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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눅 22:37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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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22 : 37 - 46
(4월 4일 주일 설교 말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핵심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원하시는 뜻을 붙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실 때마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선하심의 실행에 있다."라고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그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또한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임할 고통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 잔을 옮겨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고통을 벗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육적인 고통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고난의 잔을 옮겨 달라고 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하면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 아버지의 원대로 되고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잔을 치워 달라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잔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간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이 되어서 사자가 하늘로부터 힘을 도왔습니다(눅 22:43).
예수님의 이 기도는

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기초하는 기도입니다.

본문 22장 42절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한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변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을 정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과 그것을 이루는 수단을 함께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작정하시고 그것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36장 37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맞추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서책들을 보다가 그가 예언한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의 의미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한이 다 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다니엘 9장 2-3절에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에게 기도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변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장 1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르짖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변한다고 한다면 말하기도 끔찍스럽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종으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고 그 필요로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까지 주셔서 그것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마침내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응답 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 그 자체가 그의 영원한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바른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데 사용하시는 방편들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Ⅱ.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적용에 기초 하는 기도입니다.

본문 22장 42절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사야 53장 12절을 상기시키면서 누가복음 22장 37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시키는 것이 억울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원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소원에 더욱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서 그의 힘을 도와주었습니다(눅 22:43).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시키고 나면 정반대의 응답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면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소원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이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에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고쳐달라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다급한 보고를 받고도 그곳에 이틀을 더 유했습니다(요 11:6).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왔을 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습니다(요 11:14).
그러나 그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은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요 11:11). 결국 나사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호령을 받고 무덤에서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걸어 나오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소원했습니다. 사단의 사자 같은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하였지만 그 가시가 없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고백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9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소원은 주님의 소원에 복종시키면서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정말 순수하게 우리의 필요한 소원들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도록 내편에서 허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적용의 결과 필연적인 성취에 기초한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22장 44절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감안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이미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밤은 제자들이 잠 잘 수 있도록 평온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밤이었습니다.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결국 그들의 잠이 심각한 좌절의 늪으로 치달을 줄이야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호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 싶었습니다. 기도는 육신의 연약과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기도는 결국 우리의 필요한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가 없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 세상에 될 모든 것들을 다 작정해 두셨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했는데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태복음 6장 8절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데 대해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하는 메뉴들의 정보를 하나님께 제공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하는 메뉴가 그에게 고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자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은 대단히 구체적이었습니다.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32장 6절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라고 했습니다. 밤낮 부르짖는 원한 맺힌 끈질긴 기도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눅 18:7-8).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약 5:15-16). 구하는 이마다 얻는다고 했습니다(마 7:8).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마 21:22).
요한복음 15장 7절에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고 했습니다(약 1:5).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마 21:13).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롬 12:12; 골 4:2).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약 4:3). 그러나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요일 5:14).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꿈에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을 때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 12-13절에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한나를 성태(成胎)치 못하도록 했습니다(삼상 1:5). 한나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를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한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7절에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상 1장 27절에 말하기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드리고 세 아들과 두 딸을 다시 얻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미 확실히 해 두고 다만 하나님을 전능하신 심부름꾼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소원이 절대화되어야 하고 우리의 소원은 상대화시켜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은 또한 이루어 주실 줄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의 몸을 입었습니다. 그의 육체의 연약이 우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참으로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가진 인성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연약입니다. 만약 그가 인성만 입으시고 신성과는 무관하다고 하면 고난의 쓴잔을 마시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하나님의 인성이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뜻 즉, 육신의 뜻을 쳐서 복종시키도록 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였고 율법의 완성이었고 택자구원의 완성이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만을 기도의 목표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샤머니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참으로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승리한 기도와 실패한 기도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승리한 기도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한 왕도를 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실패한 기도는 있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기도 뒤에는 반드시 사탄이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원천봉쇄 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입법부가 되고 하나님을 행정부로 만드는 기도는 삼가야 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은 기독교의 사상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각과 소원이 절대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거침없이 일어나는 육신의 소욕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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