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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영화로신 주 예수의 14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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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로신 주 예수의 142장 ♬
          눅 23:32-38,2004.04.04.늘찬양교회


    142장 '영화로신 주 예수의' 찬송은 '보배로운 갈보리'란 제목으로 합동찬송가에 소개되었으나 후에 새찬송가 231장에 ' 내 주 예수 갈보리산 십자가에"라는 긴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이어 통일찬송가 142장에서는 '영화로신 주 예수의'이름으로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1874년경에 달우드 (W.M'K.Darwod)목사가 작시한 찬송으로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회상하며, 그 언덕이 주는 의미와 축복을 명상케 하는 찬송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민을 죄와 죽음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홀로 지신 보혈의 십자가, 영화로신 십자가로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드리기만 하면 나의 몸과 마음까지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지신 구주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의 몸을 주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절  영화로신 주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세상 부귀 모든 영화 분토에도 못 비기리
          오 갈보리 오 갈보리 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1절 세상 부귀영화 모든 분토(糞土)에도 못 비길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하나뿐인 생명을 내어주신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합시다.

    인간의 생(生)이 얼마나 짧으며 얼마나 불확실한 존재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아무리 선한 사람도 그 생명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부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도 전도서 1장 2절에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의 지혜로움도 솔로몬 왕의 위대함과 선함도 솔로몬의 속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날들은 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같습니다. 즉 땅 위에 자라나서 곧 시들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풀과 같은 것입니다(사 40:6, 7 참조). 인간은 생애 최고시기에 있어서도 단지 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번창하고 유쾌한 것 같으나, 기껏해야 풀과 약간 구별되는 곧 시들어 버리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정원의 꽃은 주로 더 좋게 선택될 것이며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곧 시들어 버릴 뿐만 아니라 뜨거운 광풍이나 추운 돌풍이 지나고 나면 꽃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리하여 그 꽃이 어떤 꽃이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젊었을 때는 잘 나가는 것 같았으나 늙으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다. 더욱이 갈 때는 모두다 빈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1:9-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 부귀 영화나 인간의 생명도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릴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다 살면 훗날 솔로몬 왕 보다더 큰 후회와 낙심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갈보리 골고다 언덕을 생각하며 영화로우신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믿음 안에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이유는 골고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구원의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으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승리의 영광이 보장된 길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처참한 형벌이므로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 영광의 길 갈보리 언덕길로 저와 여러분을 예수님께서 초청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잠깐 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서만 살아가지 말고 영원히 쇠하지 아니할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 안에 복음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절  구주께서 죽으실 때 성전 휘장 찢어지어
          구원의 길 여시고서 천국 기쁨 주셨도다
          오 갈보리 오 갈보리 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2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천국의 기쁨을 얻게 하셨으니 갈보리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해 주시기 위하여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넘어지며 엎어지며 골고다 산을 올라가셔서 양발 양손에 굵은 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리우실 때, 피를 다 쏟으시고 물까지 다 흘리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며 운명 하셨습니다. 이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성소와 성소사이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의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영적 비밀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몸이 찢기어진 슬픔을 의미합니다.
옛부터 슬플 때는 옷을 찢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전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몸이 찢기어 죽으신 사실에 대한 지극한 슬픔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해도 빛을 잃고 땅도 슬퍼 진동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수없이 많은 매를 맞으시고, 머리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조롱하기 위하여 탱자나무 같은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웠기 때문에 찔린 자국마다 피가 쏟아져 내렸고 양발 양손에 못 박힌 자국마다 선지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마지막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에는 피가 다 쏟아지고 물까지 나왔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 찢기어진 슬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만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던 지성소에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는 다 들어갈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 규례가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만 믿고 나아가면 누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천국의 고속도로가 열린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화해의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휘장의 찢어짐이 어느 한쪽 귀퉁이만을 찢은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전부를 찢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도라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도적놈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창녀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으면 천국에 못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무너졌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해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16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소에서 지성소를 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뜰에서 멀리 바라보며 기도하는 이방인이 있었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피를 가지고 들어가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멀리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오면 누구나 기도할 수 있고 지존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과 직통전화를 연결하여 교통하는 것 보다 더 큰 특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몸이 성소이긴 하지만 곧 무너지는 성소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몸이라는 성소를 무너뜨리는 이유는 하늘 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최후의 영원한 성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왕 노릇할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는 축복이 길이 열렸습니다.
(사35:10)


      3절  구주 예수 갈보리에 흘린 피와 그 물로써
          나의 몸과 영혼까지 구속하여 주셨도다
          오 갈보리 오 갈보리 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3절 갈보리 언덕에서 흘리신 피와 물은 나의 몸과 영혼까지 구속하는 능력의 피 보배로운 보혈의 피임을 소리 높여 찬양합시다.

갈보리(calvary)는 '해골' 이라는 뜻의 라틴어로서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언덕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이신 곳입니다. 사실 갈보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해 비교적 무지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난의 기록 속에서 아무런 영광도, 아름다움도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그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던 일이었다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냥 듣기 껄끄러운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신당하여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신 것부터 시작해서, 부당한 재판에 의해 죄인으로 몰리시고, 사람들에게 침 뱉음과 채찍질 그리고 구타를 당하시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이 저항도 불평도 않으시면서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시고, 결국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시며 두 강도와 함께 갈보리에 세워지신 것, 그리고 그분의 옆구리가 창에 뚫리고 무지한 인간들의 조롱을 당하시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벌거벗겨진 채로 피를 흘리신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두고두고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서에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 아닙니다. 사복음서에 어떤 한 사건이 네 번 모두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거기다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반복되는 경우는 이 십자가 사건이 구원사역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이보다 중요한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받으신 고난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내려진 채찍질은 우리를 치유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고난밖에 없었습니다. 이 갈보리의 사건은 우리의 영원을 위한 희생제 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지도 않으셨다면, 또 그분의 의로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그 틈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분의 자유의지를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에게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갈보리에 올라가셔서 자신이 계획하신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로 천사들의 군대를 불러올 수도 있었고, 빌라도와 헤롯의 잔당을 와해시키실 수도 있었으며, 그분의 모든 원수들을 돌풍에 휘날리는 지푸라기처럼 순식간에 흩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엔 오로지 죄인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흘려서 죄인들과 깨끗지 못한 자들을 위한 생명 샘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모든 일들은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주제가 조금이라도 언짢거나 마음에 담기 껄끄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는 그 속에서 지혜와 능력, 평안과 희망,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 또 위안과 위로를 발견합니다. 십자가에 눈을 고정시키면 시킬 수록,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더 확연하게 인식되어옵니다. 제 사고의 뜰에 십자가를 오래 세워 두고 있으면 있을 수록, 저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됩니다.


      4절  구주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으니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 몸 주께 드립니다
          오 갈보리 오 갈보리 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4절 「골고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의 축복을 받았으니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 몸 주님께 드립니다.」는 서원의 찬양입니다.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말고 그분을 위하여 살리라는 사랑의 권고를 듣습니다. 저는 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고귀한 값으로 팔린 존재입니다. 제 몸과 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엄숙한 의무에 묶여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저는 갈보리에서 발견합니다. 저의 몸과 영은 저의 것이 아닌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깨끗하게 정화 시키셨고, 나를 선한 일에 진력하는 독특한 백성들 속에 끼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지고 나무 위에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죄에는 죽었고 의에는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요, 신앙의 푯대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믿고, 십자가만 자랑하며,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나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 물질, 건강, 지식, 명예, 권세, 좋은 가족 등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는데 이 귀한 것들을 우리의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값있게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영혼을 주인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 때 우리는 결코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우리 모두 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갈보리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증거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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