느냐 망각하느냐가 좌우합니다.

예) 백인 친구와 함께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던 한 인디언이 어디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습니다. 백인 친구는,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 친구는 담을 덮고 있는 담쟁이 앞에서 귀뚜라미를 찾아냈습니다.

"인디언이 백인보다 확실히 청력이 뛰어나군!"

백인 친구가 감탄을 했습니다. 그 말에 인디언 친구가 동전 하나를 길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자동차 소리를 비롯하여 온갖 소음 속에서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당신의 귀에는 무엇이 들리십니까? 당신의 마음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많이 배어 있습니까?

할 일 많은 이 시대, 이 풍진 세상에 가치있게 살도록 생의 기회를 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이지 않습니까?

나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세워가도록 영적 가족들, 교회로 인도하심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이지 않습니까?

내가 겪은 삶의 부정적 경험, 내가 가진 핸디캡마저도 그 아픔으로써 나를 연단하여/ 나로 그것을 극복하여 눈이 부시도록, 감동이 되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심이 또한 소중한 은혜이지 않습니까?

내 인생이 다하기 전에, 성령께서 내 마음과 삶에 간섭하시고 감동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구원해 주심이 얼마나 보배로운 은혜입니까?
나의 가족들, 지나간 과거의 과정들, 나의 친구들,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들,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이 모습 이대로 이 자리에 서게 하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나를 내 욕망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을 통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서 훈계하시고 연단하심이 어찌 거부하고 불평할 사안이겠습니까? 고개숙여 감사드려야할 은혜이지요?

무엇보다도,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나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 그보다 더한 은혜가 있습니까?

정의는 은혜의 기초위에 세워집니다. 정의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아니, 정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고이 품으며 살아봅시다. 장발잔이 저녁이면 은촛대에 촛불 켜놓고 은혜를 기억하듯이, 아침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주께서 부활하신 아름다운 아침, 주일아침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와 은혜를 품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고 연약한 자들을 존중히 여기며 그리고 도덕적 거룩과 영적 순수를 지켜갑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어 순결하게, 거룩하며 사랑의 삶을 우리 함께 드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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