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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8) /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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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8)
< 본 문 > 마5:1~12

오늘은 예수님의 행복론 마지막 순서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행복론은 세상의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행복론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세적입니다. 육신을 위해 안락한 환경 조건만 갖추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반쪽 진리에 불과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갖고 살기에 이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깊은 영혼을 갖고 있기에 그런 것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것들은 부차적입니다. 정말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마음과 영혼입니다. 잠4:23 말씀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의 모습, 즉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면 예수님의 팔복 말씀은 한결같이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들이야말로 참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헬라어 단어가 ‘마카리오스’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급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역설 속에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살펴볼 여덟 번째 말씀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역설적입니다. 마5:10 “ ...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 일반 상식으로 볼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게 도대체 무슨 행복인가? 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이 팔복 가운데서도 가장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팔복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첫째 시간에 팔복 말씀을 음악의 8음계에 비유해서 말씀드렸는데, 제8복은 한 옥타브 위의 ‘높은 도’에 해당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이 말씀에만 특별히 부록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10절로 끝나도 충분한데 주님께서 11절~12절을 덧붙여 보충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숨겨 두신 큰 행복의 비결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살펴보면서 그 비결을 발견하시고 크고 놀라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핍박의 의미

10절에서 ‘핍박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오코’인데, 악의를 품고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스토킹(stalking)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믿는 자들조차 추격하며 괴롭힙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 정말로 사단은 가장 악랄하고 끈질긴 스토커(stalker)입니다. 11절의 보충 설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욕하고 괴롭히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방하고 ... 이런 짓을 합니다.

[2] 의를 위한 핍박

그런데 10절을 다시 보면, 그냥 ‘핍박받은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①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것 : 먼저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것을 가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남에게 비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교회 간다고 핑계대고 공부를 게을리 하다가 성적이 떨어져서 부모님에게 꾸중을 들을 때 그것을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할 수 없죠. 또 가정주부가 교회 일을 한답시고 가정 일에 등한히 하다 가족들에게 비난을 당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또 비진리를 위해 혹은 야심을 위해, 헛된 영웅 심리로 고난을 선택한다고 할 때 역시 그것도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무척 많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팔레스타인의 14세 소년이 허리에 폭탄을 잔뜩 휘감고 이스라엘을 향해 자살폭탄 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됐습니다. 이스라엘 군인이 심문했더니 그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죽어서 내세에 들어가면 처녀 72명을 준다고 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신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으면 순교하는 건데, 내세에 큰 상을 받게 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처녀 72명을 준다고 선전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그래도 이를 맹신하고 고난을 선택하니까 9.11 테러 같은 게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때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 ” 이런 고난은 당연한 고난이지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닙니다.

②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구체적인 내용 : 여기서 ‘의’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주 쉽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11절 보니까 “나를 인하여 ...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곧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일 겁니다.

(i)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라 당하는 고난 -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끌려가고, 투옥되고, 매 맞고, 사형 당하고 ... 당시 로마 제국은 여러 나라와 족속을 정복하고 지배했습니다. 그 광활한 땅을 통합하려고 정책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곧 황제 숭배입니다. 그들은 황제를 가리켜 신의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적어도 1년에 l회 이상 로마 황제를 향해 “씨이저는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도록 한 겁니다. 그러면 ‘리벨루스’라는 증명서를 교
부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신을 얼마든지 섬겨도 됩니다. 하지만 유일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타협할 수 없죠. 그래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조롱을 당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그 정도는 아니죠. 그러나 나름대로 신앙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많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얼마나 괴로움이 많은지 모릅니다. 또 불신자가 가득한 직장에서, 사회에서 신앙을 지키느라 고생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게 곧 의를 위한 핍박인 것입니다.

(ii) 예수님의 말씀(or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 - 흔히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곧게 살아도 핍박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랬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이 직장 생활이나 사업, 혹은 사업을 할 때 대충 타협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적당주의, 왜곡된 청탁문화, 과도한 접대 문화 등 성도들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데 휩쓸려 살 수 없죠. 그래서 곧이곧대로 살다가 핍박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직장에서 상사가 부정한 회계 처리를 지시하는데, 도저히 신앙 양심 상 따를 수가 없어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따돌리는 겁니다. 승진에도 탈락되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들어서 결국은 퇴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상사는 부정으로 인해 감옥에 가고, 그 성도는 실직의 아픔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iii) 복음 전하다가, 사명 감당하다 당하는 고난 -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었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그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주후 1세기에 사도들은 하나 같이 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수도 없이 감옥을 들락거리다 마지막 투옥되었을 때는 9개월간 옥고를 치루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사지가 찢겨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받다 선교했습니다. 그 후에도 복음을 처음 들어가는 곳은 예외 없이 순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목이 잘려 죽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평소 복음 전파의 사명을 귀중히 여겼는지 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는 핍박을 당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것 같아도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거부하고 반발하고 조롱하고 ... 앞으로는 더 심해질 전망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3] 핍박을 허용하시는 이유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해도 핍박은 괴로운 건데 핍박을 피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까, 또 우리는 사랑하신다고 하니까 충분한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고 높은 생각으로 성도들에게 핍박을 허용하시는 겁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핍박을 받는 게 더 유리하다는 말씀입니다.

① 성도의 신분 증명 기회 : 고난을 통과해 보지 않고서는 신앙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죠. 그 신앙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다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의 절차를 통해 공적으로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증명입니다. 요15:18~19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소속이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소속입니다. 그들은 사단 소속입니다. 우리는 천국 소속입니다. 그들은 지옥 소속입니다. 우리는 빛 소속입니다. 그들은 어둠 소속입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세상은 성도들을 싫어하게 마련입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

그럴 때 묵묵히 고난을 당하며 신앙을 지키면 진실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오히려 흔들리고 주님을 배반하면 그 신앙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의 측근 중에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바울을 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생기는 것도 없이 날마다 고난과 핍박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바울을 떠나버렸습니다. 딤후4:10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 ” 고난과 핍박이 데마의 신앙의 거짓됨을 폭로한 것입니다.

여러분, 티백(tea-bag)이 있죠. 차를 봉지에 낱개 포장한 거 있죠. 겉포장에 차 종류가 표시되어 있지만 벗겨지면 무슨 차인지 모릅니다. 녹차인가, 둥글레차인가, 홍차인가 ...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뜨거운 물에 넣어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초록색 물이 우러나오면 녹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과 핍박에 처하면 우리 신앙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오고, 핍박에 올 때 나의 신앙을 진실성을 증명해 보일 때라고 생각하시고 감사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신앙과 인격의 연단 기회 : 하나님은 당신이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신앙 인격자가 되기를 소원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예수 겨우 믿고 어린애 짓만 하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성숙과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단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을 허용하시는 겁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입니다. 그런데 극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괴로웠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신앙의 연단 기회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구절에서 그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시119:67,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롬5:3,
약1:2~4 참조)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고난을 가리켜 ‘제3의 성례’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인데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입니다. 고난과 핍박도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성화시키는 중요한 도구인 것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유리는 망치에 맞아 깨져 버린다. 그러나 쇠는 더욱 강하게 단련된다.” 우리 신앙의 관점에서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③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광 돌리는 기회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고난과 핍박의 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의 어명을 어기고 금신 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끝내 거부하니까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풀무불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제4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성육신 이전 구약 시대에 아주 특별한 경우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상상이 됩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형통하고 세상에서 잘 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복음이 잘 전파될 줄 압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강력하게 나타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스데반이 비참하게 순교한 것 같지만 오히려 사울을 위대한 바울 사도로 변화시키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4]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에게 약속된 축복

이렇게 의를 위한 핍박받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마5:10(하) “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제1복(마5:3)과 같은 내용입니다. 흥미롭죠. 그런데 사실은 제2, 제3, ... 제7복의 말씀에 약속된 것들도 다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행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두 가지 국면을 포함입니다. 현재적인 천국과 미래적인 천국입니다.

① 현재적인 천국 : 천국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 통치권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면 현재적인 천국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위로와 평안, 기쁨 등이 곧 현재적인 축복인 셈입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바울이 가장 강력하게 주님의 임재를 체험했던 것도 다 고난과 핍박 중에 있을 때입니다. 그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한밤에 찬미하고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가운데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착고도 풀렸습니다. 출옥할 수 있지만 간수가 자결하려 하자 그 목숨을 구하고자 절제합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생겼죠. 간수의 식구들이 세례 받고, 다음 날 아침 당당하게 출옥하게 됩니다. 감옥에 천국이 임하고, 간수의 집안에 천국이 임하고 ... 놀라운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보면 바울이 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갔던 간증이 나옵니다. 그 신비로운 체험이 언제 있었냐 하면 핍박 중에 거의 다 죽어 쓰레기 더미에 던져져 있었을 때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이것이 영적인 진리입니다.

② 미래적인 천국 :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다 천국이 들어갈 겁니다. 그때 주님 앞에 각각 서서 상급을 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본문 12절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니까 하늘의 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죠. 이 세상의 그 어느 상이나 축복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알면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12절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원어의 뜻이 뭔가 하면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롬8:18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얻을 영광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영적인 눈으로 보니까 고난도 감수하고 순교도 불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투자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업가가 돈을 엄청 씁니다. 그러고도 좋아합니다. 왜 그래요? 앞으로 얻을 수입을 생각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농부가 봄철에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흐뭇해합니다. 왜 그래요? 가을철에 추수할 것 미리 생각하니까 좋은 겁니다. 이게 투자의 원리 아닙니까?

우리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지그까지 흘러간 세월을 생각해 보세요. 휙~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생애가 얼마나 짧습니까? 오늘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고난과 핍박도 감수하면서 헌신하는 것이 다 인생의 투자입니다. 짧은 인생에 투자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거두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나는 일입니까?

성도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행복을 찾아 많이 헤맸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안내하는 행복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행복을 방황을 계속하지 맙시다.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일에는 종지부를 찍고, 팔복의 말씀으로 참 행복을 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팔복의 말씀을 오늘을 끝으로 덮어버리지 마시고, 계속 반복해서 되새겨 보십시오. 마치 유능한 연주자라도 도레미파솔라시도 8음계를 갖고 계속 발성 연습함으로 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부디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팔복의 말씀으로 연주되는 행복의 멜로디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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