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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 약 2: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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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본문: 약2:1- 9

세종대왕 때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항상 허술한 옷차림의 촌부의 모습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성묘차 온양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어느 여관에 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영남에서 올라오는 호화로운 선비의 행차가 있었으므로 맹정승은 방을 얻지 못하고 낭하 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바둑을 좋아하는 선비의 요청으로 대청 마루에 올라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서로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초면이므로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맹 촌부가 먼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말할 때 묻는 말에 마지막에 공을 붙이고 대답 끝에는 당을 붙이기로 하자"고 하였더니 선비는 "서울로 간당"하고 대답했습니다. 관심이 생긴 맹 정승은 다시 묻기를 "무슨 벼슬이공?"하였더니 선비는 "녹사취재 벼슬이당"했습니다. 그래서 맹 정승은 "내가 힘써 줄공" 하였더니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네 같은 촌부는 택도 없는 소리당"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환담을 하다가 선비는 서울로 올라와 과연 녹사취재 벼슬을 얻게 되어 3정승 6판서가 모인 정청으로 신고차 방문을 했습니다. 6조 판서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선비를 본 맹정승은 "어찌된 일인공?"하고 말을 건냈습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선비가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금관조복의 좌의정이 바로 그 촌부였습니다. 전날, 촌부인 줄로만 알고 무례하게 대했던 선비는 정신이 산란해져서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당"하고 맥없이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선비는 맹 정승의 지도로 청백한 관리가 되었다는 사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 토마스 로렌스의 일대기입니다. 그는 영국의 탐험가요 고고학자요, 군인이었는데, 이미 아는 대로 로렌스는 육군 장교로서의 복무를 그만두고 영국 공군에서 항공기 정비병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 가서 그들 부부와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서 돌체스터 시장의 부인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시장 부인은 모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장 부인은 하디 부인에게 "나는 일생동안 졸병과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신 적이 없다"고 프랑스어로 말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 공군 정비병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로렌스는 예의 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담, 죄송합니다만, 하디 부인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통역을 해드릴까요?" 이 말을 듣고 시장 부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비록 외모와 실제가 다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외모뿐 아니라 소문이 다른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한 인격으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잘못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가 큰곰을 만나 위기에 처한 두 사냥꾼이 총까지 내팽개치고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났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무에 기어올라갔고 다른 사람은 근처 동굴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 속으로 도망갔던 사냥꾼이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밖에 있던 곰을 보자 다시 동굴로 급히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가 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나무 위에 피신해 있던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아니, 자네 죽으려고 작정했나! 동굴 속에 가만히 숨어있지 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야?” 그러자 그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네. 동굴 속에 또 한 마리의 곰이 있거든!”우리는 상대방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상대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매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는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에도시대(1598-1867)에 이타쿠라 시게무네란 명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바른 양심에 서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사람으로부터 "선생님이 그렇게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람의 외모나 얼굴을 보지 않고 판결합니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잘못하면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인다고 다 선인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게무네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만 봐도 판결을 할 수 있다는데 전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이며 독선입니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속 사람일 것입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1:17)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신16:19)
셋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로 라는 의미는 본질적이 아닌 피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공정한 판단, 즉 공의의 판단과는 달리 추상적인 관찰 혹은 편견이나 불의의 뇌물 등을 받고서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출23:8) 이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넷째는 외모는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와 궤휼의 역군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고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고후11:13- 15) 사이비 종교들도 불우이웃 돕기 등에 나서 그들 종교가 마치 선한 길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 선전합니다. 그러므로 외형만 보고 쫓으면 거짓에게 속아 잘못된 길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고후10:7- 11)
다섯째는 외모로 취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하였습니다.
성전의 외적인 화려함에 감탄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곧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의 실체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21:5-6)
여섯째는 외모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흑인 한 사람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흑인은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다음 성경과 찬송을 소중히 들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받아 줄 리가 없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고 흑인인 것에 뼈져린 아픔을 느끼면서 그 교회의 바깥뜰 계단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흰옷을 입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반가와서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님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 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형제여! 나도 이 교회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네."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이 계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종교적 의식과 경건의 모양이 있다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복음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일곱째, 겉과 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성이 없고 거짓된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많고 지식이 많아도 귀하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실 무망하신 분이며 사탄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그 마음이 진실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강도나 창녀도 받아 주시고 구원해 주셨지만 바리세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에 일곱 번씩이나 “화 있을찐저 외식(위선)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하고 저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일 가증한 것이 거짓된 자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입니다.
사무엘상 12장 2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백마 탄 자로 나오는데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성령 하나님도 “진리의 영”이라고 했고 악령은 “거짓의 영”이라고 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겉보다 속이 더 아름답고 첫인상보다 후 인상이 더 좋고 시작보다 끝이 더 좋은 법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여덟째는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과부의 엽전 한 잎을 부자의 두 랩돈보다 더 크게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과부의 엽전 한 잎은 생활비 전부를 낸 것이고 부자의 두 렙돈은 생활비 일부를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점심도 굶고, 차비도 아끼려고 수 십리 길을 걸어서 그 돈으로 헌금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돈은 우리가 보기에는 작은 액수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자의 수 백만 원의 헌금보다도 더 크게 보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5)
사울이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이스라엘 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를 택해 기름 부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그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하시고 다른 아들들도 다 물리치고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또 뽕나무 위에 기어올라간 난쟁이 세리장 삭개오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로 하셨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습니다.(갈2:6, 엡6:9)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대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외모라고 하는 것은 비단 용모뿐만이 아니라, 돈 있는 것, 똑똑한 것, 능력 있게 보이는 것, 사회적 지위 등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이러한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곧 진실한 믿음과 충성됨 그리고 정직성을 보시고 귀히 쓰는 일꾼으로 삼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곧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과 철학과 삶과 윤리를 가르치던 랍비였습니다. 외모로 보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니고데모야, 너는 거듭나야 한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외모적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니고데모를 향해서 예수님은 신앙의 가장 초보가 되는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장인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보면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배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흠이 많은 여인이었습니까? 이미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합법적인 남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남자와 그냥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볼 때 얼마나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나누셨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를 나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는 거듭나라고 말씀하시고, 학식을 갖춘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신학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갖추고 또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 그 자체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친히 외모를 취하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고, 또 사람을 대할 때도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아홉째, 오해하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는 나무를 하다 칡넝쿨을 치우려고 붙잡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잠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깜짝 놀란 나무꾼은 엉겁결에 나무 위로 피신했습니다.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았고 나무에서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가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호랑이가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질주했고 나무꾼은 사력을 다해 힘껏 껴안았습니다. 마침 한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아도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겠는가”라고 팔자타령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나무꾼이 농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 노인이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재산도 모두 정리해보니 500억 원쯤이 되었습니다. 노인은 이 돈을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고 싶어 유명 대학을 찾아가 총장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차림 때문인지 하루종일 기다려도 면회가 안됐습니다. 실망한 그는 이후 아주 초라한 대학을 찾아갔습니다. 면회를 신청하니 금방 만나 주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학교 발전을 위해 써달라고 기증했습니다. 그 기금이 밑거름이 되어 그 학교는 오늘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끝까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불신하고 끝내는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예수께 진정 귀한 보화와 새 생명의 권세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무조건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알아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속임이 있고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열 번째,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선택과 우선순위를 잘못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 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조라 하겠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학벌과 재력, 집안 배경은 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 상대를 고를 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좋으면 하겠다고 하다가도 막상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경우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거나 더 까다로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원하고 그 위에 믿음까지 좋은 짝을 구하니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조건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뜻에 우선 순위를 두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열한 번째는 외모만으로는 사람의 마음과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여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의 수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생겨서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에라, 공부나 해야겠다 하고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정치가가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고, 눈도 작은 데다가 키도 작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뱅도 빼빼 마른 몸에, 눈이 나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으며,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몸과 얼굴이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도 좋지 않은 보잘것없는 외모를 지닌 분이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과거에 낙방한 후 인생의 다른 길을 찾다가 부친으로부터 "네가 큰 일을 하려면 사람 보는 법부터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관상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외모를 살펴본 후 크게 실망했습니다. 생긴 대로 운명이 결정된다면 자신의 앞날은 꽉 막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구가 외모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공부, 민족지도자가 된 것은 다음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얼굴 모양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하이램(Hiram)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양육하는 것이 귀찮아서 어린 나이에 강제로 장기 사관학교에 보내버렸습니다.153㎝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그곳에서 늘 키가 작다고 난쟁이로 놀림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곳을 졸업한 그는 신체적 왜소함 때문에 장교로도 임관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육체적 결함을 비관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북전쟁이 터져 장교가 더 필요하게 되자 그는 북군 장교로 싸우게 됐습니다. 비록 상관이나 부하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성실한 삶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어 미국 최초의 육군대장이 됐으며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에도 당선됐습니다. 그가 바로 율리시스 그란트 대통령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약속합니다. 자신의 외모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남의 외모를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기도: 중심을 보시는 주여,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나의 내면을 가꾸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je333.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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