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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 그리고 더 큰 기쁨(눅 10: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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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그리고 더 큰 기쁨(누가복음  10:17-20)

국내 오페라 공연장에 2천만 원짜리 입장권이 등장했습니다. 한 장을 사면 두 명이 쓸 수 있으니 일인당 1천만 원인 셈이지만 어떻든 한 장에 2천만 원입니다. 8석, 그러니까 4장이 2천만 원인데, 2개가 매진되고, 1천만 원짜리 입장권이 2개, 그러니까 4석이 예매를 마쳤답니다. 물론 오페라 공연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대단한 서비스를 받기는 하지만, 어떻든 2천만 원짜리 입장권입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 정도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합니다.
1954년 인간의 신체는 4분 이내에 1마일 (1.6km)을 달릴 수 없다고 말한 의학보고가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인체는 그만큼의 압력을 견디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54년 같은 해에, 로저 베니스티(Roger Bannister)라는 젊은 의학도가 4분 이내에 1마일을 주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한다하는 달리기 선수라면, 4분 이내에 1마일 달리는 것은 보통이 되었습니다.

1900년 올림픽 대회에서 어빙 백스티(Irving Baxter)는 높이뛰기에서 6피트 2인치 (1.889m)룰 기록합니다. 그때 사람은 7피트는 불가능 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7피트를 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즈베리(Fosbury)라는 한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높이뛰기 할 때 발이 아니라 머리 쪽을 뒤로 하여 먼저 넘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가 이미 비정통적인 새로운 시도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비평가들은 포즈베리가 머리 쪽으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는 것으로 보고 그의 방법을 “포즈베리 엉덩방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으로 7피트를 넘었습니다. 최근 동독 선수는 ‘포즈베리 엉덩방아’ 방법으로 7피트 8.75인치 (2.4m)를 기록 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다 이 방법으로 뛰어 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은 변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것 아닙니다. 작년 이 맘 때를 돌아다보십시오.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한 발 내디딜 때 열, 스물, 서른으로 앞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때로가 좋사오니” 아니면 “그 때가 참 좋았는데” 하는 생각으로 산다면, 결국은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따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2천만 원짜리가 아니라 단 돈 몇 만 원짜리 오페라도 구경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슬그머니 화가 나는 겁니다. 누구는 2천만 원짜리 오페라를 보는데 난 이게 뭔가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2천만 원짜리 오페라를 보면 흡족하겠습니까? 만족 할 수 있습니까? 슬그머니 화가 날 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까? 세상이 변화니까 나도 변해야 하겠지만, 세상이 변하는 만큼 내가 변한다고 더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 같습니까?

속회 때 기도제목을 나눕니다. 어느 분이, 반석 같은 믿음을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 그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어떤 경우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태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바로 그런 믿음이 반석 같은 믿음 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늘 흔들리잖아요. 늘 흔들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반석 같은 믿음입니까?
속회 때, 어느 성도님이 저에게 “목사님은 신앙이 흔들린 적 없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당연히? 있지요
그건 저뿐만 아닙니다.
존 웨슬리. 그분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을 다닐 때 홀리클럽이라는 클럽을 조직하며 말씀공부, 기도회 등 신앙 훈련을 하셨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선교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엄청 힘들어하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84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의 한 집회에서 그분은 뜨거운 은혜를 경험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 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구원이다”라는 이 분명한 확신 입니다. 그리고도 숫한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슴 속에 있는 구원의 확신은 그분을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 한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데 한편으로는 육신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자신을 봅니다. 선을 행하라는 그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갈등에서의 외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이것이 때로 흔들리는 그 분들의 신앙, 그분들의 삶을 지탱케 해주는 뿌리는 기둥이었던 겁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설령 흔들린다 하더라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반석 같은 믿음”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정말 여러분의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살맛나게 만들어 줍니까?
2천만 원짜리 오페라를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까?
복권 1등에 당첨된다면 그래서 돈 봄 펑펑 쓰다가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까?
어느 교수가 신바람, 신바람 했는데 어떻게 하면 신바람 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돌아 보십시오.
“이것이 내 기쁨이다” 그런 것 있습니까?
“이것이 내 행복이다” 그런 것 있습니까?
“이것이 내 삶의 의미다” 그런 것 있습니까?
“이것 잃어버린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그런 것 있습니까?
과연 그것이 무엇입니까? 찾아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70명의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전대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에게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리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그러나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명의 사람들이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둘씩 짝을 지어 예수님께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보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거기 10장 9절에 보면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신 것을 보면, 여기 귀신들린 자들은 병자들, 그것도 어떤 의술이나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병자들인데, 70명의 사람들이 나가서 그들을 고쳤다는 겁니다. 그들이 가서 병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만 대면, 그들이 나았다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나가서 병든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깨끗케 되어라” 그랬더니 그 병자가 깨끗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거라.” 그랬더니 병으로 인해 일어서 본적도 없는 사람이 일어난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 보세요. 일어납니다. 병이 낫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그 가슴이 얼마나 쿵쿵거렸겠어요. 얼마나 신나겠어요.
이 기쁨을 예수님은 거기 70명에게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도 주셨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라 죄를 복종케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죄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항복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사도바울과 그 일행이 기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가면서 소리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여자가 여러 날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데, 거기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문 곁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이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기쁨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신 줄 분명히 믿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어요. 만약 이렇게 성령이 임재 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병자 고치거나 귀신 쫓아내는 일도 없었겠지만, 만약 그런 일 일어나면 제자들은 자기의 능력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 없이도 되는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가장 큰 문제 입니다. “예수 없이도 되는구나!” 이것이 불신앙 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그렇게 삽니다. “예수 없이도 되는구나.”를 경험하며 삽니다. 그랬잖아요.
기도하지 않아도 되더라고요. 하루 종일 말씀 한 구절 생각 없이 살았는데도 그런데도 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굳이 예수 믿어야 할 까닭이 없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저 믿으면 천국 간다니, 멋 훗날 죽어서 천국 가기위한 주일 낮 한번 예배드리는 거고, 그 외에는 예수 없이도 되는 거니까 내 삶 내가 사는 겁니다.
70명의 사람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 합니다.” 누구에게 복종했다고 합니까? “우리에게” 사실, 귀신들은 누구에게 복종한 겁니까? “예수님의 이름 입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은 하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귀신을 복종케 하기 위한 주술, 주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1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그에게서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귀신 축출가란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스와게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버리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로 사용 되었습니다.
거기 11절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을 행하셨다.” 그렇기에 귀신이 복종한 것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절에도 보면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자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그렇게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 70명의 사람들이 구신을 복종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거, 예수 없이도 사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사랑은 죽어서 천국 갈 때만 필요한거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함께하며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70명의 사람들은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도 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복종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 때문이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도 예수님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더 이상 “예수 없어도 되는구나.” 하는 착각에서 살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 입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나라.”
보세요. 분명히 예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이름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정말 그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는 겁니다.
70명의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굴복 시켰습니다. 그런 엄청난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 때문에, 귀신이 내게 복종 했다는 그것 자체의 기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기쁨은 자신들이 귀신을 굴복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주신 예수님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백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이어야 하는 겁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이 나병에서 고침 받은 것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순종해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뭔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준다는 것도 마다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나아만을 찾아갔습니다.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다가 자기 집에 감추었습니다. 그로 인해 게하시는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자기의 영광을 챙길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귀신 쫓는 능력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마치 내가 한 것처럼 하니까 그게 불법인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분명 예수님께서 70명의 사람에게 주었던 권능을 여러분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큰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그것 역시 여러분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신 주님 때문에 더욱 기뻐하십시오.
전, 늘 이 앞마당에서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내가 이 교회를 지었다는 작은 기쁨과 이런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은혜와 모든 것을 주신 예수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이런 일 이루어 주셨다는 큰 기쁨이 곧 저의 기쁨입니다.
“아! 내가 귀신을 항복시켰다.”그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아! 주님의 능력은 대단하구나. 이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이 구원자이시구나. 나의 주님이시구나!”하는 주님 때문에 갖는 더 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0절에 정말 기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귀신을 굴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항복시켰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구원은 뭔가 큰 권능을 행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권능은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 입니다.
하늘의 기록은 그가 무슨 권능을 행하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의 기록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그리고 어떻게 그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느냐에 있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만원입니다. 한 달에 백만 원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만원입니다. 그래서 한달에 천만 원 버는 사람이 십일조 반으로 줄여서 냈습니다. 그래도 50만원이니 10만원 낸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산은 얼마냐 하는 액수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 기준을 둡니다. “저 사람이 저 정도 하니까 난 이만하며 되겠구나.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보세요. 10만원 보다야 50만원이 많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는 그 사람이 50만원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불법을 행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70명의 사람들. 그들의 기쁨은 환경에 있었습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복종하더라는 사건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기쁨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좋은 환경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환경 때문에 어떤 사건 때문에 기뻐하는 일이 많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좋아야 행복한거 아닙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돌이 떡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가 밥만을 찾다보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으면 모든 것을 다 갖게 됩니다. 그 모든 것 안에는 물론 밥도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얻고자 하니까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을 얻고자 하면 세상의 것도 얻게 됩니다.
행복한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행복한 가정 역시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행복한 사회나 나라도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남북 전쟁으로 동족상잔의 피가 강을 이루는 비극의 한복판에서,  A. 링컨은 1863년 4월 30일을 전 국민 금식기도의 날로 정하자고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연설을 링컨의 2대 연설이라고 하는데,
“미국의 비극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께 돌아가 그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때 인간 사회의 얽힌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있다. 남북전쟁을 위시한 인간 역사 속에 일어나는 비극들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 말씀인 성서를 떠났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회개는 종교적인 것이고 행복은 세속적인 것을 분리시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행복은 회개,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것 때문에 기뻐하기 보다는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새벽 요한이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를 자기 아내 삼을 것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아내였던, 그러나 지금은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었습니다. 결국 헤로디아의 꾀로 세례요한이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은 헤로디아는 “이제야 요한을 죽였구나.” 기뻐했을 겁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기쁨과 설사 자기 목을 잘려 나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세례요한의 기쁨은 그 품질이 전혀 다른 기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헤로디아의 기쁨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죄입니다.
바벨로의 벨사살 왕이 연회를 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금, 은그릇에 음식을 담고 술은 따라서 일천 귀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맞은 편 벽에 “베네 베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이 써졌습니다. 벨사살 왕은 먹고 마시고 그것이 즐거움이요 기쁨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저울에 달아보니 근량이 모자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를 폐위시킨다고 하는 불합격 판정의 글을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벨사살의 기쁨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인정받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사나이는 이상한 취미를 가졌습니다.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하는 취미입니다. 3년 뒤 그의 작은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찼습니다. 교회 친구들은 이렇게 되면 소방법에 위반이 된다고 해서 모두 동원되어 세 트럭분의 쓰레기를 치웠고 말끔히 청소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그 이튿날부터 다시 고물 수집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 웃을 수 없어요. 우리도 평생을 살면서 많은 것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나이의 고물 수집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냉정하게 생각할 일입니다.

“주님, 주님이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이 기쁨, 결코 작은 기쁨 아닙니다. 이 기쁨 역시 예수 이름으로 사는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른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 할 것이다.” 믿습니까? 그러면 그 기쁨은 여러분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 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세상은 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기쁨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기쁨이요, 이 기쁨이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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