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 세계 (갈 2:15 ~ 21, 눅 23:39 ~ 43)

  • 잡초 잡초
  • 190
  • 0

첨부 1


십자가 세계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18: 26 ~ 32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짓다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대로 살며, 의를 행하면, 자기의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 깨닫고,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켰으니, 그는 반드시 살 것이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일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구나.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일하는 방법이 어찌 공평하지 않으냐? 너희가 하는 행실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2:15 ~ 21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죄인인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여 주심을 구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 앞에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 복음서 23:39 ~ 43

  예수와 함께 달린 죄수 가운데 한 죄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런 다음에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사순절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수난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양쪽에는 두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한쪽 강도는 낙원에 갔고, 다른 쪽 십자가를 진 강도는 멸망의 길을 갔다고 합니다. 셋 중에 하나는 빠지고, 둘만 낙원에 있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혹시 왼쪽에 있는 강도가 생각하듯,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까? 당신도 별 수 없군요.” 하는 그런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오른쪽 사람이 생각하듯, “당신은 죄도 없는데, 우리 때문에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는군요.” 그러고서 “오늘 당신은 하늘나라에 가실 것이지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하는 그런 고백의 십자가입니까? 어느 위치에서, 어떤 눈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십자가가 달리 보일 겁니다.

제가 페르시아에 있었던 전설 하나를, 과일에 관한 전설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과일이 제철이 없어서 아무 때나 출하되니까, 제철에만 나는 과일 이야기를 할 때면, 꼭 아주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필리핀이나 아라비아 쪽, 또 중동 쪽에 가보면 가장 맛있게 잘 먹는 과일 중에 하나가 망고입니다. 저도 망고가 시장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들 넷, 그러니까 왕자 넷을 둔 왕이 있었는데, 아들들이 하도 판단력이 없고 경솔해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망고나무를 살펴본 뒤에 보고서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첫째 아이를 불러서 망고나무를 살펴보고 와서 보고서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겨울철이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봄철에 망고나무를 보라고 보냈습니다. 셋째는 여름철, 넷째는 가을철에 보냈습니다. 그런 뒤에 왕이 네 아들을 다 불러 모아서 망고나무 보고회를 시작했습니다.

큰아들이 말합니다. 망고나무는 마치 불에 타버린 그루터기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겨울철에 망고나무를 본 보고입니다. 둘째는 봄에 갔기 때문에, 나무가 크고 멋있고 녹색으로 뒤덮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름에 간 셋째 아이는 망고나무가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마지막 가을철에 간 넷째 아이는 맛있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서 그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워서 가지가 늘어진 나무를 보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왕자 넷이서 보고하면서 서로 보고가 다른 것에 대해서 자기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너희 넷 다 옳다. 보고가 다른 것은 어느 철에 갔느냐 하는 차이 때문이다. 나무는 겨울철에 죽은 듯이 보이지만 결코 죽지 않았고, 봄에는 새싹이 났고, 여름에는 꽃이 피었고, 가을에는 열매를 주렁주렁 맺은 것이다.”

나무는 사시사철 이런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람한테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겨울을 살고 계시는지, 아니면 연두색 봄을 살고 계시는지, 아니면 잎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한 여름을 살고 계시는지, 혹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가을을 살고 계시는지, 여러분 스스로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똑같은 나무라 하더라도, 어느 철에 보느냐에 따라서 모습도 다르고 느낌도 달라집니다. 인간은 살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을 맞이하기도 하고, 암울한 겨울의 추위를 겪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나무한테 겨울철이 있듯이 인생에도 앙상한 겨울이 있습니다. ‘겨울 나그네’ 같은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오늘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겨울의 찬바람 가운데 선 십자가, 새싹이 돋는 봄의 십자가, 초록이 무성한 여름의 십자가, 열매 맺는 가을의 십자가!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보고 계십니까?

성경에서는 십자가가 세워진 곳을 갈보리 언덕이라고도 하고, 골고다 언덕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이 이렇게 다른 것은 번역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 보면 해골이 쌓인 곳, 해골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크라니온’(kranion)이라는 헬라어로 썼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헬라문화권에 속한 사람에게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고 굳이, 해골이라고 부르는 그곳, 그 언덕의 이름을 헬라말로 썼습니다.

그런데 크라니온 외에 우리한테 익숙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골고다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십자가가 세워진 곳, 해골이라는 그곳을 ‘골고다’라고 합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그중에서도 토속화된 아람어 명칭입니다.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사본 중에서 로마제국이 쓰던 언어, 라틴말로 번역한 것이 있습니다. ‘불가타’라고 부르는 사본인데요. 여기서는 해골이라는 뜻의 단어를 라틴말로 번역해서 ‘칼바리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다 보니 ‘갈보리’가 된 것입니다. 라틴말로 갈보리, 아람어 내지 히브리어로 골고다, 헬라어로 크라니온이라고 부른 이 언덕, 처형당한 사람들의 해골이 쌓인 그곳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해골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었는지는 모르나, 하여튼 해골들이 뒹굴고 음산한 죽음의 빛이 감도는 그곳에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좌우에는 제자들의 십자가가 아닌, 예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 강도들의 십자가 두 개가 서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꼭대기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세 나라 말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말하자면 유대사람들이 꿈꾸던 메시아, 정치적 해방자, 그리고 독립을 가져다 줄 사람, 그러나 실패한 혁명가, 예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부터 심문과 고문에 시달렸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손발에 못에 박히고 살이 찢기고 창에 찔리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며 죽어 가는데, 너무나 목이 말라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포도주에다가 쓸개를 타가지고 갖다 먹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신포도주는 요즘말로는 마취제 비슷한 효능이 있어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것을 먹였다고 합니다. 그런 기능도 있나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날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래서 목이 잔뜩 마른 사람에게는 잔인한 모독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겨우 준다는 것이 포도주, 그것도 쓸개를 담은 그런 포도주입니다. 죽으라는 말입니까? 살라는 말입니까? 끌려갈 때부터 당한 수난과 고통은 이제 십자가에서 극치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왼쪽의 강도가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메시아라면서 어떻게 이런 고난을 당합니까? 바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보고서, 하늘도 죽어가는 이 현실을 보고서 비난조로 말합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강도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우리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이 죽어 가는데, 너는 하나님도 두렵지 않느냐?”면서 오히려 다른 강도한테 질책을 합니다. “하나님도 두렵지 않느냐?” 그러면서 이 사람이 예수님께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낙원에 계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늘 바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좌측에 있는 사람은 예수를 겨울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앙상한 가지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이 못박힌 그 순간을 보고서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측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고스란히 포개고 싶었습니다.

십자가를 포갤 수 있는 조건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고 하거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전에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조건은 회개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죄를 짓고 않을 수 없는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죄를 자꾸 짓는 것이 아니라, 죄 지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지은 것 때문에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 지은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책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십자가에 그대들의 십자가를 포개다오! 함께 낙원으로, 함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자. 단, 포개기 위해서 회개해라. 죄를 회개하고서, 그 죄를 내 십자가에 얹어라.”

오른편의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봄의 눈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오늘 직접 차가운 겨울 같은 죽음의 자리에서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는 앙상하게 죽어가는 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속에서는 새로운 것이 움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죄 없는 예수는 왜 죽어야 하는지를, 죽어가는 바로 그분 속에서 무엇이 움트고 있는지를, 예수를 만나면서 깨달았습니다.

예수 이야기는 이 강도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병 고친 일도 들었을 것입니다. 혹시 먼발치에서 봤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십자가에 같이 달려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에서 만난 예수, 그냥 길거리에서 만난 예수가 아니고 인간의 가장 처절한 자리에서 만난 예수, 인간의 한계선에서 만난 예수,  죽음을 앞에 둔 극한의 상황에서 만난 예수, 그 예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차라리 이 강도처럼 마음껏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가 되면 한번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그게 낫잖습니까? 저도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죽기 직전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갤 수만 있다면 누가 그렇게 안 하고 싶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어릴 때부터 힘들여서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강도는 오늘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만난 첫 순간입니다. 과거에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 과거에 알았던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직접 가슴과 가슴으로 얼굴과 얼굴로 운명과 운명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만남은 이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간이었지만, 처음 만남이었습니다.

사실 왼편에 있는 강도는 예수를 보았으나, 눈은 맞췄으나, 진실로 만나지 못했고 진심으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를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라는 한계선 상에서, 인간의 심연 속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이 호흡할 수 있다면 절대로 왼쪽의 강도와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혹시 우리가 왼편의 강도 같이 예수를 보았다면, 이제 다시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동안 믿어온 것에, 예수에 대해 들어온 것에 자신이 없다면, 이제 오늘 깊음과 깊음으로, 진실과 진실로, 한계선 상에서 인간과 인간으로 한번 만나보십시다. 그럼 그때 나오는 말은 분명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절 좀 주님의 십자가에 포개도록 해주십시오.” 인간이 사시사철을 다 겪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철이든지 십자가는 포개져야 합니다.

오늘의 구약분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죄를 짓다가 죽으면 누구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죄 짓는 사람 잘못이지, 어째서 하나님 잘못입니까? 그런데 왜 죄 때문에 벌을 받으면 하나님 탓을 합니까? 자기 잘못 아닙니까? 이 세상이 악하고 험한 것이 이 세상의 잘못 때문 아닙니까? 왜 하늘의 잘못인 것처럼 말합니까? 하늘이 일일이 간섭하던가요?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 다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는 것, 죄 때문에 죽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회개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인생관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역사관도 세계관도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보는 눈을 바꾸면 예수님이 새로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골고다 언덕, 해골 언덕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간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 새로운 봄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는 새로운 부활의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까지 예수님과의 만남을 계속하자는 겁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에게 포개졌습니다. 기쁨이나 슬픔만 아니라 온 삶을 다 포갰습니다. 그러자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봤더니, 내 속에 누군가 살아 있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다. 그것을 내가 발견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참 불행한 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에는 강도 둘이 매달렸는데 한 강도는 구원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나라로 가고, 다른 한 강도는 내버려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의 상징 같아 보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좌우 양쪽이 다 튼튼해야 건강합니다. 그런데 한쪽이 없는 겁니다.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늘 2004년 사순절에 무엇 때문에 이 성서 본문을 읽고 이야기합니까? 우리는 떨어져 나간 한쪽 날개를 다시 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측만 가지고 하늘나라에 간다면 하나님이 만족해하시겠습니까? 떨어진 날개도 회복시켜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죄 지은 인간들은 회개하기만 하면 새롭게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떨어진 쪽을 내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 됩니다.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같이 살기를 권해보십시다.

죄 많이 지은 것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회개하고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개보십시다. 그리고 같이 살아봅시다. 인생살이에 장애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거대한 산, 태산에 부딪혀서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돌멩이, 작은 흙더미에 걸려 넘어집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진실과 진심의 대화를 시작해 보십시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사순절을 기념합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태동하는 봄철의 희망, 여름철의 아름다운 꿈, 가을철에 부활의 열매, 이것을 줄 테니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