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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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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본문: 마 11:28-30

오늘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더욱 편안하고, 여유 많은 삶을 살 줄 알았는데, 현상은 꺼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욱 사람과 사람 사이는 각박해지고, 더욱 바빠지고, 더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만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따라 더 많은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걱정 없이 밝게 뛰어 놀아야 할 어린이들까지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매고 이리 저리로 바쁘게 옮겨 다니면서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짐입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이 무거운 짐은 단순히 무겁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과 육체를 지치게 만들고, 또한 병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병의 원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고통 속에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암이 되고, 고통 속에서 헤매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무거운 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헬스에 가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등산한다고 다니기도 하고, 오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무거운 짐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짐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게도 한번 벗었다고 영원히 벗는 것이 아닙니다.  벗었다고 생각하면, 언제 다시 무거운 짐이 내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이 없어졌다고 하고, 돌아서면 다시 근심 걱정이 붙어 옵니다.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못해서 스트레스 쌓이다가, 결혼을 합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지만, 다른 근심 걱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런 근심 걱정, 스트레스에서 해방 될 수 없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과도한 무거운 짐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뿌리는 대단히 깊은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의 뿌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죄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보기에 멀쩡해도 죄로 말미암아 이미 병든 사람이라 합니다.  즉 죄병에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 죄의 병이 모든 고통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겉에 나타난 증상을 치료해도 뿌리가 그대로 있으면 다시 재발합니다.  우리의 근심 걱정, 스트레스등은 사실 죄병의 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이 죄병을 치료해 줘야 합니다.  죄 병에서 해방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방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은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우리의 참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보시고, 그 고통에서, 그 질고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치료자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인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어디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 오셨습니까? 우리의 고통 원인이 되는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으로 인도하시고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병자들을 그렇게 많이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그렇게 많이 회복 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다시 외치십니다. 그 외침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침에 응답해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예수님이 외치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외침은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누구를 부르는 소리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우리 중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과 걱정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듣깁니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외침을 듣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어째서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부름을 외면합니까?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물질이 있는 부자들도 물질에 취해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고통을 알고,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회복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귀에는 주님의 부름이 들립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그 지방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거기에도 예외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귀가 열리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는 귀가 넓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지방으로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원하러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이 여인만이 그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합니다. 

우리 중에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가는 사람은 주님이 준비한 것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습니까? 성경 말씀에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쉼을 준비했습니다.  고통에서 쉬고, 무거운 짐을 벗고 쉬고, 근심 걱정에서 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 말씀 듣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기 위해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쉰다는 것은 보기에 쉬운 것 같지만, 사실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쉬도록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을 이해할 때, 우리는 더욱 감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멍에를 지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무거운 짐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피곤하고 지치고, 결국 병을 얻게 되고,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무거운 짐을 우리 대신에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근심 걱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그 무거운 근심 걱정을 대신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안됩니다.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하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내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 하면서 자기 짐을 지고 갑니다.  피곤하고 지쳐도, 병을 얻어 죽어가도 자기 짐을 지고 갑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영웅이라고 해야 합니까?  바보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내 짐을 대신 지겠다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내 짐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져야 할 멍에는 내가져야 합니다. 그 멍에를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지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이 세상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주님과 함께 지니까 무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그냥 따라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의 어깨는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짐을 질 때에 우리는 그저 짐을 지고 가는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2] 우리 대신에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질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모든 짐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십니까?  역시 우리 대신에 죽음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어디서 죽었습니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750년 전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에 찔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는 상함을 입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믿기 힘듭니다만,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우리대신 죽으신 예수님!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서 해방됩니다.  성경에 있는 것처럼 죽음을 향하여, “사망아, 너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죽음을 향해 이렇게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앞에 서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예수님의 행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 희생, 겸손, 거룩함을 배워야 합니다.  어디서 배웁니까?  주님 안에서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에 학교에 앉혀 놓고 훈련시키지 않았습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몸으로 보여 주시면서 훈련시켰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여 줌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 그 희생 –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과 희생을 배울 때에 비로소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 주님의 쉼을 맛 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 당하고 죽으신 고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이제 그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기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하신 일을 받아 들임으로 해방되고, 쉼을 얻고,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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