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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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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마 16:21~28)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아멘 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믿고, 따르려고 하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어떤 부자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 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 된 후에 나를 따르라"
어떻게 됐죠?
"이 사람은 근심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근심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물질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더 많은 재산이 쏟아 부어질 것이라는 이기적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대감의 상실은 낙심으로 돌아왔고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돌멩이에 맞아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도끼로 몸이 잘려져 나가는 사형장에서도 나는 끝까지. 끝까지 이 믿음 지키겠다고 하며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성질 급한 베드로! 말고의 귀를 베면서 의기양양했던 실수 투성이였던 베드로까지도 종국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면서 이 십자가!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이 십자가를 내가 어찌 예수님처럼 매달릴 수 있겠느냐면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돈 때문에 근심하며 괴로워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런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느냐 아니면 어설프게 알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시죠?
얘들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의 대답입니다.
"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아니요. 어떤 사람들은 모세라고도 하고요.
이미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나셨다고들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
바로 오늘 여기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신 여러분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에 베드로가 선뜻! 급한 성격! 그대로 앞에 나서서 대답을 합니다.
"네! 예수님!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소리쳐 증거 합니다.
"너희가 십자가 못박아 죽였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왜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지키질 아니하는가? 회개하라"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태도를 보세요.
행 7:54에서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는 찔렸으나 이를 갈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스데반을 쳤다" 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스데반을 연상해 보세요.
봄 하면 무슨 색깔이 떠오르십니까?
개나리, 노란색이 떠오르시죠?
노란색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개나리! 병아리! 반 고흐의 미술작품!
그렇다면 돌에 맞고 있는 스데반!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장돌! 두 손으로 들어야만 들 수 있는 축대 쌓는 돌!
그리고 찢겨져 나가는 피부
또 터져 튕기는 붉은 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아니죠! 그런 감각적인 소리만 들리면 않됩니다.
온몸이 으스러지면서도 꺾어진 무릎을 다시 조아리면서 하늘을 우러러 주여! 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셨기에 주기까지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
우리고 지고 따라야할 십자가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그 재질이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입니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많이 쓰고 있는 용어 중에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종(Servant)"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종이란 말은 굴레를 씌어 놓은 노예라는 말입니다.
종이란 헬라어로 집에 들여놓은 가구라는 뜻입니다.
맘에 들면 집에 놓았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다 부셔서 내다 버리는 그런 가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시든지 팔아 버리시든지 감옥에 가두시든지 때리시든지 아니면 죽이시든지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예! 아멘 밖에는 없다 하였습니다.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온전하든지, 미쳤든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오니 내 주여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바울은 질병을 고쳐 주시지 않았을 때에도 주님이셨고, 순교의 형장에서도 예수님이 주님이셨기에 아멘!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여러분의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분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니 부자가 되려던 청년에겐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예! 한 밑천을 잡으려고 했던 가롯유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나의 소유욕이 채워지고
예수로 인해 세상적으로 대접받으면서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고
예수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맘껏 뽐내 보려는 사람들에겐 이거! 예수가 왜 이러는 거야. 실망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에이! 교회 나가봐야 뭐 얻는 게 있어야지
야! 내가 가진 이 재능 말이야. 딴 데서는 얼마든지 쓰면서 아! 대우받고 산다니까? 세상이 더 재밌어 얼마나 좋은데.
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시기 원하십니까?
또 아멘 입니까?
진짜 아멘 입니까?
진짜. 진짜 아멘 입니까?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왜? 왜?
예수를 따르려면 꼭 종이 되어야 하는가?
왜 예수를 따르려면 꼭 노예처럼 되어야 하는가?
왜 예수를 따르려면 살든지 죽든지 그저 언제나 예 만하고 아멘만 해야 하는가?
난 좀 예수 때문에 잘 살면 안되는가?
난 좀 예수 때문에 출세하면 안되는가?
난 좀 예수 때문에 가정이 잘되면 배가 아픈건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 그런 분이 아니세요.
병들었을 땐 찾아와 고쳐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외로울 땐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우리의 이 가슴 가슴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어 주시면서 나보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기쁨을 충만케 심어 주게 하시는 예수님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나에게 안겨 주시는 우리 예수님!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동행하여 주시는 분
그런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면 아멘!

그런데 왜 나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까?
25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저는 20여년 전에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 속에는 목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아! 이 무거운 목회의 십자가를 어찌 내가 질 수 있단 말인가.
아! 난 못 져! 아! 너무 무거워! 아! 너무너무 힘들어!
그런데 옆을 보니까 웬 사람이 빙그레 웃고 계셔요. 그런데 그 분이 이 십자가의 한쪽 날개를 짊어지고 계신 겁니다. 그분이 키가 커서 그런지 겉으로는 나도 십자가를 지긴 졌는데 사실은 그분은 혼자 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목회의 십자가가 그렇게도 가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래! 아! 그렇구나
예수님께서 내 십자가를 같이 메고 계시는 거였구나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지고 계신대
왜 나 혼자 지는 것으로 알았을까!
마 17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멘!
십일조를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주시고 인생 70 - 80을 바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주님 앞에 나와 눈물을 뿌리면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게 하시고 십자가를 지면 우리 예수님께서 대신 저 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져야! 예수님이 그곳에 계실 수 있는 거예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 밖에 근심이나 내 속이 걱정이 있다면 우린 예수 앞까지만 나와 오면 됩니다.

솔로몬도 일천번이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세계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면서 너무나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 있다면 입을 열어 부르짖기만 하면 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왜?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크고 놀라운 비밀을 보여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서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가 달려 갈 길 다 가도록 믿음을 지켰습니다.
선한 싸움도 이렇게 다 싸웠나이다. 주여!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의의 면류관을 이렇게 예비해 두었잖니. 도끼를 보지 말고 이 면류관을 보고 조금만 견뎌라 내가 내 눈과 내 손으로 너를 붙잡아 주겠다. 다시는 눈물이 없는 이 곳으로 내 너를 인도하리라.
스데반이 소리칩니다. 주여! 돌멩이가 날아옵니다.
그래! 내가 보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니 너에게 주려고 준비해 놓은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생명수 같이 보이지 면류관이 보이지 그래 그 십자가 붙들면 이 모든 것이 너의 것이란다.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십자가 그 다음에 있는 부활과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드세요. 눈을 뜨세요. 그리고 바라보세요!
나에게 고난을 주는 십자가를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생을 바라보란 말입니다. 종이 지는 굴레가 아니라 종이 받을 상급을 바라보란 것입니다.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까?
왜 고통의 자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되셔야 합니까?
목숨까지 내 놓으라는 자리인데도 어떻게 예하고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잊지 마세요.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하는 그 고난을 대신 져 주시려는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고난 당할 때 대신 져 주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 나는 주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가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의 아침에 의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쓰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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