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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지적 은혜 (창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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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 12:1 - 10
제 목 : 의지적 은혜

교계의 원로이시며 대신학자이시며 대구교회의 상징적 목회자이신 제일교회 이상근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셨는데 이상근 목사님이 16살 때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구 달성공원 느티나무 아래에서 40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병은 낫지를 않고 더 짙어만 갔습니다.
3년 동안 출입을 못하니까 학교에 갈 나이에 학교도 못가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가 한방약을 붙인 것이 덧 나가지고 그만 대학 진학도 못하고 검정고시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깥출입을 못 하니까 집안에서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때 방안에서 3 년 동안 열심히 성경만 읽은 것이 후에 성서 대학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 후 60년 동안 발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존경하는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발뒤꿈치에서 1.5cm의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온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가 철사에 찔린 것이 속에 들어가서 그의 평생 가시가 된 것입니다.
이 분이 발 수술을 받은 후 철사를 들고 "이 철사가 나의 가시가 되어 60년 동안 나를 찔렀으나
이 철사가 나를 성서학자가 되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얼른 들을 때 모순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를 흔히 역설적 진리(Paradox) 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진리를 가리켜 역설이야 속임수야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빌2: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놓는 자란 말처럼 바로 세상 사람들이 그건 역설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역설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밝혀 놓는 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큰 계시를 받았습니다. 감히 아무나 볼 수 없는 환상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말 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남다른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한 고백을 들어보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끊임없이 큰 고통을 주며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 가시가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영적인 배경을 보면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 사도의 자격이 있느냐?
당신이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 는 비난에 대해 바울은 자기도 얼마든지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육체를 자랑하면 자기도 얼마든지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인냐 정신없는 말을 하는도다 나는 더욱 그러하다」

24절 이하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헐벗었노라」

28절「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합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내가 큰 소리 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 그러나 혹 내 말 한마디 때문에 교회의 부흥에 지장될까바 참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자랑한다면

11:30절 말씀에 내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합니다.
왜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할까요?
그것은 11:32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큰 역설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약해지고 어리석어 질 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바울이 약하게 보이는 것은 신앙의 경력이나 공로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라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한번 부득불 자랑한다고 합니다.
왜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며 그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익한 것을 왜 자랑한다고 합니까?
여기에 무익하다는 것은 마치 소 귀에 경 읽기 라는 속담 같이 말해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찬499장 후렴 가사 가운데 보면 [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 같이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득불 자랑한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너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꼭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주의 환상과 계시 즉 신비한 체험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같은 뜻의 말을 합니다.
벧후1:15절 이하에 베드로의 노년에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 [ 내가 떠난 후에라도 꼭 너희들이 기억해야할 들려줄 말이 있는데, 마17: 변화산에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이다 ] 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1) 신비체험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개인적인 신비 체험은 자칫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랑이 되고 또한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바울은 3인칭을 써서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 받고 은사 받을수록 더 겸손해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환상과 계시는 바울의 신비한 체험을 말합니다.
바울이 체험한 것은
1) 셋쩨 하늘에 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이 셋째 하늘에 대해서는 4절에 낙원이라고 했는데
헬라어에서는 <파라데이소스>라 합니다. 즉 <파라다이스>를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유대묵시문학에 <파라다이스>는 축복받은 자들이 거하는 곳으로 성경은 천국과 동일한 장소를 말합니다. 즉 천국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천국체험이 필요합니다.
왜? 계2:7절에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말은 우리가 천국체험을 하게되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파라다이스의 은혜는 바로 성도의 생명력과 직결됩니다.
그러니 파라다이스 맛을 많이 본 자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주로 성도가 언제 천국의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느냐?
세상에 소망이 없고 사방이 캄캄하게 막혀지면 하늘 문 열리고 천국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2) 바울의 신비체험은

2절 ( )안에 말씀을 보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했고

4절「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바로 살아가려면 이런 신비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신비한 은혜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합니까?
신비한 체험없이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미련을 잘 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별 수 없어요.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놓습니다.
하늘의 신비한 은혜만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204장 3절 [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신비한 은혜를 많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한 욕망이 포기되어질 줄 믿습니다.

지금 바울이 자신이 신비체험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신비체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외적인 업적과 황홀한 체험을 가지고 바울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지금 부득불 나도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고 신령한 면에 있어서도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랑들은 교회 유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한다 해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나의 말이 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쯤하고 그만 두는 것은 나의 말에 혹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바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울은 꼭 필요해서 지금 신비체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거지 자신이 이런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 새우기 위하여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 바울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영적인 진리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사실은 바울이 자랑하려고 하는 것
신비체험 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체험 한 것을 자랑하려고 했으면 앞에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할 때와 같이 첫째 하늘에 들어가니 뭐가 있고 둘째 하늘에 올라가니 뭐가 있더라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금면류관을 씌워 주더라 이렇게 할건데
단지 14년 전에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는데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하고 맙니다.
물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신비한 체험보다 우리가 꼭 체험해야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시가 주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7절에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바울에게 가시는 지난 주 설교 말씀에 인용한 용어같이 자신이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인생항해에 배의 <벨러스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많은 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질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이는 심한 편두통, 또 어떤 사람은 못생긴 외모라고 말합니다. 캐톨릭에서는 독신으로 살아가는 바울에게 찾아오는 육체적인 욕구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유대인들의 핍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육체의 가시를 안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정오의 햇빛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받아 눈이 멀어
앞을 전혀 보지 못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너무나 감격해서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줄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눈을 빼어 줄려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안질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얼마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지 『사단의 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단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이 바로 그런 거였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든지간에 바울에게 있어서 가시는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란 「스콜뤼ㅍ스」라 해서 「쐐기」입니다.
헬라어로 '말뚝'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등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로 자신을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이었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내일 가족 여러분!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능력 있는 삶을 살며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위해 살고자 했던 사도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도 고난의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비스러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도 은혜 충만한 사람에게도 고난의 가시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시에 대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 기억나시죠?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사람을 원망하지만 선한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바람이 불어오지만 오물은 악취를 내지만 꽃은 향기를 날립니다.」
그렇습니다. 똑 같은 가시를 가지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며 그러다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에게는 신앙의 자세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8절에
[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 ] 합니다.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의 가시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시가 육체적인 질병도 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인 문제, 아니면 가족 간의 갈등, 아니면 남다른 콤플렉스 등, 등 그러나 그 가시가 내게 다 유익 된 것은 아닙니다.
그 가시가 내게 고통만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나를 망가뜨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나를 넘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을 절망 가운데로 빠뜨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게 가시가 있다할찌라도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을 줄 믿습니다.
그러니 내게 가시가 있다고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그 가시 때문에 주님 앞에 기도한다면 그 가시를 제거되지 아니한다 해도 그 가시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위치만니' 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내 육신이 건강하여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하다가 주님께 가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갑자기 강 가운데 큰 바위가 놓여 있어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장애물이 있어서 갈 수가 없으니 이것을 없애 주옵소서 ] 그랬더니 음성이 들리기를
[ 내가 바위를 없애주랴 강물을 불려주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
그래서 그는 강물을 불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더니 강물이 불어나고 자기가 탄 배는 그 바위 위를 지나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어려움 당할 때마다 그 어려움을 치워달라고 하지 않고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시 때문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가시를 뽑아주실 것입니다. 가시를 옮겨주실 것입니다.
아니 가시는 그대로 있지만 그 가시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 앞에서 혼자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시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기도하고, 가시가 뽑히기를 기도하고, 가시를 감당하고도 남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여야합니다.

그럼 바울이 가시 때문에 기도하다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누굽니까? 행19:12- 에 보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가더라」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 같이 희한한 능력을 나타낸 바울인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늘 자기 자신을 괴롭힙니다. 물론 이런 가시의 고통 자체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었습니까?
그것은 너무 많은 은혜를 받은 바울이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지혜로운 처리였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 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대단히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가 믿기 전에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믿은 후에도 수제자 베드로도 사정없이 면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의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해 그의 선배요 은인인 바나바와 결별을 선언할 정도로
강한 면이 있는 바울입니다.

고후11:23절 보세요
자기를 비난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리하다 ] 고 질타합니다.
분명히 그는 기질상으로 교만의 덫에 걸리기 쉬운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바울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하나님은 들어 쓰시기 위하여

두 가지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1) 가히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신비한 체험을 한 성도들 보면 조금은 별난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상과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 바로 육체의 가시를 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대수로잖은 것 같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런 가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시를 가지고 바울의 교만을 막으신 지혜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보십시오
14년 동안 가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상과 계시를 체험하고 셋째 하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지 않고
14년 만에 그것도 삼인칭을 써서 자신을 그늘에 숨기고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통해 주님만 자랑하는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불평하지 마시고 그 가시 때문에 더 겸손해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 겸손함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 입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가시를 주시고 약함을 드러내게 하십니까?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 약한데서 강하여진다 ] 는 말씀이 그대로 입증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같이,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했지마는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얼마나 강자로 쓰임을 받았습니까?
당시 최고의 헬라와 로마의 문화권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까?
빌립보가 무너졌고, 에베소가 항복했으며, 고린도가 성문을 열고 쇠사슬에 묶인 초라한 죄수 앞에 로마가 백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가시 때문에 한 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강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가시의 은혜를 감옥에서 터득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이런 말을 합니다.
[ 하나님이 덧셈을 하실 때에는 뺄셈을 하시고 뺄셈을 하실 때에는 덧셈을 하신다 ]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았지마는 하나님이 오히려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당한 고통 실패 삶의 문제가 뺄셈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덧셈이라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가진 채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던 일은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한 자만이 아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저는 오늘 다른 측면에서 이 가시의 은혜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3월 신앙의 성숙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이 진정 언제 성숙해지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가시를 앉고 끙끙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구분해 보면 지적인 은혜가 있는가 하면 감성적인 은혜가 있고 그리고 의지적 은혜가 있습니다.
지적인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은혜라면 감성적 은혜는 내가 변화되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내가 행동하는데 필요한 은혜는 바로 의지적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의지가 약해서입니다.
이 의지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 연단 받아야 이뤄지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그가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베풀 때처럼 가시를 두고 기도하였더니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더라 고 했으면 가시가, 가시가 될 수 없고
가시가 주는 의지적인 은혜를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바로 오늘의 바울이 된 것입니다.

파스칼이 한번은 말을 타고 높은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무엇엔가 놀라서 뛰게되자 파스칼은 그만 말안장에서 다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뼈도 부러질 뿐 아니라 거의 목숨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하게 다쳐서 수개월간 병석에 누워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석에서 그 동안 많은 발견과 발명한 우주의 법칙과 물리학적인 원리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신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그때 쓴 것이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의 명상록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신앙서적입니다.
이 명상록은 그의 능력이 가장 약해져 있을 때 그의 지식이 가장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입니다
그는 책상 앞에서나 실험실에서 연구를 몰두 할 때보다 말에서 떨어져 병상에서 고통을 당할 때가
더 큰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비한 은혜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나되게 하고 나를 신앙적인 인물로 붙들어 세워 주는 것은 바로 가시가 주는 의지적 은혜라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가시를 단순한 고통의 가시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의지적 은혜라는 관점으로 보시고 가시 때문에 더 기도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시가 주는 은혜를 단단히 맛 본 목회자입니다.
제가 부흥회 요청을 받으면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부흥회 강의 시간표와 그리고 꼭 학력과 경력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교회 당회장이라고 하면 그것 말고 다른 것 뭐 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없습니다 <12>
그래서 없다고 하면 남의 사정도 모르고 목사님 겸손하게 왜 그러시느냐고 해요.
사실 없는 것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남 다른 것 한 가지는 있습니다.
바로 가시가 주는 은혜를 맛 봤다는 것이지요.
제가 아플 때 주위에서 하는 말이 목사님 폐병은 일주일 만 금식하면 성령의 불로 짤깍 태워버린데요
그래서 저도 믿습니다 하고 금식했지요.
그런데 그 금식이 왠걸 일 주일이 걸리고 그 다음에는 한달이 가도 일 년이 지나도 몸만 더 상한 것 있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는 요양소 입원을 했는데 그때는 몰랐지마는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제게 의지적 은혜를 주시기 위함인 것 있지요.
저는 본래 덤벙 덤벙 하던 성격인데 그래서 은혜를 받아도 화끈하게 받고 은사도 통달의 은사 능력도 철장권세 이런 것만 구해서요.
그런데 제 몸 하나 못 추스리는 것 있지요.
그러는 중 몸부림치며 기도하다가 내일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내 고통의 세월이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한 것보다
더 나를 강하게 만드는 의지적인 은혜가 내게 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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