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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롬 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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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본 문 로마서 3장 21~26절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위인들 그리고 영웅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삶으로 역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삶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다른 위인들과 영웅들처럼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보다 죽음으로 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삶보다 죽음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계십니다.

지난 4월 2일 개봉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는 미국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3월 26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텍사스 주 남부에 숨어 살던 한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 경찰에 자수했다는 것입니다.
21살 난 댄 리치라는 남자는 임신 중인 여자친구 애슐리 윌슨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지난 1월 7일 노끈으로 목을 감아 질식사시켰다는 것입니다. 목매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뒤에 숨어 지내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면서 죽으시는 그 장면을 보고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스스로 경찰서에 나와 자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놓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 역사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까요? 그 죽음은 특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해 오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 죽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맞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하시고자 하셨나?” 잘못하면 진부한 질문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은 이미 주일학교 때부터 익히 듣고 잘 안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지고 그 답을 머리로 가슴으로 손과 발로 다시금 깊이 찾게 될 때 고난주간을 경건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읍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길을 여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놀라운 상황 변화를 나타내줍니다. 지금 이전의 상황과 지금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바뀐 상태를 말해줍니다. 오랜 가뭄 끝에 단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캄캄한 어둠 끝에 여명이 밝았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고속철이 개통되어 교통 흐름의 대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이제는”입니다.

그러면 본문에는 도대체 어떤 상황 변화가 생겼기에 “이제는” 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먼저 변화 이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1:18-3:20은 긴 논증을 통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명처럼 받들던 율법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지금의 마포대교가 없었습니다. 마포가 버스나 그 옛날 전차의 종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포종점이라는 노래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저 강 건너 여의도에는 공군에서 운용하던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큰 형님이 거기서 군복무를 하셨는데 늘 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 때 마포대교가 놓였습니다. 강이 가로막아 마포에서 여의도로 영등포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마포에서 여의도로 영등포로 건너갈 수 있게 됐습니다. 여의도에 비행장이 사라지고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어 국회의사당도 생기고 서울의 맨하탄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마포 대교가 개통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잔치를 벌이고 좋아했습니다. 길이 열리며 놀라운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가로막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길을 여신 것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 14: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 리치라는 도망자는 길이 없었습니다. 애인을 살해하고 일단 법의 처벌은 피해 도망은 쳤으나 그 다음 길이 없었습니다. 특히 무거운 죄책감을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양심의 고발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준엄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여신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제는”이라는 말로 열린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기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왜 길을 여신 것이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20절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달려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같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덕을 쌓으면 그것이 지은 죄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은 죄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하면 지은 죄를 덮고 천국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도, 심지어 정통파 유대교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영국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해스팅스 전투에서 정복자 윌리엄이 당시 영국와 해롤드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무고한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정복자 윌리엄은 양심의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죄를 씻는 의미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특히 전투 현장에 교회를 세우면서 해롤드 왕이 죽은 그 자리에 가장 높은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 자신의 죄를 보상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느냐 입니다. 한 마디로 "No!"입니다. “Never!"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해도, 아무리 공을 세우고 덕을 쌓아도 우리가 지은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100가지 교통법규를 다 잘 지켜도 철저하게 준수해도 한 가지 어기면 스티커를 발부받습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안 보는 데서도 다 잘 지켜왔다고 주장하고 증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칭찬받을 지라도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죄대로 따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유대교가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다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할 특별한 선물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의 의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저지른 죄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기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수영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합니다. 한강을 건너갈 정도가 못됩니다. 그런데 수영선수들은 한강을 쉽게 왕복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맥주병처럼 들어가자마자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인천 앞바다에서 중국으로 수영해서 건널 수는 없습니다. 중국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합니다.

사람의 의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도, 남달리 많은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아도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 가고자 할 때 배를 타는 것처럼 우리의 의가 아닌 다른 의 곧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면 우리 사람의 의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롭게 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내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의로 하나님 앞에 죄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셨던 것처럼 오늘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민 21장을 보면 주목할만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죽을 고생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돔 족속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멀리 동쪽으로 우회해서 가야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모압과 암몬 그리고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민 21:4를 보면 저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밖의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자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을 때 저들이 가진 것 다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족속들에게 가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를 드린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보자 정말 그들이 나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이 예수의 피로 너희들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그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되고 그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놋뱀을 본다고 뱀의 독이 치료가 되겠느냐고 따지면 그 독으로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해결할 수 있느냐가 따지면 죄로 심판받고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믿고 놋뱀을 쳐다볼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가 저들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의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재작년에 미국 뉴욕에 갔을 때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에 갔었습니다. 그곳에 철골로 십자가가 우뚝 세워져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이 무니지면서 철 구조물 일부분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땅에 떨어졌는데 꼿꼿하게 땅에 그대로 박혔다는 것입니다. 시신을 수습하던 구조대원들이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남은 자들에게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현대 문명의 한 복판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준엄한 음성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직 길은 십자가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가?” 그 의미를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주간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이제 십자가를 지고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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