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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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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더 중요한가? (마태복음 6장 25절-34절)

옛날 아프리카에서 영국 해협으로 오던 배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구조선이 왔지만 파도가 높아서 접근을 못하고 있었고, 조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밧줄을 던져주면서 구조선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구조선 덕택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지만 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수영을 못해서, 또는 밧줄을 잡지 못해서 죽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금괴를 몸속에 넣고 오다가 금괴의 무게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재물을 움켜쥔다 하더라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언제나 대두되는 문제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는 이슈는 자살입니다. 엊그제도 고등학생 하나가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대학생 하나가 “인생은 게임이다. 레벨이 낮은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건수는 13,055건으로 2001년 12,277건에 비해 6.3% 증가했다. 이것은 하루 평균 36명, 1시간에 1.5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관 혼란이 불러온 재앙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가치관이란 생각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며, 잣대입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옳음과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오늘날에는 이 절대기준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지 못한 채 허무한 일에 귀중한 인생의 날들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은 바쁘게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은 그 삶이 넉넉하며 혹시 삶의 위기가 닥쳐올지라도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33절).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삶의 가치관을 분명히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우선 인생의 우선순위를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25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몸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오늘 본문에서 다섯 번이나 계속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염려는 우리 인생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삶의 우선순위를 혼란케 만드는 무서운 적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면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①그것은 염려 자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함으로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커버린 성인의 키를 크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될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걱정, 해 봐도 소용없는 걱정에서 해방되라는 말씀입니다. 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이며 때로는 그 염려가 우리의 인생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염려 자체는 우리 인생에 전혀 생산적 도움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제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merimnao-메림나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merizo-메리조(나누다, 분리하다)’와 ‘nous-누스(마음)’ 그래서 염려한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마음을 나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면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음으로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염려의 가장 큰 부작용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초청 받아 들어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소망이고 생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밖에서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수고하는 ‘마르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문제가 무언가 하면 봉사를 하다가 그만 지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마리아’는 나를 도와주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구나”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진 마음으로 여러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기보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생산적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 마음으로 염려하는 일은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고 분산시키고 혼란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모두가 여러분에게 다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찾는 것이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비밀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②염려는 전혀 신앙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1절-3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 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의식주의 문제 이것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식주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관심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염려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염려하고 방황하는 인생 이것은 이방인들-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위기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이 문제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똑같이 걱정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님을 능력으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모든 염려와 걱정거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문제로 똑같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며 그 짐에 짓눌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염려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염려를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라

그 다음으로 우리가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하는 것입니다. 26절과 28절을 읽습니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공중의 새들을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직접 기르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한 너희들의 필요를 모르겠는가? 봐라 저기 들에 아무렇게나 피는 저 풀들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피조물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시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직접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그보다 귀한 우리들을 돌보시지 않겠는가라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여러분들은 들의 백합화보다, 공중의 새보다 귀한 존재라고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이 너무 적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자신감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노예근성을 벗지 못한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430년을 사는 동안 그들의 정신과 사고는 노예로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합니다. 감사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신합니다. 노예근성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태도다 모세와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가나안에서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염려하는 이유,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인생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하고 살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믿음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은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우리가 왜 세상의 염려로 인하여 무너져야 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섭리하십니다. 그 분은 내 인생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십니다. 예수님은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 합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기서 권고하신다는 말씀은  ‘care한다.’ ‘주님이 돌보아 주신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이 염려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십시오. 주님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돌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아멘, 구원받았으면 아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원한 가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가치를 소유해야 합니다. 3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있어서 승리의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금 염려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다스리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중심에 계시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염려할 수밖에 없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염려는 주께 맡기고 주의 다스리심을 간구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 외에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가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것에 집착하는 우리들을 향해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전도서2:11).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려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 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고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의 우선순위에 무엇을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가치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역사를 지내오면서 생명력은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이 보여줄 수 없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을 맞으면서도 용서의 기도와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초라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에게 구원이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여러분에게도 스데반처럼 하늘 문이 열리고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이 계신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른다면 그는 결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고, 누리는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전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송명희 시인이 쓴 “나”라고 하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나가진 제물 없으나 나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가진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그는 사지를 쓸 수 없고, 말도 어눌하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건강도 좋지 못하고, 글씨도 삐뚤삐뚤하게 쓰지만, 남들이 갖지 못한 천국을 소유한 진정한 축복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처럼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구조조정은 내 인생의 목표를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창조주에게 내 시선과 내 삶의 우선순위를 맞추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정하셔서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불꽃같이 빛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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