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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고 기다리라 / 시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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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고 기다리라

성경: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존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습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 건..."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습니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존은 할머니를 믿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후 며칠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 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와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림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기대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기다리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학수고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하면 인간의 희망을 하나님에게 건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당장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지말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앞에 참고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손을 놓고 기다리는 정적(靜的)인 인내, 고요한 기다림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기다림은 ‘동적(動的) 인내, 움직이는 인내, 활동적인 인내’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가장 신실한 성도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고난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야고보도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농부들은 인내심이 많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감사와 겸손과 인내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교회 일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원망하는 일입니다. 잘 참고 인내하는 중에 불평하고, 시비를 가리려고 하면 악한 사탄이 틈을 타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성령이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시간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요, 원망을 멀리하면 심판을 면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에서 원망하고 성도간에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편을 만들어 하나됨을 해치는 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해 문 밖에 서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환난이 찾아왔습니까?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성숙한 신앙으로 연단을 받으며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1:3)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까지 인내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30:18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를 기다리신다고 했고 또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1에도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조급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기다림은 재미나는 놀이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처절한 전투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잘 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잘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무자함의 25년.. 자녀에 대한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을까요? 사라는 아들을 주실 때까지 참으며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켜 보려다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큰 불화와 후세에 전쟁의 불씨를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전쟁인 것입니다.
야곱, 실망과 시행착오의 21년.. 성숙과 축복에 대한 사무침으로 얼마나 험악한 세월이었을까요?
요셉, 상처와 억울함으로 얼룩진 13년.. 회복과 그리움으로 얼마나 심장이 터지는 통증의 나날들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계시의 꿈을 꾼 다음에 형제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도 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망하지 않고 14년이나 참고 기다리다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세, 모세의 40살의 기도는 80세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혈기가 죽기까지 4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외로운 광야에서의 40년.. 사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 굴욕의 세월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기도응답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7년간이나 사울왕의 창칼을 피하여 이 굴, 저 굴, 이 바위, 저 바위를 숨어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의 날이 올 때까지 잘 기다렸기 때문에 대 성군 다윗 왕이 된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큰그릇이 될 수 없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시몬과 안나는 예수님을 ‘믿음과 희망 중’기다렸습니다.(눅2:25- 39) 두 사람이 바라본 당시 시대 모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몬은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금식하며 탄식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먼저 시몬과 안나의 나이를 보십시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100살 혹은 적어도 90살은 넘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나이가 들면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포기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일을 하기 두려워합니다. 희망보다는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안나는 남편과 단 7년을 함께 살고 무려 84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살았습니다. 요즘 과부와는 다르게 당시 과부에게는 대외적이고 정치적인 지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환경으로만 보면 오로지 절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간 희망의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불행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터널 끝에 비추이는 빛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울 때,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될 때 혼자가 아니며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리고 희망은 현실의 슬픔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시편 37:7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했습니다. 복 받을 일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축복이 안 나타나고 응답이 오지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참으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도리어 "슬픔과 고난의 보자기에 축복을 싸다 준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역대 하나님의 귀한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다 겪었습니다.
고통이나 시련이 올 때 불평이나 낙심대신 "주여 감사합니다. 이 시험이 지난 뒤에는 무슨 축복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시련의 크기만큼, 고통의 크기만큼 그 다음에 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며 기다릴 때 기적적인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한 부인이 대 오페라 공연 극장의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에게 말하기를 지나간 밤 공연에 갔다가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수색 작업 끝에 그 목걸이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전화기로 갔을 때 그 여인은 이미 전화를 끊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는 그 여인이 전화를 다시 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라고 말하겠지만 실은 우리가 그와 같은 태도로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 고하고 나서 “수화기를 붙들고 기다리지”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응답 받을 때의 기쁨을 놓치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과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종종 늦추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던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는 자는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늘 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참고 기다리며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응답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낙심치 않고 계속 부르짖어 응답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애원할 때도 물러설 줄 모르고 계속 매어 달리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응답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때가 되면 내 뜻과 내 생각대로는 안 되어도 다른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은 꼭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는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실상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그 약속을 들은 사람이 500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120명 외에는 중간에 다 낙심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못 받은 줄 압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은행에 저금한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찾는 때가 옵니다. 씨앗을 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것은 즉시 이루어 주시고 어떤 기도는 몇 년 후에 이루어 주시고 어떤 경우는 수 십 년 후에 이루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2:3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자.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참고 기다리십시오
어느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천천히 집을 지고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더듬거리며 한 시간 불과 몇 센티미터를 움직이며 놓은 나무위로 기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틈새에 있던 벌레가 말했습니다.
<이 느림보야! 너는 쓸 데 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쓸 데 없이 힘을 쏟고 있다. 저 나무에 올라가야 소용이 없어. 사과가 열리지 않았어>
그러나 달팽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면서 혼자 말했습니다.
<저 꼭대기까지 기어 오르느라면 사과가 열릴 거야>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득이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큰 축복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3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십일조를 해도, 봉사생활을 해도 이랬다저랬다 하지말고 움직이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조급하고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참고 계속하십시오. 그럴 때에 정오의 햇빛같이 빛나는 때가 오며 축복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뿌림으로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함으로 출산을 기다리고 낚시꾼들은 미끼를 던짐으로 고기를 기다리고 목자는 피를 토함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이며 지구력과의 싸움입니다.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립니다. 하루 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쌀 씻어 불지펴 놓고 뜸들기를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홀연히 임재 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병 낫기를 기다리며, 문제해결을 기다리며, 믿음의 성숙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기다림을 방해하는 사단의 충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려야 함을 알고도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기다림이라는 용광로에 던져 타오르게 하신 후에 결국은 녹아지게 하십니다. 마지막에는 기다릴 힘도, 기다릴 이유도 제거하신 채로 말입니다. 그냥 눈떴음으로 아침을 열고, 살아있음으로 살아내는 하루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우리는 기다림으로만 겸손하고 정화될 수 있었다. 설렁탕에 사용할 진국을 우려내기 위하여 8시간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거품과 세속적인 기름기는 기다림으로만 제거되고 진국되어 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에 대한 반대는 조급함입니다. 조급함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조바심은 사단이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코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조바심에 집착하거나 중독되면, 영적센서가 작동을 중지하거나 오작동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쓴 뿌리와 불행의 이유 중의 많은 부분들이 서두름과 조바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고난이 어쩌면 조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르침에 대한 심판(?)일 수 있습니다. 그때, 좀더 기다렸으면.. 그때, 며칠만 더 기다렸다면..
그 때, 몇 달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던 일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을 우리는 우매하여 지나고 나서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기다릴 수 있음이 영력입니다. 기다려지는 자체가 이미 절반은 승리한 영성입니다. 기다림의 뿌리는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끝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전도의 열매도, 교회의 부흥도, 사람의 변화도, 문제의 해결도, 믿음의 성장도, 조바심을 몰아내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내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자녀를 기다렸듯이 하나님 또한 25년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 성장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구의 기다림이 더 중할까요?
우리도 기다림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듯, 하나님도 우리를 향하여 동일하십니다. 그래도 기다릴 수 있는 무엇이 있어서 좋습니다. 기다려야 할 일을 주심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기다릴 것도, 기다릴 사람도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몸이 아프지만 건강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가난하지만 부요함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되지만, 부흥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한 영광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지만, 믿음 성장에 대한 기다림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 아닐까요? 가시 노릇하는 사람 곁에 있어도 성자 될 날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아닐까요? 병든 자식 속썩이는 남편 곁에 있어도 그저 살아있음으로 다행이 아닌가요? 기다림에 불평 않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밤중이 되면 돌아올 가족을 기다려서 비록 고추장에 밥비벼 먹을 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은 밥상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아프고 힘들지만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치유를 기다린다는 것. 오랜 시간동안 찾아오는 교인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구름 같은 성도들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주체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이 아닐까요? 나의 가난함, 병듦, 부족, 실패, 연약함조차 부러워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 기다림으로 불평함은 오히려 사치가 아니겠습니까? 기다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기다릴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하루를 주심에 감사합시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에 감동합시다. 지독히 힘들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지극히 행복할 천국을 기다릴 수 있음에 즐거워합시다. 응답도, 축복도, 부요함도, 풍성함도 못 깨달으면 불평이지만, 수십 년의 기다림으로도 깨달으면 감사입니다. 성경은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시37:7) 하십니다. 기왕 기다릴 것이면 입다물고 기다려야 합니다. 투덜거림으로 기다림은 안 기다림만도 못합니다. 선조들의 기다림의 날들을 세어보면 수년 동안의 기다림은 오히려 부끄러운 자랑일 뿐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하나님을 묵상하며 악을 선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하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다림은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그 날이 천년이라 할찌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나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기다림에 실패한 흔적으로 충만합니다. 그래도 기다리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기다릴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단의 충동하고 조종하는 조바심과 '중단하고 포기하라'는 압력에 동의하지도 굴복하지도 마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오신다'는 말씀에 동의하세요. 마침내 기다림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던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우리가 침울해 있거나 죄의 속성인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서는 안되며 그가 완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우리의 간구를 그의 모든 지혜 안에서 응답해 주실 것을 기쁘게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가 아니라 고난의 종교요, 사명의 종교입니다. 잘 되는 날에도 참고 인내하고 잘 안 되는 날에도 믿고 기다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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