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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사랑으로 갚은 여인 (눅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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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사랑으로 갚은 여인 (눅 7:37)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서론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받았습니다.”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닫는 성도들은 드문 것 같습니다. 또한 유명하고 큰 교회 목사라 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바로 깨닫고 말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은혜의 교리는 마치 벽장 속에 있는 꿀단지 같고 보물을 항아리 속에 감추어 깊은 지하실에 묻어둔 것과 같아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겸손한 구도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오래 기도하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교리는 이미 개신교의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오직 은혜로 받는다(Sola Gratia)." 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개신교 신앙의 위대한 교리체계를 구축한 요한 칼빈 목사는 은혜의 교리를 잘 정리해서 어두운 마음을 비추는 등불처럼 성경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의 교리에 도전하고 비판합니다. 이렇게 백일천하에 공표된 진리를 수많은 학자와 목사들이 눈이 멀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을 고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당신이 메시아인지 밝히 말하시오” 라고 한 유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은혜의 역사를 그림처럼 볼 수 있는 스토리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세인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동네에는 죄인인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인이지만 직업은 소문난 창기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 앉아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로 닦아서 그 발에 입 맞추고 보물처럼 여기던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라면 저 여인이 누군지 알았을 것인데...’ 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 바리새인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것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다시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러므로 죄사함을 크게 받은 자가 나를 더 사랑하느니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라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스토리 가운데서 여인이 죽은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였는지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해방 받은 막달라 마리아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도 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로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겼던 여인이었지만 이 본문의 스토리와 마리아들의 스토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이는 성경에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긴 사건이 여러 번 나와 있는데 스토리마다 다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당시 유대인의 풍습은 집에 손님을 초대 했을 때 최고의 접대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겨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두세 번 나왔다고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본문에 나온 시몬이란 자는 우리나라의 이씨, 김씨와 같으므로 시몬이 아무리 많이 나왔어도 모두 다른 시몬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 마리아도 막달라 마리아도 아닙니다. 이 본문의 마리아는 이름도 성도 성경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삶 가운데 두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은혜’고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예루살렘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 우리 성도의 삶에 확연히 나타나는 영롱한 두개의 진주와 같습니다.

1. 여인이 받은 은혜

먼저 이 여인에게 나타난 은혜는 첫째 택함 받은 은혜입니다.
이 여인이 동네에 소문난 죄인이란 것은 창녀였음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50데나리온 빚을 졌지만 이 여인은 500데나리온 빚을 졌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여인이 큰 죄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리새인 시몬도 사람들이 볼 때 죄인이라 생각하지만 바리새인보다 열배나 죄가 컸으니 얼마나 더 큰 죄인이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존경받는 존재며 사회의 지도층이라 생각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주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주께로 가까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요한복음 6:4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 시편 65:4

  이 여인은 죄인이요 창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이 무슨 공로가 있어서 택함을 받았습니까? 공로가 있다면 동네 사람 타락시킨 공로밖에 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공로나 조건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고 싶으시다는 주권적인 뜻으로 여인이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장 15~16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는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여러분을 택하셨기 때문에 주께로 가까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고 주님을 믿게 된 것이고 주님을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진리를 놓치면 성경 전체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몇몇 신학자들은 주님의 주권적 은혜를 탁상공론으로 도전합니다. 교리적인 투쟁을 하려 합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를 할 때도 저는 이렇게 믿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택하신 것이며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악 가운데 방황하다 주를 믿게 되었다” 고 했더니 한 교수님이 저에게 교리적 논쟁을 하자고 했지만 그 논쟁은 2천년 동안 했기 때문에 교수님과 저는 테니스나 치자고 했습니다. 이 교리는 논쟁과 투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내가 무엇이 관대 이런 죄인을 이처럼 택하시고 주의 뜰에 거하게 하셨는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주께로 나오게 하셨는가?” 라고 생각하고 한없는 눈물을 흘려야 될 감격의 교리입니다.  저는 여러분 심령에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창세전부터 여러분을 택하셔서 주께로 나오게 하신 그 은혜를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기뻐하고 감격하십니까? 이 은혜가 심령 속에 터져 나올 때 오늘 이 본문의 여인처럼 동네 남자를 유혹하던 눈이라도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눈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여인에게 나타난 은혜는 택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택하셨으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변화 받은 은혜입니다.

  도덕성에 변화가 일어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본래 창녀였습니다. 자신도 죄에 빠졌고 남도 죄에 빠지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죄인을 거룩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환대하는 모습은 바리새인 시몬이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안주고 입 맞추는 인사도 없이 값싼 감람유도 머리에 붓지 아니하며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한다 하며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무슨 눈물입니까? “예수님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고 남도 죄에 빠뜨렸습니다. 제가 용서함을 어떻게 받겠습니까?” 하며 회개하는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머리털로 씻기며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뒤로 가서 발 곁에 서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입니까? 말 한마디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바리새인 시몬이 얼마나 눈총을 주었겠습니까? 하지만 온갖 모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자아를 다 깨뜨립니다. 완전히 깨뜨려버린 겸손과 용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 용기, 헌신, 겸손 이 모든 단어들이 이 여인의 진실한 눈물 속에 스며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추한 범죄를 생각하며 용서받고 싶은 마음에 울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다시 창기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다시 창기로 돌아갔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 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아무리 죄악에 빠져있다 해도 바뀔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바뀔 수 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 창기가 변하여 거룩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습니다. 제가 예수님 믿고 내 죄를 용서받고 싶습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할 때 그 눈물에 사람의 도덕성은 바뀔 수 있습니다.

  도덕은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도덕성의 뿌리부터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도덕성의 원천이요 근거입니다. 눈물 한 방울 없는 일만 마디 말보다 한마디 말없는 눈물이 사람을 바뀌게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말만하면서 선교 헌금도 드릴 줄 모르는 사람과 눈물로 값비싼 향유를 드린 이 여인의 삶과 비교할 때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도덕적으로 부패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 앞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이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셋째 은혜 위에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요 1:16

  은혜는 더 큰 은혜로 나아갑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서 사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 라고 직접 적인 선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은혜도 믿음이요, 직접적인 사죄의 말씀을 들은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확실한 말씀을 들었으므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직접적인 증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불러오는 것이 특징입니다. 마음속에 예수 믿는 믿음을 갖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얻는 은혜위에 은혜를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뿌리가 견고하지 못하므로 흔들립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 지옥가면 어쩌나 두려워합니다. 저는 스물여덟에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내 안에 임재 하셨다는 증거를 갖가지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루는 기독교 서점을 갔는데 그곳 주인 되시는 장로님과 그 친구분들의 대화가 내가 이렇게 봉사하다가 지옥을 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 믿은 지 한달된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해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지옥을 갈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마음에 은혜위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악이 많을지라도 또한 죄악과의 싸움에서 넘어져 쓰러질 때라도 우리는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시간상의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은혜위에 은혜를 받아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헌신하다보면 주께서 때로는 꿈으로, 성령으로 또는 성령체험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이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령님께서 택함 받은 영혼에 부어주시는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이 여인은 택함 받는 은혜도 받았고 변화 받는 은혜도 받았으며 은혜 위에 은혜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이 아무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이 이러한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거져 받았으니 은혜입니다. 이 여인이 노력해서 받았으면 업적에 따른 보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공로나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으니 나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고 내가 성령으로 구원의 확신을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감격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이 여인이 보인 사랑

  이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계명, 본분, 직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마태복음 22:37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것이 인간의 가장 최고의 본분입니다. 우리가 정치나 장사하는 것이 본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 우리에게 부업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첫째, 사죄 받은 은혜가 클수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용서받은 은혜가 클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식사 초대는 했지만 많이 사랑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50데나리온 빚진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시몬은 죄진 것이 있어도 50데나리온 밖에 죄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 여인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가 클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올라갔더니 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계단에 자신의 죄목들이 기록되어있는 계단이 있더랍니다. 베드로 사도가 백묵을 주면서 “올라가면서 자신의 죄를 체크하면서 올라가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올라가면서 자신의 죄목에 체크하면서 올라가는데 중간 쯤 갔는데 목사님이 내려오시더랍니다. “목사님, 어떻게 내려오십니까?” 했더니 목사님 말씀이 “백묵이 다 달아서 한개 더 얻으러 내려갑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확인이 안 된 이야기 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이런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백묵이 다 달도록 용서받은 죄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죄 받은 죄가 크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로마서 5:20


둘째, 구원받은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50절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나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있으니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사랑한 것은 냉랭한 사회적인 예의를 쫒아 사랑한 것이나 교회의 규약을 쫒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은혜가 원천이 되고 믿음이 중개자가 되고 사죄 받은 것이 감사와 동기가 되어 개인적으로 주님을 열열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할 때 바리새인 시몬처럼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길 때 반쯤 자고 있는 눈으로, 흐물흐물한 팔 다리로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는 손 애 봐주기로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아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생명이고 혈관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동맥경화가 걸리지 않고 잘 돌아갑니다.


결론

우리는 두개의 은방울, 하나는 은혜라는 은방울, 또 하나는 사랑이라는 은방울을 울려야겠습니다.  울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눈물을 낳고 사랑은 헌신을 낳습니다. 12월에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더 크게 깨달아지는 달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4:12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이 시대는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고 몸과 마음과 제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장래에 좋은 터를 쌓아 영생을 취하는 것이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1 -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는 12월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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