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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은총 (시 119: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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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은총
시119:65-72

이 시간에 “고난의 은총”이라는 제목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 인간은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 더 심각하고 처절한 질문은 인간에게 왜 고통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현실로 도전해 오는 문제이며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왜 인간에게 고난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편 기자를 통하여 고난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한 마디로 고난은 하나님이 내신 학교라는 것입니다.

1. 고난은 신앙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66-67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신앙의 학교라는 점입니다. 히5:8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배운 지식만이 내 심령 깊이 깨닫는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인생도 모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이 있습니다. 그 논쟁은 소개하지 않더라도 펠라기우스가 왜 잘못되고 어거스틴이 옳은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펠라기우스는 인생의 고난을 몰랐습니다. 그는 그저 순탄하게 편하게만 자라온 사람이었기에 인생이 무엇인지 고난이 무엇인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고난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학자요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 그것은 고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다. 성도들도 보면 대부분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또 고난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스왈더 샌더스 목사는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신음할 때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당신이 내 곁을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장애가 됩니다. 당신의 간호에 대해서 감사하지만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이 고통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기 원합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내 아내는 참으로 위대하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난 곳에서 신앙을 배우는 사람은 훌륭합니다.

2. 고난은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학교입니다.

69절에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교만한 자가 자기를 대적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교만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은 교만한 자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돈 벌면 교만, 조금만 더 배우면 교만, 인물이 좋아도 교만해져서 남을 멸시하고 천대하는데 고난 받고서야 겸손해집니다.

신앙의 최대의 경지는 겸손입니다. 사람이 끝까지 겸손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을 것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지 위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사코 우리를 겸손의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격을 연단하는 풀무라고 합니다. 풀무 속에서 쇠붙이가 녹을 때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수한 것만 남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도에 가면 풀무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풀무원에는 쇠를 녹여 제련하는 풀무의 그 정신에 따라 설립된 학교도 있고 농장도 있고 회사도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그 정신에 따라 참 신앙을 가진 학생들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또 좋은 식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풀무의 연단을 통해서 이 세상의 헛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빼내고 주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야곱이 참 신앙자가 되고,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탕자가 고난의 학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내가 성공할 때는 세상을 보았으나 내가 병상에 누워 잇을 때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겸손의 학교입니다.

3. 고난은 부지런을 가르치는 훈련의 학교입니다.

70절에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안에도 이런 지방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안일과 게으름의 마음입니다. 이 안일과 게으름이 신앙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도 이 게으름과 안일이 나를 대적하고 죽이려 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뜨거움을 버리고 적성에 맞게 적당히 모양만 멋있게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은혜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목장에서는 양들 사이에 염소를 한 마리씩 넣어 놓는 답니다. 그러면 양들은 정이 많아서 서로 뭉치면 속에 들어간 양은 죽는데 염소가 그 꼴을 못보고 머리로 받아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부지런한 신자로 만들어냅니다. 왜 나에게 어려움이 있는가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기에 그렇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히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열심 내야 합니다. 더 예배해야 합니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전도해야 합니다.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열심 내야 합니다.

사람의 몸도 머리는 시원해야 하지만 배는 뜨거울수록 좋답니다. 배가 차신 분들은 배를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낮에나 식후에는 물을 적게 마시고 찬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는 차듯이 말씀은 누구보다 냉철하면 좋고 그러나 신앙은 뜨거워야 합니다. 자꾸 신앙에 찬물 부으면 안 됩니다. 열심 없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달려가는 말에게 채찍이 왜 있습니까? 더 잘 달리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욥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케 하는 고난의 학교입니다.

4. 고난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학교입니다.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인격이나 위대한 작품은 다 고난의 산물입니다. 위대한 인물 치고 고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위대한 소설도 고난 가운데 쓰여 졌고, 베토벤의 “운명”이라든지 헨델의 “메시야” 등도 다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졌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배부르고 따뜻하면 위대한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야곱도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지요. 진주도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그 이물질로 인해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도 수천도의 고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솥단지의 구수한 슝늉도 타지지 않으면 나오지 않지요? 값비싼 향품도 모두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리켜 흔히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변장하고 찾아오니 축복인지 모르지만 귀한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난의 은총을 감사하고 이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십시다. 하나님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부지런을 배우고 회개를 배우고 온전함을 배우십시다. 사명을 배우십시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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