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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인하여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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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인하여(에베소서 2:1-10)

  미국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자 집사님 한분이 제직회 때마다 제직회를 아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자세가 너무 옳지 않아서 여러번 충고를 했는데 듣지를 않았습니다. 부득이 당회원 전원의 투표로 그 집사님을 출교시키기로 결의를 하고 다음 주일에 목사님이 출교를 공표하기로 했습니다.

결정은 했지만 목사님이 한 집사님을 출교해야 한다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토요일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아무개 목사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를 출교시킨다지?” “예,” 주님께서 아무 말없이 한참을 보시더니 “나는 가룟유다 하고 살았다...”하시면서 사라지시더랍니다.
<나는 가룟유다하고 살았다...>

출교시키기로한 집사님은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와서 교회를 뒤집어 놓는데 가룟유다는 3년 동안 매일을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을 팔 가룟유다인 것을 아시면서도 같이 생활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님은 다음날 예배 광고시간에 지난 밤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당회의 결의대로 공표하지 못하는 심정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뜨겁게 기도를 했습니다. 온 성도들이 함께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책벌을 받을 집사가 이 소식을 듣고 그때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교회에 와서 잘못했다며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 전체가 평화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닥칠 때에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행한대로 책벌해서 출교시키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길은 은혜로 봐 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봐 주는 길도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행한대로 책벌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대하는데 사람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성경에는 은혜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가지 세계관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는 율법적인 세계관입니다. 또 하나는 은혜중심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의 세계관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그것은 은혜중심의 세계관입니다.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흐르는 큰 물줄기는 은혜의 물줄기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전체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입장료 받고 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로 거저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벗었음을 알고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무화과 잎사귀가 어떻게 그들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겠습니까? 이 모습을 본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로 입혀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그 피로 모든 인류의 죄를 가리어 주실 것을 예표하는 은혜의 그림자입니다.

가인이 범죄하여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내 벌이 너무 중합니다’ 하고 호소했을 때 하나님은 가인을 해할 자가 없도록 은혜의 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범죄하여서 멸망 당할 때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주셔서 방주를 만들고 그 가족들을 통하여서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에 은혜로 나오게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세게 최강대국인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나온 것이 싸워서 이기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싸워놓으시고, 이겨놓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로 따라 나온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신명기 6장 10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를 잊지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싸워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성읍을 얻어서 살게 된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축해서 산 성읍이 아니고 이미 다 다른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건축해 놓은 성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우물을 파서 마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물을 파서 마시도록 준비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저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포도열매를 따먹고 감람나무를 얻게 된 것도 그들이 가서 심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살고있던 가나안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 그대로 얻어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실,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얻게 될 천국의 모형 아닙니까? 우리가 천국에서 이런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인데 우리가 천국 만들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마련해 놓으신 천국에 우리는 믿음으로 거저 들어가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너희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천국인지 2천 년 동안, 지금까지 우리 주님은 천국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엿새 동안에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는 그 능력많으신 주님께서 2천 년 동안 천국을 만드시니 그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천국이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천국에 우리는 은혜로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도 모두가 은혜입니다. 우리가 애써 수고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먼저 있었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살고있는 것입니다. 새가 높은 하늘을 날아 다닙니다. 인간이 과학을 발달시켜서 하늘을 비행기를 타고 날아 다닙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공기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날지 못합니다. 공기라는 은혜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하여서 하늘을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가 물 위에서 힘차게 나갑니다. 추진력이 강한 엔진을 만들고 능숙한 선장이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배가 떠 있을 수 있는 것도 배를 떠받쳐주는 부력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력이라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배가 가고 수영을 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땀 흘려 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땅과, 내리는 비와, 쬐이는 햇빛이 없으면 인간의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부가 은혜 아닙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 사랑하는 부모님이 우리를 받아주셨고,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발달시켜 놓았기에 우리가 짧은 시간 안에 배워서 이만큼 복되게 살 수 있었고, 내가 공부시키지 않은 아내와 남편을 만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고, 그 은혜 안에 우리가 살고 있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남은 것은 <진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죄인이었고 원수되었으니 그 진노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진노의 대상이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해 버리고, 없애버리고, 죽여버리고, 지옥 보내버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에게 은혜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으므로 심판해서 죽여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모든 죄를 다 사해 놓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천국갈 수 있다,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은혜의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우리도 은혜로 대합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통해서 영생얻으라고, 생명얻으라고, 천국 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는 완전히 절망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가, 살 길이 없는가, 찾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예수님을 보여 주도록, 예수님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안내자로 세워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법을 지킴으로, 어떤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도록 우리에게 자꾸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종교가 법을 지킴으로, 자기들의 경전대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 조차도,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율법에 매여서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보고 생활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준을 율법에다 두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대하십니다. 법대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은혜로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도 사람을 은혜로 대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돌아온 탕자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뭡니까? 큰 아들은 율법적인 사고로 보았습니다. 작은 아들 동생은 법대로 자기에게 돌아갈 모든 재산을 다 챙겨 나가서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권리도 없는 자식으로 보았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그렇게 정죄하고 심판하고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법적으로, 율법적으로 보지 않고 은혜로 보았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에게 주변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로 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 은혜로 대하는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율법적 태도의 핵심은 절대를 요구합니다. 법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요구합니다. 법은 죄를 지으면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율법적인 마음의 반대되는 개념이 은혜의 마음입니다. 은혜의 마음은 우리가 죄 짓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마음도 우리가 죄짓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대로 살지 못할 때에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마음이 은혜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태도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다 끝내 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정죄할 때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받을 때라는 사실을 아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은혜를 받을 때 변하는 것이지, 책망받고 정죄받을 때 변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집사님이 출교 당했다면 오히려 더 완악해져서 교회를 더 괴롭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출교라는 법적인 마음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은혜로 대하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자기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온 교회를 평화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런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대해 주셨고 예수님도 우리를 은혜로 대하여 주셔서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들도 이제 남을 대할 때나, 나 자신을 볼 때에 법적인 마음으로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고 은혜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3. 은혜의 마음

은혜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하면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잘못한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을 받을 때라고 생각하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 바로 은혜의 마음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은혜의 마음이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잘못한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은 은혜와 사랑을 받을 때라고 생각하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이 말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릅니다. 은혜의 마음이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잘못한 것을 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라고 이해해 주는 마음입니다. 한번 더 따라하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이게 얼마나 파워플한, 얼마나 매력적인, 얼마나 능력있는 말인지 모릅니다. 이게 은혜의 마음에서 나오는 결정적인 말입니다.
이 말만 할 수 있다면 자신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다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 하기가 어렵습니다. 속을 썩이는 자식, 속을 썩이는 남편, 속을 썩이는 아내가 있으면 우리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럴 수 있냐? 하고 열을 받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은혜의 말을 사탄은 ‘그럴 수 있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의 반대말은 ‘그럴 수도 있냐?’라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이 말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은혜의 말을 하시는데 사탄은 ‘그럴 수도 있냐?’라고 만들어서 자꾸 우리에게 열받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에 그날 밤에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한시간 동안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졸고 있습니다. 우리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 그럴 수 있냐? 내가 잡혀가는 밤에 그럴 수 있냐?’ 하겠지만 예수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인정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자기만 아니라 동료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우리같으면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베드로, 너 그럴 수 있냐? 너 그렇게 나하고 약속해 놓고 저주까지 하면서 그럴 수 있냐? 내가 부활한 것을 보았으면 믿어야지 너 혼자도 아니고 다들 데리고 그럴 수 있냐?’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떡 구워놓고, 생선 구워놓고, 먹으라고 하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떼를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너, 그럴 수 있냐?>라는 태도로 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죄는 죄다. 다시는 그런 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율법적인 사고로 살지 말고 은혜중심적인 사고로 생활하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셨고, 예수님도 우리를 은혜로 대하여 주셔서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나도 은혜로 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4. 나 자신, 타인, 환경을 은혜로 대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은혜로 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때로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못하게, 또 능률적이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되는데 우리는 나 자신이 ‘절대로 나는 실수해서는 안돼, 절대로 나는 완벽해야 돼, 절대로 남보다 앞서 가야 돼,’하고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절대>를 나에게 붙입니다. 그때부터 율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절대 실수할 수 없는 나인데 실수하니까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더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더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대할 때도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하나님 외에 쓸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라는 말을 나와 타인에게 서슴없이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내 자식은 그래서 안된다’고 합니다. 자기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안했으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절대’라는 말을 써서 자식에게 상처를 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얻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부부와 자녀와 이웃을 대하게 되면 가정이 회복되고, 사회가, 교회가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원합니다. 착하게 살아주기를 원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공부 잘 해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되고, 남보다 뒤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 내 자식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스스로 속으면서 살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사탄은 무슨 말을 하게 한다고요? 자식이 잘못하면 어떻게 한다고요? “그럴 수 있냐? 내 자식이 그럴 수 있냐?”라고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열받아서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은혜의 마음을 가져야만 우리가 격려하고 위로하고 이해하고 기도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변하게 되는 것이지, 율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속 자녀들을 정죄해 보세요. 절대로 자식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녀들을 볼 때도 율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은혜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럴 수도 있다, 네 나이에 그럴 수도 있다>라고 인정하고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와야 합니다. 자상해야 합니다. 생기기도 잘 생기고 진실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시간도 많이 내어 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외식도 잘 해주고 아내를 생명처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이 <절대>를 자기도 ‘절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 남편이 잘못해도 그럴 수도 있다. 늦게 들어와도 술 먹고 들어와도, 속을 썩여도, 돈을 못벌어와도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번 더  따라하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과 말만 하게 되면 격려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그 안에서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남편이 그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뭐라고 한다고요? “그럴 수 있냐?”이렇게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열받습니다. 불평합니다. 불만합니다. 싸웁니다. 나중에는 갈라지게 됩니다. 그럴 수 있냐는 사탄이 주는 말인 줄 알고,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 남편에게 일어나게 될 때에 <그럴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남편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아무리 속썩이는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제 작심하고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가 언제나 따뜻한 밥을 해 주고, 옷도 잘 해주고, 알뜰하게 살림도 하고, 자식도 잘 키우고, 부모도 잘 공경하고, 남편을 하늘처럼 모시고, 생기기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좋고, 음식도 맛있게 잘 만들고, 그러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절대로 내 아내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여기에 문제가 생기고 이게 바로 율법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러면 좋아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한 존재,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해도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 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용서하세요. 그때 아내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가정의 부부는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데 남편이 아내보다 조금 더 똑똑합니다. 아내도 상당히 똑똑한 사람인데 아내보다 조금 더 똑똑한 남편에게 눌림을 당해서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비판하니까 이 부인이 나중에는 바보처럼 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한 가정에는 남편이 아주 대단한 남편인데 아내는 영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그저 내 아내, 내 아내 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니까 나중에는 그 아내가 온 동네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율법적으로 정죄하고 비판하면 더 줄어듭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거기에 사람이  살아나고, 생산적이고,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냐?’ 하면 우리는 열받고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에는 그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냐’라고 하다가는 결국 가정도 깨어지고마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일을 아내가 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내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마음을 가지고 아내를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특별히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떻게 내게 열을 받게 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럴 수도 있다>는 이것이 여러분의 입에 버릇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그럴 수 있겠다, 차에 스티커를 붙여 놓아도 그럴 수 있겠다, 어떤 일이 내게 닥친다 할지라도 은혜의 마인드를 가지고 그 사건을 바라볼지언정 율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해 버리는 마음은 절대로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주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느냐는 사탄이 주는 말과 생각에 오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정죄해서 언제나 율법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우리의 생활도, 우리의 가정도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정이 구원되고 우리의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삶의 환경이 변화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그럴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나도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 환경을 볼 때 <그럴 수도 있다>는 은혜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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