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 (삿 7:1-8)

  • 잡초 잡초
  • 447
  • 0

첨부 1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 (삿 7:1-8)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학교에 다니는 내 자녀가 당장 지금은 다른 곳에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왜 공부만 해야 하는지 내가 하고픈 일은 왜 못하게 하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서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이 들어야 한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는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공부에 달려들 수 있습니다.

누가 공부를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공부 못한다. 공부할 수 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자기가 공부하지 않으면서 '못 한다'고 하는 건 모순입니다. '나는 공부 못한다'하지 말고 '나는 공부 안 한다', '나는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지금도 공부 안하고 있다'고 해야 옳은 표현입니다. 결국 공부는 내가 하는 것 하면 되는 것인데 아직 뭘 몰라서 지금 시작을 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시작만 하면 공부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약하다"는 겸손 아닌 겸손의 말을 우리가 얼마나 흔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마치 믿음 없는 것, 믿음 약한 것이 주변의 환경이나 남의 탓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믿음 갖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왜 믿음 생활이 성장하질 못할까요? '공부 못 한다'고 하던 학생이 “안 되겠다. 이건 나를 위해서 내가 매달려야 될 일이로구나” 하고 깨달아 공부를 하므로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듯이 '나는 믿음이 형편없다'고 스스로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성도가 비로소 은혜를 알고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하여 스스로 열심 내고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찾기 시작할 때 신앙의 성장은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안하고 있는 게 문제일 뿐" 못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키기 전에 어느 날 "내가 이렇게만 살아서 안 되겠다. 나도 뭔가 시작해야 하겠다"하고 바짝 달려들 때 비로소 삶이 달라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에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깨달음이 절실한데 그 깨달음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 깨달음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기도를 시키십니다. 기도를 시키신 다음에는 오늘날 내 현실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실패의 원인, 무기력함의 원인, 미성숙의 원인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깨달음을 즉각 주시질 않고 왜 기도를 시키실까요?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그 동안 못보고 지나치고, 모르고 지나치던 사실 즉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을 하고 그 날 너무 괴로운 나머지 미친 사람처럼 밤새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강을 건너는 큰 다리 위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저 만치 늙으신 자기 아버지가 조용히 바라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뭐라 위로할 길이 없자 계속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아버지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나의 모든 부족을 다 메우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사기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편없이 약할 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미디안 거민, 아말렉 사람들에게 당하고만 살고 있었습니다. 이길 힘이 없으니까 농사지으면 다 빼앗기고 양과 나귀등 동물들도 다 앉은자리에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6절"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깊은 좌절감만 쌓여가고 있었고 스스로 무능함을 탄식하는 중에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 뿐"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 "중대한 깨달음을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토록 당하고 살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알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이야"(삿6:10)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살아온 역사는 하나님을 잊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때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보고자 곁길로 나갈 때 하나님은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몰라서 당하고만 살아오다가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젠 살길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시작되는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속에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기드온과 삼백용사"라는 유명한 사건의 주인공인 바로 그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기드온은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눈치껏 살던 사람, 겁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자 사자를 보내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시니 그의 입에서 당장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쳐왔습니까? 이렇게 당하고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삿6:13) 우리도 수시로 하나님 앞에 투덜거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곧 네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너는 왜 네가 가진 능력조차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 그 다음엔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곧 네 속에서 "큰 용사"다운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왜 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삿6:14)이 말은 '너의 힘은 곧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힘이다. 그 힘을 의지하고 일어나면 지금 무엇이 두렵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이 말씀을 아직도 못 알아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자체와는 별도로 하나님이 큰 군사를 보내 주시는지 큰돈을 주시는지 뭔가 구체적인 방책을 보여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전히 자신 없고 못 알아듣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삿6:16)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네가 미디안을 물리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기드온은 그래도 확실하지 않으면 덤벼들지 않는 자기 성격을 그대도 보여줍니다. "증표"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기드온이 해 달라는 대로 해주시면서 함께 하심의 증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 기드온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일, 죽기를 각오하고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즉 미디안의 우상 바알과 아세라의 단을 다 부숴 버린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때로 "도전하는 일"입니다. 엄두도 못 내던 일, 넘보지도 못하던 일에 도전하되 돌다리 두드리듯 이리저리 맞춰본 후에 승산이 있으면 하고 승산 없으면 포기해 버리고 비열하게 살아가는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 의지하여 도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질 않았는가. 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네게는 내가 함께 한다는 것이 최고의 무기가 될 것이다" 기드온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바알의 단을 훼파(삿6:28)한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늘 힘센 불량배에게 매 맞고 돈 빼앗기고 당하기만 하던 아이가 그 불량배 집에 주먹만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깬 것과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깨달음, 즉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다가 "아! 하나님 말씀 안 듣다 이렇게 되었구나" 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젠 하나님 말씀만 듣고 다른 말은 듣지 말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성장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도전 정신" 기드온은 현실 타협 그리고 비참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만 찾던 자리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도전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단을 다 부숴 버리고 나니 기드온에게 별명이 하나 붙었는데 "여룹바알"입니다. "감히 바알의 단을 부쉈으니 바알과 싸울 자"라는 뜻이었습니다.(삿6:32)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으니 당연히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들이 다 모여 이스라엘을 삼킬 듯 달려들었습니다. 자! 이제 일은 저질러 놓았고 미디안 사람들은 '잠자던 사자'를 건드린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니 그 말만 믿고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젠 하나님 쪽에서 뭔가를 보여주실 차례입니다. 함께 하마 하시는 하나님은 이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 어김없이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삿6:34)

이 하나님의 방법을 정리해 봅니다. 말씀에서 떠나 교만한 이스라엘을 무기력하게 하시고 미디안 사람들에게 꼼짝 못하고 비참하게 당하고만 살게 하시던 하나님. 그건 분명히 하나님이 버리신 게 아니라 '너희가 나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순종"이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 그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므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른 때 같으면 못했을 일을 하게 하시면서 '순종'을 실천케 하셨고 순종한 결과 찾아온 예상되었던 "환란"앞에서 하나님의 신으로 기드온을 사로잡으셔서 "많은 사람들(뜻밖에 많은 연합군 병력 - 32,000명)을 붙여 주십니다"(삿6:34-35) 이제는 한번 해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이제껏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치만 보고 살던 이스라엘에 3만 2천의 병력이 모여든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충분한 사실"을 또 잊을 뻔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삿7:2)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한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야 이길 수 있겠다 싶을 때에 "너무 많다"니 사실 그 동안 이스라엘이 기가 죽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든 면에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숫자도 부족하고 힘도 부족하고 그래서 용기도 없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해볼 만하게 되었나 싶었는데 하나님은 또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해 오셨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면 하나님만으로도 모든 면에 충분히 차고 넘친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수많은 지원병은 중요하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오늘날까지 이 3만2천의 사람이 없어서 졌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얘기하질 않았느냐? 이미 너희에겐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너희가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뿐이었다" 지금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없어서 못한 게 아니다, 못 믿어서 못한 거다",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믿고 실천에 옮겨본 일이 없어서 그런 거다".

결국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면 3만 2천명 전부 없어도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는 일은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무 많다"하신 일이 믿음 없는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너무 많다'고 하신 이유를 명쾌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싸움을 또 다시 숫자 싸움으로 몰아가면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은 계속해서 강조하시기를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숫자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으로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철저히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어차피 너희를 이기게 할텐데 3만 2천 병력으로 맞싸워 이기고 나면 너희가 나를 생각지 않고 너희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게 아니냐. 3만 2천명은 너무 많다. 그중 전쟁에 나가기가 두려운 이들은 돌아가도록 해라"(삿7:3)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중 2만 2천명이 돌아갔습니다. 계산해 보십시오. 이젠 몇 명 남았나요? 1만 명만 남았습니다. 기드온 생각에 "3만 2천 정도면 해볼 만 했는데 만 명 가지곤 어림도 없겠어"할 때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많다"(4절)

하나님은 철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할 말이 없게끔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완전 힘 빼기"단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이었는가 하면 1만 명 중 3백 명만 있으면 되겠다 할 때까지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백 명만도 충분하신 데 이스라엘은 3만 명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3만 2천 병력만 의지할 일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3백명도 절대 부족한 숫자가 아닌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여도 이미 모든 면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사람은 결국 숫자의 힘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까지 우리의 인생은 "숫자싸움"으로만 이어져 왔습니다.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고 잔뜩 주눅이 들어서 살았고 가진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고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살아왔고 뭐든 크고 많아야 힘을 쓴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도 기드온도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꼼짝 못하고 당하고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왜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제 알았느냐" 그렇습니다. 숫자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능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너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고 아직도 멀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너는 이미 다 갖추고 있구나" "공부 못하는 게 아니라 공부 한하는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1만 명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추려 가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쓸 만한 사람은 그중 300명이었습니다. 9700명과 300명은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아는가요? 그렇습니다. 물가로 내려가 물을 먹게 하는데 9700명은 각기 무릎을 꿇고(삿7:5-6) 입을 대고 물을 마셨습니다. 어떤 자세였는가, 어떤 방법으로 먹었는가 하는 것 보다 본문이 강조하는 부분은 무릎을 꿇은 자 9700명 대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떠먹은 자 300명의 차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숫자에 신경 쓰느라고 임마누엘 하나님을 놓치게 되면 그래서 '돈 모아두기, 내 실력 쌓기, 내 사람 만들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너무 많다'(다 소용없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걸러내야 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 사는 그 길, 그 길은 이미 세상을 향해 "무릎 꿇은 길"입니다.

세상을 향해 무릎 꿇은 사람들은 '임마누엘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결코 맛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기드온의 3백 용사를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세상을 향해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이 시대의 용사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크고 귀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성도는 죽어서 기도의 흔적을 남겨야만 합니다. 이름 남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기도는 죽어서도 역사하고 기도의 응답은, 기도의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대리석으로 지은 교회도 아니고 세련된 신자도 아니며 더 많은 헌금도, 더 많은 지식도, 프로그램도, 더 넓은 예배당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비밀병기를 주셨는데 그 것은 광야 40년을 승리와 환희로 이끌었던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지팡이만 있다면, 오히려 다른 것들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막막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돈을 주시지도 아니했고, 탱크를 몰고 가라 하지 않으셨고, 오직 투박한 지팡이 하나 붙잡으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애굽과도 같고 소돔과 고모라와도 방불한 세상에서 꼭 붙잡아야할 것은, 기도의 지팡이입니다. 기도의 지팡이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링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공급받는 신령한 파이프입니다. 기도의 링크가 끊어지고, 기도의 파이프가 녹이 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공급받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할 것은 지금 우리의 싸움은 숫자 싸움이 아닙니다.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숫자'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없다. 부족하다. 안 된다. 못한다."하는 소리만 나오게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뭐가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분만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깨달았으면 그 믿음을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