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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곁에 서 있을 때 (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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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곁에 서 있을 때 (요 19:25-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이 보입니까? 보이는 것이 나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커피나 차를 위하여 물을 끓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관심하게 보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왓츠(Watts)’ 라는 사람은 끊은 물주전자를 보면서 증기기관차를 본 것입니다.  번개가 칠 때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러나 플랭크린(Franhlin)은 어둠을 밝혀주는 전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쥐를 보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즈니(Walt Disney)는 미키마우스를 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봅니다. 불신자들도 봅니다.  신자들도 봅니다.  십자가를 노래합니다.  그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무엇을 봅니까?

1.  예수의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힘든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극형이 선고된 죄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죄인의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못으로 박아 매달려있기에 살이 다 찢겨 많은 피를 쏟게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옵니다.  숨을 내쉴 수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안 됩니다. 그로 인하여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증세를 참으려고 죄수가 몸을 치켜올리게 되면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고통은 가중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이런 거였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의 고난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괴로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십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겠습니까?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볼 때 관계가 없는 이들은 그사람 참 아프겠구나.  안되었다 라는 정도의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볼 때에는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 고난을 피해보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버리고 다른 환경 속에 들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2) 고통을 당하면 낙심하고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즉 자신이나 어느 누구라도 불행이나 고통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는 생각으로 자살하려는 이들입니다. 

(3)  생각 있는 이들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잘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그의 고통을 봅니다.  어떻게 봅니까? 고난 당하는 이들 중에 원인을 죄 값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범죄하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는 데 이유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여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 낀 고속도로를 조심스럽게 제한속도보다 훨씬 적게 안전하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들어와 내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이 엄청난 아픔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는 고통은 이런 경우와 다릅니다.  선택 된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고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게 된 것이 두려워 도피하여 도망 나옵니다.  그때 주님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두고 왔기에 내가 그 십자가를 지려고 간다.  그러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정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감이 예수님같이 죽겠습니까? 나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리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자원하여 죽으시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거라면 고난은 영광입니다.  십자가 곁에 있는 이들이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삶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십자가를 보면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 곁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형의 도구였습니다.  십자가 형틀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집트, 카르타고, 인도, 그리스, 로마 등이었습니다.  유대적인 형틀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적인 사형집행제도는 목매는 것, 교수형, 불살라 죽이는 것, 돌로 쳐죽이는 것(레 20:27) 등이었습니다.  유대에서는 죄 지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달아 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신 21:23)  십자가 형틀은 고대 사회에서 무섭고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정치범, 반사회적인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흉악범이라는 두 사람의 강도와 같이 취급하여 십자가 형틀에 예수님을 매어 달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죽으십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게 아닙니다.  바로 내가 죄인인데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내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사망이 왔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망하게 합니다.  개인을 망하게 하고 가정을 망하게 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왜 패망이 왔고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우리의 행복을 빼앗습니다.  에덴의 행복과 기쁨을 죄가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절망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지옥으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인인 줄 모르고 죄를 범하고 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암이 왜 무서운 병인가요? 병인 줄도 모르게 번져가서 결국은 사람을 죽게 하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암이라도 일찍이 발견하면 사람은 죽지 않고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죄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죄가 죄 인줄 모르고 계속 범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최근 네델란드 카톨릭 단체에서는 7대 죄악으로 자만, 시기, 대식(폭음), 색정, 분노, 탐욕, 나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죄에 대한 다섯 가지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 ‘오페일레마’ 인데(마6:12) 뜻은  ‘빚진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도 죄를 빚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빚진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빚지고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카드 빚입니다.  모르고 있는 동안에 빚을 많이 지었음을 알게 되면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둘, 죄는 ‘하말티아’ 라는 말입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셋, ‘파랍토마’인데 이는 ‘미끄러진다’는 의미입니다.  미끄러지면 안 됩니다.  누가 잘 미끄러집니까? 노약자가 미끄러집니다.  힘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끄러집니다.  죄의 유혹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노인 들은 또 다릅니다.  하체가 허약하니까 자주 넘어집니다.  힘들어합니다.  그러다가 미끄러집니다.  그러면 심한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유혹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험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넷, ‘파라바시스’입니다.  이는 선을 넘어갔다.  ‘탈선’을 의미합니다.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 선 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아노미아’입니다.  이는 ‘불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불법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문제는 죄인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흔히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간 사람들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말을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냐 라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죄과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못하는 예가 있습니다.  왜 회개하지 못합니까?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못 합니다.
(1)죄에 대하여 변명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변명합니다.  변명한다고 죄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회개하여야 없어집니다.
(2)죄를 정당화합니다.  사랑이 죄입니까? 남녀가 간음하는 죄를 지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3)전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저 사람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라고 책임전가 하는데 능수인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4)자기 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회개는 우리 주님께서 갈망하시는 사한이라고 봅니다.  자기는 상당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과감하게 지적하면서 자기는 정당하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회개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에 대한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떠나지 못합니다.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회개하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용기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할 때에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내가 죄인입니다.  인정했습니다.  그 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회개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 이상하게 어려움이 있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내가 잘못한 게 있지 아니한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속하게 조치하여야 합니다.
성결 되게 살고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내게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섭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철저하게 회개하여 성결 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 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요 3:16)  왜 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왜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추상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목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속으로 모르지요.  말하는 이가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신데요? 라고 반문하고 싶어집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사랑입니다.  소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매사에 관심을 갖습니다.  무관심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용서합니다.  내게 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용서합니다.  모든 면에서 도와주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도와 줍니다.  목표한 것을 되도록 도와줍니다.  한 마디로 사랑은 주는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 무엇을 주어야 사랑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도저히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모든 천지만물을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사랑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 중에 모성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짐승도 새끼를 위하여 죽는 자리를 피하지 아니합니다.  그런 깊은 사랑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열심히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렸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신자 한 분이 시험을 받습니다.  왜 시험에 들었느냐 하면 목사님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평범한 생각을 하면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드릴 수 없다는 말 사실 같습니다.  이사야 49:14-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주신 것만이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어야 했습니다.  왜 그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주셨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의 사랑입니다.  구속이란 원래의 소유주에게 다시 환원시킨다는 뜻인데 그것이 상응하는 대가를 치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이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발견한 바울은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변치 아니합니다.  변한다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저명 인사가 움직이면 보디가드가 함께 움직입니다.  철저히 호위합니다.  우리의 보디가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1:5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 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때에는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21:7)  요즈음 문명의 도구들이 도적을 지켜 줍니다.  그러나 영혼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지켜주시는 사랑이십니다.  지켜주시는 방법은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신 32:10, 시 17:8)

우리는 어디에 서있습니까? 십자가 곁에 서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의 고난을 봅시다.  우리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한 고난, 예수께서 자원하여 당하시는 고난을 보면서 감사하는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막혔던 것들이 열리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받고 감격함으로 복되게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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