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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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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마태복음 20장 20-28절

< 찬수가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

작년 초에 우연히 성문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신 정길진 목사님으로부터 그 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이 백혈병에 걸렸는데 그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언뜻 이은경 집사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은경 집사를 백혈병에서 낫게 해주신 큰 은혜를 우리 교회에 주셨는데 감사 표현을 하라는 싸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찬수를 돕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1년 2개월 동안 저희 교회 및 선교회를 통해서 힘써 도왔습니다.

교회의 형편상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도우니까 가끔 불평도 들려왔습니다. "목사님! 우리도 넉넉한 교회가 아닌데,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한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을 설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수를 알게 하신 것이 복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정에 처한 분을 외면하면 언제 우리에게 보낸 천사를 돕겠습니까? 우리가 힘써 사랑을 나눌 때 우리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기도와 도움에도 아랑곳없이 찬수가 지난 월요일 4시에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4시 10분에 목진훈 목사님으로부터 그 전화를 받고 밀린 병원비 때문에 시신을 못 찾을까봐 선교위원회 집사님과 급히 돈을 마련해서 그날 6시에 아산 병원에 가서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 돈을 받으시면서 목사님이 서럽게 우셨습니다. 거지도 아닌데 어떻게 매번 도와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하겠습니까? 또 이 각박한 세상에서 도와달라고 한다고 누가 선뜻 도와줍니까?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그 말을 하기 전에 "척!" 하고 알아서 도와드리면 제일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급히 돈을 마련해 가서 드렸는데 그런 마음이 고마운지 목진훈 목사님이 서럽게 울었고, 사모님도 서럽게 울었습니다.

시신을 찾아 안산에 있는 제일장례식장으로 옮긴 후 수요일 아침 천국 환송 예배를 드리는데, 2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4명이 참석했는데 우리마저 없었더라면 참으로 썰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인이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가족 친지 외에 교인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목진훈 목사님 말에 의하면 안산에 있는 목사님들 중에 택시 운전하는 분들, 막노동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척교회와 중형교회는 다 죽어가고, 오직 이마트 같은 대형교회만 커지니까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먹고사는 일조차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목사님을 돕기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축복 받는 것'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축복을 통해 연약한 자를 돌보고, 그들의 사는 길을 열어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우리에게 사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누군가에게 사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줄 믿습니다.

<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가는 길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기뻐하실까요?

1.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17-19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삼일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깨고 한 사람이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본문 20-21절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절하면서 자기의 두 아들들을 주님 나라의 좌우 정승으로 삼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냐! 알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약삭빠른 태도로는 복된 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누가 주님의 우편에 앉습니까? 약삭빠르지 않고 우직하게 충성하는 사람이 주님의 우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약삭빠른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약삭빠른 마음은 약삭빠른 도둑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약삭빠른 생각을 하면서 "내가 참 영리하구나! 내가 잘 살 거야!"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사기 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사기치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약삭빠른 것'은 '영리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잘 살 것 같지만 더 못 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약삭빠른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인간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

계속해서 본문 22절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주님의 마시려는 잔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자가 주님의 좌우 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에서 주님의 잔을 마시는데 마시면서 십자가의 삶을 새롭게 다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이 부패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적절한 십자가가 없으면 그 영혼은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마련하신 잔을 기쁘게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발 사진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발이 못생겼는지 마치 희귀병을 앓는 사람의 발 같았고, 나무 뿌리처럼 생겨 마치 엽기 사진 같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강수진 씨의 발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은 예수님의 발에 한 여인이 입을 맞추었듯이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열 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훈련한 결과 멀쩡하던 발이 괴물 발이 될 정도로 노력해서 얻은 성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지지 않고 주님 우편에 앉을 생각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서 너무 핑계만 대고, 너무 엄살만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욕심만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

본문 24절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10제자가 두 제자에게 심히 분노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마음이 넉넉하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살면 "누가 크냐?"고 다투게 되지만 성령 충만하면 나보다 남이 앞서도 괜찮습니다. 때로 남이 큰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밝은 얼굴이 되고,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되고 지나친 염려와 근심이 없고 한에 맺혀 사는 것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심하게 매를 맞아도 다음날에는 환하게 웃고 놉니다.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때리면서도 아이들은 때린 후에는 스스로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되지만 정작 맞은 어린아이들은 하루만 지나면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어른이 그렇게 맞았으면 한이 맺혀서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어제 심하게 싸우고도 오늘 친구가 됩니다. 어른들은 그렇게 사우면 오래 맺히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느새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친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령 충만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유를 대든지, 어떤 변명을 하든지 원한 맺힌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 같아도 마음속의 한과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 충만 및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것이지 결코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아침에 모든 맺힌 것, 모든 섭섭한 것을 다 버리고 "그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십자가였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 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4. 종처럼 섬겨주는 사람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기를 원하고, 그것 때문에 시기하고 분노하고 다투는 모습을 주님께서 물끄러미 보면서 많이 마음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지는데 아직도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본문 26-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권세를 부리는 일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하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축복 많이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축복 받고 그 축복을 남을 위해 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오해하면 사랑이 오기나 집착으로 바뀌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 축복이 저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만 높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높임 받으려고 하면 공동체의 하모니가 깨지고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나 남을 섬겨주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 모든 삶과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받으려고 하면 결국은 손해뿐입니다. 그러나 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을 얻게 됩니다.

왜 사람들에게 미련이 있습니까?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받으려고만 하면 미련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는 사람은 미련이 없습니다. 더 주는 사람은 더 미련이 없습니다. 다 주는 사람은 미련이 결코 없습니다. 그처럼 미련이 없는 것이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누구에게 행복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주고 주고 또 주고 자기 몸까지 주려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연약한 사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높은 자리다툼이 이번 한번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얼마 전에도 갈릴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툴 때가 있었습니다(막 9:30-37). 그때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처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도 잘 영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탁 무시합니다. 없는 사람을 무시할수록 축복은 하나씩 깎일 것입니다. 반대로 없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섬겨줄수록 축복은 하나씩 쌓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의 축복을 저울질하실 것입니다.

<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청년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때 진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하는 짓도 진따고, 생긴 것도 진따고, 왕따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야! 내 숙제 좀 해!" 하면 "어. 알았어!" 했고, "야! 볼펜 예쁜데. 내가 가져도 되지!" 하면 "어. 그래."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 청소 일 하시는 찐따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다리를 절며 아들에게 다가가 큰 봉투를 건네주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했습니다. "야! 찐따. 거 뭐냐?" "음. 우리 아빠가 너희 주라고 가져오셨어." 봉투 안에는 빵이 들어 있었는데, 진따 아빠가 자기 아이가 왕따인 것을 알고 잘 봐달라는 의미로 사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야! 그 빵 청소하다 주워온 것 아냐!"하고 조롱하면서 아무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날 진따는 말없이 그 빵을 그냥 가져갔습니다.

다음 날, 진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웃었습니다. "야! 진따가 땡땡이도 치네."

다시 며칠 후에 종례시간 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얘들아! 진호가 많이 아프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병원에 못 가서 병이 커졌대. 선생님도 엊그제 가봤는데 많이 아픈 것 같다. 너희들도 한번 가봐라."

그날 몇몇 친구들이 진따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진따집을 찾아 달동네로 올라가는데 아직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을 듣고 반 아이들은 찐따를 원망했습니다. "찐따 정말 슈퍼맨이었네. 도대체 매일 이 길을 어떻게 다녔어." "진따 다리 봤잖아. 그래서 다리가 두꺼웠나봐."

드디어 찐따 집이 나왔습니다. 금방 무너질 듯한 화장실 만한 집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질렀습니다. "야! 진따! 아니, 이진호 우리들이 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이 너무 적어 10명이 다 들어갈 수 없어서 두세 명씩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갔다 5분쯤 후에 나온 친구들이 눈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래? 울었냐?" "아냐. 그런데 이제 진호 어떡하냐?"

친구의 감추어진 눈물을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는데 진호가 보였습니다. 머리가 퉁퉁 부어 ET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진호야!" "어. 경수 왔구나!" "왜 이래!" "약 먹으면 곧 나아질 거야." "뭐야! 약을 먹어! 머리가 이렇게 퉁퉁 부어 눈도 못 뜨면서 병원도 안 가!" "괜찮아!" 야윈 그의 얼굴을 보니까 가슴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셔야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찐따에게 누구 하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달랐습니다. "야! 찐따. 꼭 나아야된다. 너 안 나오면 내 숙제는 누가 해주냐." 그날 저녁 진따 집에서 나오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 찐따 괜찮겠지?" 대답이 없었습니다. "야! 말 좀 해봐! 진따 괜찮겠지." 그래도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바램과는 달리 진따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곧 방학이 되었고, 다시 개학을 했는데도 여전히 진따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개학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선생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얘들아! 진호 별명이 진따였니? 진호가 하늘나라 갔다. 가기 전에 너희들 얘기 많이 했다고 그러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 서럽고 너무 진따에게 미안해서 욕이 나왔다고 합니다. "병신! 쪼다! 찐따 같은 자식. 그래 우리 안보니까 좋겠다." 그날, 반 전체가 조용했습니다. 그 흔한 지우개 던지기도 없었고, 자주 하던 말뚝박기도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불쌍한 친구를 못살게 군 비열한 친구였다는 생각에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가끔 진따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진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찐따야! 나다. 기억 나냐? 우리 엊그제 동창회 했다. 너한테 숙제시키던 명식이도 나왔고 네 뒤에 앉아서 샤프 콕콕 찌르던 정호도 나왔다. 명식이는 결혼했다. 딸도 있는데 지 에빌 닮아 시집은 다 갔다고 생각한다. 정호는 PC방 사장됐다. 만나서 너 얘기 많이 했다. 너 혹시 하늘 나라에서도 왕따 당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웃었다. 진따야! 너 춥니! 안 추워? 너 얘들이 많이 보고 싶어하는데. 진따야 정말 미안하다. 너 다음 세상에서 우리 만나도 친구 해줄 거니? 응? 말 좀 해봐? 야! 찐따.... 내 말 안 들리니? 진따야! 하늘 나라에서 잘 있는 거지! 보고싶다. 진호야."

<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사십시오 >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연약한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려운 자를 위해 드리는 물질 하나, 시간 일분이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고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자에게 주는 냉수 한 그릇도 반드시 기억하시고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막 9:41).

찬수 장례식에서 목진훈 목사님은 그 동안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는 찬수가 다니던 학교 학생 중 한 명을 선택해서 장학금을 주는 일이라도 시작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이 확산되어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살기 어려워도 도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인 살기도 힘든 목진훈 목사님이 그런 각오를 피력하는 것을 보고 정길진 목사님이 저보고 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 참 어려운 학생이 많은데 목사님 교회와 요삼일육선교회에서도 학생 몇 명을 선택해서 장학금을 주시지요?" 제가 "얼마쯤 도와야 하는데요?"하고 물으니까 "분기별로 30만원씩 1년 120만원 정도 있으면 학생 한 명에게 전액장학금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 그렇게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얻으려고 하는 일'에만 전념하지 말고 '드리는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선교와 구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더욱 풍성한 행복감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달라!"고만 하지 마시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도울 사람이 없습니까?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 생각나게 하시고 실제로 내 손을 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 성찬식을 할 때 그런 마음으로 성찬식에 임하고, 이번 고난 주간에는 특별히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였고, 바로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그처럼 항상 '나눔과 섬김의 도'를 잃지 말고 주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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