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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찾는 것, 깨어나는 것 (막 4:1-9,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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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것, 깨어나는 것(막4:1-9,13-20) 

봄은 희망을 통역해 준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나라 온 산하에 꽃들을 선물로 주셔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봄이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된다고 합니다. 내 안에 꽃을 피워 봄이 되게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이며 그렇게 오는 봄은 나의 봄이 아니라 나의 봄은 내 안에 꽃을 피워 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하여 천국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고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살라고 주셨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속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면서 살다가 주일 교회에 나와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되고 고난주간이 되어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하여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감사하면서 사순절을 맞이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장미는 한창 꽃을 피워 봄을 오게 하고, 뻐꾸기는 자기 노래를 하여 자기 봄을 오게 합니다. 봄에는 꽃이 있다. 밖에 핀 꽃이 아닌 안에 핀 꽃, 나의 소질의 꽃을 피우고, 재능의 새를 날게 해야 합니다. 소질의 꽃을 피우는 것이 부활이요, 재능의 새를 날게 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꽃을 보기 위해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빈 하늘만 보면서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결국 자기 봄 한번 맞이하지 못하고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원망하다가 갑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는 봄을 기다리지 않고 하얀 겨울 속에서도 무지개의 빛으로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암울하기만 하던 독재정권 시절, 이에 항거하다 감옥에 들어간 한 민주인사는 분노,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끌어 갔습니다. 비록 봄이 왔지만 몸과 마음은 마취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좀체 풀리지 않고 절망과 무력감과 좌절 속에 빠져있던 이 사람이 어느 날 막사 바깥의 한 귀퉁이에서 연약하면서도 당차게 올라오는 새싹을 발견했습니다. 시멘트 바닥 사이의 비좁은 틈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씨가 그렇게 싹을 틔운 것입니다. 가냘프기 짝이 없으면서도 시멘트 못지않게 딱딱하고 열악한 맨 땅을 뚫고 나오는 그 강인한 생명력을 깨닫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고 한참 뒤 눈물을 씻고 일어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기가 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심신을 갉아먹던 노폐물과 독소가 완전히 제거된 기분이었습니다. 열병을 지독하게 앓고 난 다음의 상쾌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오는 봄이건만 그는 그때 처음으로 봄의 진면목과 엄청난 에너지를 절감했고 봄이 통역해 준 희망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싹은 문자 그대로 싹이 새로 나오는 것으로 여름의 무성함과 가을 결실의 시발점이요, 멀고 먼 장정의 첫 걸음입니다. 그리고 새싹 속에는 성장과정이 순탄하고, 결과가 충실하도록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희망이라는 막강한 동력장치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새싹이 없다면 그건 절망 그 자체입니다. 봄이 우리에게 전하는 평범하면서도 진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희망입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무거운 흙의 두께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것은 희망과 생명력밖에 없습니다. 즉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시련이나 극한 상황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리는 쇠뜨기는 새싹 안에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승용차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타이어 압력이 2기압인데 쇠뜨기 새싹의 팽창 압력은 수십 기압에 이르러 아스팔트까지 뚫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무서운 힘입니다. 쇠뜨기는 극단의 예이겠지만 다른 식물들 역시 이보다는 못하다 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지각을 뚫고 나옵니다.

식물이 이럴진대 우리라고 그런 힘이 없겠습니까? 우리도 내면의 재고목록을 자세히 훑어보면 그 동안 방치된 에너지와 희망이 어느 구석엔가 쑤셔 박혀 있을 것입니다. 봄은 그런 것들을 밖으로 들어내 우리 자신을 쇄신하도록 요구합니다.

겨우내 짓눌리고 움츠린 심신을 펴게 해 주는 희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봄을 찾으러 먼 산을 헤매다 돌아오니 자기 집 매화나무에 이미 와 있더라는 어느 시구처럼 무조건 멀리 밖으로만 나가서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속에서 봄과 희망을 찾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면 봄을 낭비하고 희망을 놓쳐버린 이들이 으레 내뱉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같은 말이 곁에서 어슬렁거리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수 하덕규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 중에 "가시나무"라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자신의 마음이 마치 가시나무 숲 같아서 바람이 불면 그 메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또한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이, 그 가시에 찔려 상처만 입고 가 버린다는 겁니다. 쓸쓸한 마음, 상처 입은 마음, 두려운 마음,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 상태를 참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나’ 라는 존재는 너무나 중요한데‘진정한 참된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진정한 나의 참모습이 아닌 거짓된‘나’, 왜곡된‘나’, 굴절된 ‘나’, 잘못 파악한‘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판단하는‘나’ 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는‘나’ 사이에 많은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행복한‘나’와 불행한 ‘나’,풍요로운‘나’와 빈곤한‘나’, 치유된‘나’ 와 상처 입은‘나’, 안식과 쉼이 있는‘나’ 와 피곤에 지쳐있는 쫓기는 ‘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넘치는 희망적인‘나’ 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좌절감과 패배감에 젖어있는‘나’,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사랑과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나’ 와 누군가를 위로해 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고 인정과 존경을 주고 싶은‘나’가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찾아야 한다(장봉균 씨가 지은 시)
남들이 얘기하는 내가 아닌 옷 속에 감추어진 나를.
직장에서 돌아온 늘어진 나 말고 새벽에 잠에서 깬 나를.

거울 앞에 서면 거울이 돌려주는 나 말고 거울을 바라본 나,
마음에 빗장 걸린 나 말고 옷 속에 감춰지고, 직장에서 감춰지고....
나조차 나를 보지 못합니다.
이건 아닌데 하며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자신과 다른 모습의 가면으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이제는,
가면 안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얼굴을 찾는 것은 아주 많이 힘든 일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일생을 바치기도 합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나', '홀로 서기'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승리자
우리는 누구나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에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을 "넉넉히 이기는 자"라고 한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신이 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바른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외로움과 패배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일에서 승리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승리자들입니다. 비록 인생은 우리를 괴롭게 하나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승리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억누르는 세력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설교에서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또 어떤 설교에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를 통해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나는 지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나? 내 안의 이 공허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어느새 축도와 함께 예배가 끝납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지"라고 생각하며 다음으로 넘깁니다. 예배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교인들과 잡담을 조금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배에 참석했던 사실이, 설교를 들었던 사실이, 어떤 실존적 고민을 잠시 하였던 사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공허감은 날로 쌓여갑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습
예수님은 오늘 성경 본문을 설명하시면서,‘씨’ 란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말씀을 들었지만 사탄이 와서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씨를 쪼아 먹은 새는 바로 자신의 왜곡된 마음인 것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에 이어, 두 번째로 돌짝밭에 뿌려진 씨가 있는데 돌짝밭은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는데 우리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봅니다. 귀한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에서 무척 불리한 일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진리의 말씀에서 다시 등을 돌립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의 말씀에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은 언제나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은 나를 더 편하게, 나를 더 복되게, 나를 더 형통하게 만드는 것만 찾습니다. 그러다가 나를 고생하게 하고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상황이 전개되면, 더 이상 진리를 듣고 싶지 않게 됩니다.

축복의 기독교와 고난의 기독교를 동시에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축복 받기 위해서만 선택하셨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는데 장사도 별 볼일 없고,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등을 돌리는 그리스도인들, 이 뿌리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축복의 기독교와 고난의 기독교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따르기 위해 많은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진리는 계속 퍼져나가야 하고, 내 삶 속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 번째로 가시밭에 뿌려진 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라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첫째로 말씀이 뿌려지자마자 사탄에게 빼앗기는 경우, 둘째로 뿌려진 말씀이 싹이 나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도중에 시드는 경우, 셋째로 자라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각각 사탄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신앙과, 그리고 세상 염려 및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기 위한 디딤돌인 것입니다.

나 있음은 생각이 아닌 생명의 약동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를 찾느라 야단입니다. 그런데 언제 나를 잃은 적이 있고 내가 나 아닌 적이 있었던가요? 찾아봐도 나요, 찾지 못해도 나입니다. 또 깨달아 봐도 나요, 그렇지 못해도 나입니다. 그 무엇을 해서는 나 이상 그 무엇이 되어지지도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이하의 무엇이 되어지지도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발견이니 잃은 나를 찾느니 야단입니다. 나를 찾는다고 해서 그 나가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제 내가 나를 잃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서 기웃하고 저기 가서 기웃합니다. 기웃해서 구경한 것들을 전부라고 또 허풍들을 떱니다.

거듭남이란 나를 강요하거나 다그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나를 찾는 것, 깨어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나를 강요하거나 다그쳐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하는 무엇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에 비로소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구원은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에서 오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땅위에 몸으로 육체로 존재하고 있는 한은 나는 생각이 아닌 관계를 통해서 나의 나됨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닐 때 참 나가 됩니다. 참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닙니다.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나무를 보면 나무가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될 수 있는 나, 산과 통하고 나무와 통하고 물과 통할 수 있는(코이노니아) 나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는 너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참나)가 사는 세계입니다. 너와 통할 수 있는 나,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을 수 있는 나,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나가 진짜 나입니다.

나 있음으로 있는 나는 멈추어 있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벗은 그 신발을 나도 매일 매일 벗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나를 통해서 내 안에서 일어나도록 나를 비우고 나를 열고 나를 봅니다. 그때 비로소 생명의 약동을 느낍니다.

이웃이 그립고 이웃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할 때 삶은 신비와 은총으로 다가와 나를 더욱 나 되게 해줍니다. '여기 나 있음'하고 생각으로 나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착각 속에 있는 영적으로 나태한 사람입니다. 나태는 자기를 살지 못하고 변명을 낳고 해석을 낳습니다. 하늘나라는 이곳저곳이 아닌 너희 안에 너희 사이에, 즉 관계에 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관계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성서는 義人이라고 합니다.

안다는 것, 그 안다는 것에 갇혀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보는 것은 정말 작고 좁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품안에 푹 들어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작아져 가는 나를 느끼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참 작아지는 것을 느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고 작아졌을 때 오는 평안이란 그 동안 확장에서 오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어렸을 때 짚가리 속에 웅크리고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숨었을 때, 그렇게 수축되었을 때의 평화와 안식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작아진 나를 찾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 안의 힘을 새롭게 확인하고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불어 넣어주신 무궁무진한 힘을 감사하며 이 세상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사순절 다섯째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많이 갖기 바랍니다. 주어진 조건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순절은 기도와 명상, 그리고 자기성찰과 깊은 관련을 갖는 절기입니다. 이런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으면,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갖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힘이란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그 힘을 넣어주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무궁무진한 힘이 이미 내장되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힘이란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그 힘을 사용하겠다고 적절히 결정하면, 우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그 힘을 사순절을 계기로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 힘을 발휘하여 여러분의 마음 밭을 차츰 옥토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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