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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 안에 속한 4사람 (요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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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속한 4사람
요한복음 18장 33-38절/ 주일 낮 예배/ 040328

<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

저는 옛날에는 거의 영화를 안 봤는데, 요즘에는 영화를 보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서 제작진의 장인정신을 배우고, 삶과 사랑과 사람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없게 본 영화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 2년 전에 김사무엘 목사님 살아 계실 때 두 내외가 함께 본 '스트레이트 스토리'란 영화입니다. 73세의 앨빈 스트레이트 할아버지가 잔디 깎는 기계를 운전하며 시속 8킬로로 42일 동안, 말다툼으로 오랫동안 헤어졌던 형을 찾아가는 영화인데, 영화 내내 도로에서 할아버지가 잔디 깎는 기계를 운전하며 가는 장면만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화가 지루한지 11 커플이 영화를 보는데 4 커플이 영화 도중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영화 끝난 후 나머지 7 커플은 감동과 여운으로 잠시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재미는 없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졌고,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힘과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그에 못지 않은 재미없는 영화를 봤습니다. '히달고'라는 잡종 경주마 영화입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들은 왜 그렇게 뒤끝이 좋은지 모릅니다. 재미는 없지만 영혼이 따뜻해지고 풍성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사막에서 말 레이스를 하는 중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영화 중에 레이스를 펼치는 한 사람이 사막의 진창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인공이 그를 구해주려고 하는데 그는 죽어가면서 "나를 구하지 말라! 이것도 알라의 뜻이다."라고 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저 사람의 신심이 성령 충만을 말하면서 희생할 줄 모르고, 쉽게 불평하는 신자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일을 만나도 "이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 진리 안에 속한 사람 >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 33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6-37절에서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나는 세상 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세상에 온 왕이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고 했는데, 누가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까? 저는 진리에 속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사람

오늘날 어떤 분들은 성령충만을 오해합니다. 어떤 분은 예배 중에 잘 넘어지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얍!" 할 때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아직 자기 의지가 살아서 넘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형태로 성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넘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은 후에 여전히 마음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넘어진 성령 받은 사람에게 기대를 할 것입니다. "야! 저분 넘어졌어! 성령 받았어! 이제 무엇인가 달라질 거야."

그런데 화려하게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전도할 생각을 안하고, 여전히 이기주의고, 여전히 걱정이 많고, 여전히 수시로 우울증에 빠지고,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이 만연하고, 여전히 십자가를 질 생각을 안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 사람은 혼자 성령 다 받은 것처럼 했으면서 왜 저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성령을 심히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능력에 대한 오해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능력 세미나에는 몇 백 명의 목사님들이 참석해서 넘어뜨리는 법을 배웁니다. 그곳에서는 서로 안수하면서 넘어뜨리는 임상실험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실험 도구가 아닙니다.

그처럼 신기한 것, 마술적인 것을 능력으로 오해하니까 요새는 최면술까지 배우는 목회자가 생겼습니다. 실제로 어떤 최면술 학원 원장의 말에 의하면 자기 수강생 중에서 목사님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 시간에 더 말씀과 기도에 땀을 쏟으면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진실성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에 의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3가지, 즉 '기쁨'과 '예쁨'과 '바쁨'이 생긴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행동, 하는 말, 마음 씀씀이가 예쁩니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책임적이고 선한 일에 바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2.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사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하는 진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려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주장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결국 '살림'이 진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오셨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살림을 잘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살림을 잘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나라 살림을 잘해야 하고, 기업가는 회사 살림을 잘해야 하고, 목회자는 교회살림을 잘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살림을 가장 잘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십자가를 기쁘게 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구절에서 증인이란 헬라어 원어의 의미로는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이란 내가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죽어서 내 안에서 오직 예수가 나타나는 것이고, 바로 그때 능력도 나타나고 문제 해결의 역사도 시작될 것입니다.

지방에 사는 어떤 장로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결혼하면서 시댁의 반대로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 일로 시댁의 핍박이 심했습니다. 너무 핍박을 해서 어느 날 한 목사님을 찾아 자기 사정을 다 말하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서울에 가서 신학교에 들어가 전도사나 해보려고 합니다. 학교 좀 소개해 주세요."

목사님이 가정 살림에도 실패한 사람이 영혼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전도사나 하겠다"는 말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좋게 잘 말해주었습니다. "전도사보다는 가정을 잘 살려보세요.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를 지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믿음으로 살아 보세요."

그리고 40일 새벽기도를 권하면서 이번 작정기도 기간에는 "하나님! 남편 믿게 하소서! 시어머니 믿게 하소서!" 하는 기도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저를 죽여주소서!"라는 기도만 중점적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이 젊은 부인은 자기를 죽이고 "내 안에 예수가 산다"는 마음으로 괴로우나 즐거우나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꼭 1년만에 남편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얼마 후에는 시부모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가정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으니까 최고의 살림꾼이 된 것입니다. 최고의 살림 밑천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남편의 고백에 의하면 어느 날 저녁 목사님을 만나고 온 뒤부터 아내가 자기 주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 죽었으니까 말이 많은 것입니다. 대개 보면 일꾼은 말이 없고 구경꾼이 말이 많습니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구경꾼도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경꾼에게는 축복과 보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구경꾼 대열에 속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일꾼 대열에 서야 합니다.

진정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우리의 삶에 항상 십자가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가정생활에도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사업에도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사업이 망해도 십자가는 사라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십자가만 사라지지 않으면 결코 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만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최고의 살림꾼이 되고, 어느 누구도, 어떤 상황도 우리 속에 있는 행복과 만족과 여유를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3. 변화된 삶이 있는 사람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을 때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속한 사람은 내면을 중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온갖 외적인 성공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기독교가 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적어도 흥할 때가 있고 많아도 쇠할 때가 있습니다. 불교의 예를 봐도 절 숫자가 많아지고, 불교인 숫자가 많아지고,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을 때 오히려 불교가 쇠퇴했고, 나라를 망쳤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공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왜 예배 시간에 수많은 군중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가 부흥회를 할 때는 술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술집 주인이 은혜 받아서 닫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손님이 없어서 닫았습니다. 촬스 피니가 설교하고 지나간 지역은 마귀 세계가 쑥밭이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간수가 졸았고, 술집에서는 파리가 졸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은 이렇게 교인들이 많은데 그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영향력 있는 교회는 대부분 서울 강남에 있는데, 그 강남에는 술집도 많습니다. 강남에 사는 어떤 분은 토요일 저녁에는 저쪽에 있는 술집에서 마시고, 주일 아침에는 이쪽에 있는 교회에 와서 "오! 주님! 용서해주세요."라고 한답니다. 그처럼 서울 강남은 술집도 많고, 싸우나 탕도 많고, 교회도 많기 때문에 살기가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한국교회가 성장은 했지만, 결국 교인 숫자가 많아지고 건물 크기가 커졌지 내면의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지금 진리를 이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만 있지 십자가도 없고 변화도 없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떤 목사님은 '예수 무신론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적인 살림을 잘하는 사람은 반드시 생활 속의 살림도 잘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살림은 잘하는 것 같은데 생활 속의 살림을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살림도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 기뻐하지 않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그에게 있다는 반증입니다. 믿음은 장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4. 천국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주님께서는 37절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했다면 내 종들이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천국의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도, 싸움을 일으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평화의 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 상상에 의하면 후크 선장이 피터팬을 괴롭히고 못살게 군 것은 피터팬이 싫어서가 아니라 외로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터팬과 친해지고 싶고, 어울리고 싶은데 해적 두목이라는 위신도 있고 주위 여건상 대놓고 친해질 수 없으니까 괜히 싸우는 척 하고, 당하는 척 하면서 피터팬과 어울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악마는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사단 마귀에 농락 당해 지친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세상의 선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외로운 세상에 우리가 선물로 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뜻한 미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어려울 때는 내는 찬송 소리와 휘파람 소리, 전화 한 통화 해주는 것, 대신 설거지를 해주고 쓰레기를 버려주는 것, 식사 대접하는 것, 허물은 감추고 잘하는 점은 칭찬해주는 것, 남 흉보지 않는 것, 충고 대신에 같이 해결하려고 애써주는 것, 썰렁한 농담에도 웃어주는 것, 자신감 잃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어떤 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정말 답답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 조용히 친절을 베푸는 것, 용기를 북돋워주고 희망을 갖도록 해주는 것, 열심히 들어주는 것, 예고 없는 외출과 여행 등 얼마나 줄 선물이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예수 복음을 전하고, 예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선물로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세상의 선물이 되어 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평화를 깨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평화를 깨는 것은 마치 자기의 영혼의 손목을 칼로 긋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내 영혼이 나로부터 멀어집니다. 내 양심도 나로부터 멀어지면서 두려움과 불안이 생깁니다. 사랑이란 말이 어색하게 되고, 날 구원하신 주님의 미소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주님의 음성이 어색하게 들리고 설교도 어색하게 들립니다.

내가 평화를 깨고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그 영혼을 울리면 그 울음소리가 칼이 되어 내 영혼의 동맥을 끊고 자기 자신은 더 소외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가 사자가 되기를 힘쓴다면 친구도 얻고, 행복도 얻고, 사랑도 얻게 될 것입니다.

< 장금이와 혜은이 >

어떤 연못에 황금색 비늘을 가진 장금이라는 미모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장금이를 부러워했지만 너무 자세가 도도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장금이는 혹 자신의 비늘이 다칠까봐 다른 물고기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다녔고, 마을의 축제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늘 혼자였고, 아무도 그녀의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연못에서 혜은이라는 물고기가 이사와서 장금이의 미모에 반해 말을 걸어왔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장금이는 그를 반갑게 맞았고, 장금이와 혜은이는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우정이 깊어갈 무렵, 어느 날 혜은이가 장금이에게 부탁했습니다. "장금아! 너의 아름다운 비늘을 하나만 내게 주지 않을래. 나도 갖고 싶어." 그러자 장금이는 선뜻 자신의 황금 비늘하나를 빼서 혜은이 가슴에 꽂아주었고, 둘은 흐뭇한 미소로 서로 바라보면서 기뻐했습니다.

다음 날 혜은이의 가슴에 꽂힌 황금 비늘을 본 연못의 다른 물고기들은 너도나도 장금이를 찾아와 비늘 하나만 달라고 졸랐습니다. 자기 것을 나눌 때 사랑을 얻고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경험한 장금이는 그들에게 비늘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모든 비늘을 다 나눠주니까 장금이는 자기 몸을 덮은 금장식이 다 사라져서 보통 물고기처럼 되었지만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생겨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그 연못을 지나던 사람이 연못 전체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까 연못 속 물고기들이 하나씩 지니고 있는 황금비늘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혼자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더불어 살기를 힘쓰십시오. 최대한 이웃과 평화를 누리며 사십시오. 힘써 어려운 자를 돕고, 예수 복음 전하는 데 힘쓰고, 선교사님들과 찬수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의 비늘을 하나씩 뽑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수가 지난 목요일 위급한 상태에서 무균실로 올라갔는데 찬수의 건강과 병원비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며칠 전에는 몽고의 김재호 선교사님의 선교편지를 보았는데, 4년만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여비 문제와 1년 동안의 생활비 문제에 대해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런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 요삼일육선교회에서 기도하는 선교사님들과 어려운 이웃들이 참 많습니다. 선교사님들이 편지를 보낼 때에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에서 집시 선교를 하는 손영삼 선교사님은 유로화의 폭락으로 생활비가 3분의 1이 줄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은 자동차가 없어 심방 다니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안양에서 제 3세계 근로자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을 가르치는 월드 크리스챤 네트웍(WCN)에서는 120명에게 무료로 컴퓨터도 가르치고 식사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후원비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안디옥 신학원에서도 무료로 제 3세계 학생들에게 신학교 교육을 하는데 후원이 필요하고,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과 몽고의 임준호, 임병철 목사님에게도 우리의 기도와 후원이 필요합니다. < 요삼일육선교회 구제후원계좌 신한은행 642-12-079560(이승연), 선교후원계좌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 >

그런 요청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내가 소중히 여기는 비늘 하나를 뽑아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진리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의 아름다움이 더욱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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