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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행 13: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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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행 13:17-23
제목 :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저는 오늘 아침에 좀 투박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김상복 담임목사님은 대 설교가로서 평이 있는 분이고 여러분은 그동안 늘 좋은 것을 잡수셨는데 오늘은 뚝배기 중에서도 청국장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다’는 것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과 코드가 맞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개코’가 맞는 사람, 즉 개혁 코드가 맞는 사람이 출세하더군요. 하나님 마음에 합한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저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시무하던 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5년간 암 투병을 하셨어요. 제가 타지에 가 있던 어느 날, 그분의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아무래도 저희 어머니가 오래 가실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권사님은 통증이 심해서 모르핀을 맞고 누워계셨는데 딸, 사위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하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권사님이 퇴원해서 우리와 같이 예배드리도록 치료해주옵소서. 믿습니다.” 마치고 나오는데 사위가 뒤따라오며 잠깐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목사님 생각에 제 장모님이 목사님 기도처럼 속히 퇴원해서 다음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저는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목사님, 목회의식상 그렇게 하시지 마세요. 장모님은 지금 인생의 가장 확실한 사건 앞에 직면해있습니다. 목사님이 가셔서 복음을 전해주세요.” 저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다시 병실로 들어간 저는 권사님 손을 붙잡고 “권사님은 이 세상에서 오래 계실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병실에 들어 가시 전에 의사에게서 인간적으로는 시간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권사님,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는 말씀처럼 이제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 권사님의 손에 아무 반응이 없어요. “죄 값으로 우리는 지옥에 갑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상관할 수 없습니다. 권사님 대신 죄를 지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제 손을 꼭 쥐어요.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고 내 죄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권사님은 지옥 갑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그렇게 확실하게 얘기한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인 것 같습니다. “믿으십니까?” 했더니 권사님이 제 손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미련을 버리십시다.” 그랬더니 그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나 편안해보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고 “주님 앞에 먼저 가시면 후에 뒤좇아 가는 저희를 만나십시다”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두 점 사이가 가까우면 직선이 유지되지만 멀면 선이 굽습니다. 한국에 생명의 복음이 전해진 지 벌써 1백20년이 지났어요. 이제 한국교회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뭐냐, 내가 왜 믿느냐, 이 자리에 내가 왜 앉아 있느냐 하는 것을 진지하게 되묻고 말씀을 통해 그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할 때가 온 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손뼉치고 찬양하는 문화행사는 있을지 모르나 신앙의 핵심이 없고 그러다 건물만 남고 맙니다. 온 인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종교의 최대 관심은, 그것이 거짓 종교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교회가 죽음 건너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 세상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지요. 저는 염세적으로 적당히 이 세상 살고 그곳만 바라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여러분과 제 생애가 중요합니다. 보람 있고 귀합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과 제가 사는 동안 영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가 귀한 것입니다.

우리 솔직히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많은 분들이 예수 믿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고 원하는 소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도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오는 환자들이 모두 예수 안 믿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암에 걸리고 교통사고도 나고 불행하게도 됩니다. 일류대학, 예수 믿는 집 자녀만 가는 줄 아세요? 돈 많이 버는 재벌, 예수 믿는 사람들만 돈 잘 벌어요? 아닙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한 날은 매상이 오르고 새벽기도 가지 않은 날은 매상이 떨어진다면 새벽기도 안 나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이 장례식 이후에 우리 몸이 땅에 묻히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에 그친다면 솔직히 예수 믿을 필요 없습니다.

전도서 9장 5절에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라고 했습니다. 매일 ‘나는 죽는다’하고 생각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어요. 젊은 분들은 실감을 못할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 저도 젊었을 때는 늙는다는 것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이북의 시골출신인데 우리 부모님은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분이십니다. 제가 어머니 41살에 낳으신 막내입니다. 1.4후퇴 후에 저 혼자 피란 나와서 고생 지독히 했습니다. 하도 고생이 되어서 고아원에 가려고 했더니 나이가 많다고 안받고, 양로원에서는 젊다고 안받아요. 그러면서 제가 오늘날까지 걸어왔습니다. 고생과 죽음, 우리 생애에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택권아, 등 좀 긁어다오” 하시면 “왜 등이 가렵지?” “아이구, 허리야”하시면 “아니, 허리가 어디 있다고 아프시지?” 했어요. 젊은 친구들 웃지 마세요. 여러분도 등이 가려워 자식들에게 부탁할 날이 옵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성경은 허황된 말씀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확실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두 가지를 겸해야 진리입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해당되어야 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압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성군(聖君)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단군입니다. 다윗의 육각형별이 지금 이스라엘 국기에 들어있지요. 그런데 사실 다윗은 여러분이나 저보다 더 간교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인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 하 11장 2절에 보면 다윗이 오후에 낮잠을 자고 깨어서 지붕위에 올라왔다가 우리아의 아내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언제 죄 짓기 좋은지 아십니까? 다윗이 왕이 된 초창기에는 죄 지을 짬이 없었습니다. 친히 전장에 나가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이 되고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고 오후에 낮잠을 잘 정도로 한가할 때 죄가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라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갖추게 되면 힘들지요. 그래서 저는 갖출 것 다 갖춘 분이 예수 믿는 것 보면 참 귀해요.

다윗이 그 때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죄를 낳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 가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충직한 종은 “제 부하들이 일선에 있는데 어찌 집에 들어가 아내와 더불어 편히 잘 수 있으리까?”하고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첫 번째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일선에 보내어 요압장군 밑에서 싸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다윗은 너무나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입니다.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본인 손에 들려서 야전사령관 요압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최일선에 나가 싸우다가 우리아 장군만 남기고 후퇴해서 우리아가 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 마음속에도 다윗과 같은 심성이 다 있습니다. 저도 설교 준비를 하며 제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니 저도 다윗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 모습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니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너무 발달해서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어요. 교회입구에 CC TV 같은 것이 설치되어서 어느 집사님이 교회 들어오면 목사님 방의 모니터에 그 집사님의 1주일 동안의 생각과 행동이 다 보이고, 그런 기계를 집에 설치해놓으면 남편이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오며 아내를 위해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오는데, 모니터에는 딴 데 들렀다오는 것이 보인다면 어떨까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신앙의 시초와 인생의 시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생깁니다. 국가의 부정부패 위원회 등등 다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계획대로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아가 궁 앞으로 수송 되어 왔을 때, 다윗이 뛰어나가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대가 짐과 국가를 위해 이렇게 전사하였도다.” 그리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자기 시나리오대로 들어맞았다고 했겠지요. 이런 사람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질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 짓기 전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도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여기 우리의 복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공부하거나 설교할 때 그 인물을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3500년 전에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다윗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윗이라는 한 인간을 어떻게 구하시고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사랑으로 책망하셨는지 그 하나님은 아직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운전할 때 제일 속상한 것이 한국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순경 아닌 순경 역할을 하다가 매 맞을 뻔도 했습니다. 특히 저를 제일 괴롭힌 것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무슨 교회’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들이 자기 멋대로 다니는 것입니다. 택시 기사들은 직진하는 척 하면서 슬쩍 끼어들어 좌회전을 합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제가 속으로 택시기사를 많이 미워하고 욕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백미러로 저를 보더니 제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새치기를 해서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저를 내려놓았어요. 그날은 택시기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그날 저녁, 하루를 정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그 날 제 마음에 품었던 것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임택권, 아직 멀었구나.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교회 밖에 나가보지 않은, 외형적으로는 A 클래스요, 목사가 된지 벌써 40년인데 내 중심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좋아 보이고, 숨은 줄 알았던 나,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 움직이는구나. 아직 멀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저는 후닥닥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구제불능입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언지 아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저희들은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그 두려움과 함께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냥 적당히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죄를 지은 후 귀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죄인입니다. 그것도 살인죄입니다. 기묘한 간접살인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살인과 관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나 바울도 그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받은 복 중의 하나는 바른 소리를 하는 선지자 나단이 옆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단이 옆에서 바른 소리를 할 때 왕이 “그렇습니까?”하고 무릎을 꿇고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나단 같은 사람을 두려하지 않습니다. 만약 저에게 대통령이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만해지고 망합니다. 반드시 브레이크 거는 사람이 있어야 되요. 자동차 부속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브레이크입니다. 시동이 안 걸리면 차가 안가니까 사고 날 일이 없지요. 부인이 훌륭한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은 보통 카운터 파트를 싫어합니다. 얼마 전 미국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꼭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그 기도가 그렇게 감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표기도를 하는 분이 이라크전에서 속히 이기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미국 국민이 우리 힘으로만 이겼다 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아들 성공시켜주옵소서. 그러나 성공한 다음 내 힘으로만 성공했다고 하지 말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부모들의 기도여야 될 것입니다. 유능과 전능의 두 낱말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자녀들이 모두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전능하지는 못합니다. 유능과 전능은 다릅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전능한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우리가 유능할 수는 있으되 전능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돈 많다고 해서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과 평안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좀 궁하지만 그래서 사는 것이 편안하지는 않지만 마음에 평안을 가진 분도 많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 벌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담 쌓고 철망 감는 것이더군요. 돈이 있어서 편안하고 마음이 평안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둘이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교인이 추구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받고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합니다. 유명한 회개의 시(詩)입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저,” ‘분명히’라는 뜻입니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죄 지은 결과를 안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붙잡고 주님 의지해야 됩니다. 계장으로 있다가 과장으로 승진하니까 과장 자리에 죄가 먼저 가 앉아있어요. 항상 죄가 먼저 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방을 보아도 우리를 항상 유혹하고 이끌어갈 죄가 앞에 있습니다.

시편 51편 4절 말씀을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이 ‘만’자는 한글 중에 참 멋있는 토씨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말씀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자 한자 잘 살펴야 합니다. 왕은 죄가 없습니다. 왕은 무치(無恥)입니다. 왕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왕은 남의 부인 데리고 살면 그만입니다. 왕이 살인한 것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왕정시대입니다. 가령 제가 다윗과 같은 죄를 지었다면 이렇게 자백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 부인의 남편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훌륭한 것은 당신도 상전이 있다고 믿었어요. 왕이 자기가 용서받아야 할 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참 멋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은 모든 인간의 행복과 축복은 하나님의 죄사함을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헛된 것입니다. 5절에는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논리학 시험 한 번 칠까요? 사과가 열리니까 사과나무입니까? 사과나무니까 사과가 열립니까? 논리적으로는 사과나무니까 사과가 열리지요. 사과가 열리니까 사과나무라면 어느 해 사과가 안 열리면 사과나무가 아니라는 것이 되지요. 두 번째 질문, 내가 죄인이니까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지으니까 죄인입니까? 네, 죄인이니까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제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았어요. 이것이 동양 사람들의 설문조사 할 때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저도 통계학을 공부해보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상대가 무엇을 질문하든 자기 원하는 것을 그대로 답변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상대가 기뻐하는 것으로 답을 해줍니다.

어떤 분은 대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 지난 1주일 동안 죄지은 것이 있거든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죄 지은 것이 있거든 용서해달라면 죄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 모두 성경을 몰라서 그렀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본성이 죄악성(罪惡性)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죄를 행동으로 짓기 전에 죄악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이것을 ‘본질성’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학원의 종류나 수가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인데 제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사기 치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사기 잘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울 필요 없이 본성이 그렇습니다. 거짓말, 배워서 합니까? 너무 잘 나와요. 내가 이기적이 되는 것, 그것 공부합니까?

인간의 고민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태어난 다음에 내가 행동으로 죄를 지었으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찬송가 가사 가운데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하는 가사가 있겠습니까. 내 결심으로 하려고 하는데 결심하는 내가 죄인입니다. 우리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아닌 어떤 분이 나를 붙잡아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 분이 주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셔서 그 분에게 내 생의 주도권을 조금씩 양보하면서 내 영적인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죄인임을 먼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해하는 것은 껍질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유학생의 보호자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자녀들 유학 보내면 공부 잘 하려니 생각하시지요? 아닙니다. 우리 유학생들 문제 많습니다. 정신질환자가 많습니다. 제가 보호자로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환자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는 환자가 아니다. 병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치료를 잘 할 수 없습니다. 환자가 아니니까 주는 약을 잘 안 먹어요. 정신질환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투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에다 섞거나 물에 타서 먹여서 치료를 하면 정상이 되었으니까 데리고 가라고 저에게 연락이 옵니다. 퇴원할 때 어떻게 되면 정상인 줄 아세요? 아, 나는 병이 있구나. 나는 치료를 받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인정하면 정상입니다. 그러면 퇴원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예수님 믿지 않는 교육계통의 높은 사람들 앞에서 하면서 “여러분, 죄송하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굉장히 싫어해요.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아니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부터 신앙이 성장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뭐 합니까? 내가 환자가 아니라면 신약을 준다고 먹겠습니까, 구약을 준다고 먹겠습니까? 안 먹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능은 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전능한 줄 알아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에는 죄인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죄인으로 꽉 찼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무엇으로 인연이 되었습니까? 내가 공로가 있어서 인연을 맺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잘 생겨서? 내 학벌 때문에?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연 맺은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죄 밖에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이 죄 문제 해결이 하나님께 마음이 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 죄인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두려운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찬송으로 변하고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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