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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주변에서 (눅 23: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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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 주변에서
본문 : 누가복음 23:26-49
2004.4.4. 주일예배

지금 본 영상은 엊그제 개봉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란 영화의 주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죽음 12 시간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실제 장면을 사실 그대로 재현하도록 연출했습니다. 피 흘리는 잔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끔찍해서 끝까지 보기 어렵다는 사람과 예수님의 고난을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 모습을 보니까 너무 가슴 아팠고, 신앙심이 더욱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세기 로마의 귀족들은 대화를 할 때 금기로 삼았던 몇 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상류 계층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꺼내는 것을 삼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고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신21: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는 십자가는 정말 저주받은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무시무시한 사형대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에 반역한 사람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에게 가해졌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본보기로 경종을 울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구원의 도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지혜로 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진리로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7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는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구원의 진리로 인도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강도들이었습니다. 그 날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처형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강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한 명씩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각각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를 모두 저주스럽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십자가는 저주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룩하게 보았습니다.

십자가 옆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비방했습니다.
39 절 말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십자가 주변에는 이 강도 외에도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35 절에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원들은 비웃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37 절에는 군병들도 희롱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 로마 병사들은 34 절에 보면 예수님의 겉옷을 차지하려고 옷을 나눠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을 너무나 태연하게 치루고 있었습니다.

관원들과 군병들은 만일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만일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직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 관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정치적인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처형을 받고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 죄패가 걸렸습니다. 38 절에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빌라도는 무죄 판결을 해 놓고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형집행은 불법입니다. 빌라도는 군중이 데모하니까 민란을 염려해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결정했습니다. 법적으로는 죄가 없는데 정치적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비웃음과 조롱이 가득했습니다.

또 십자가 아래에서는 이렇게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요청이 가득했습니다.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이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는 묘기를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털어내고 뛰어 내리면 진짜 하나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이 그러면 자기들이 믿겠다고 합니다.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유혹!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 일 금식하셨습니다. 그 때 사단이 찾아와 예수님을 세 번 시험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받아서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성전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뛰어내리는 쇼를 하면 인기가 치솟을 것입니다. 최고의 구경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묘기를 부리신 적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34 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이와 같은 믿음 없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주변에는 이렇게 구원의 십자가를 모르고 비웃는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타까워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구경하던 무리들은 다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48 절입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고 돌아가고”

49 절에는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 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27 절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47 절에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가까이 있었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구레네 시골사람 시몬입니다. 26 절 말씀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힘에 부쳐서 쓰러질 때 구경하다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5:21 말씀을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고” 했습니다.

억지로 지웠다는 것은 그가 반항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처음에 그는 울분을 삭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는 날이라고 투덜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 사건 이후 40 년이 지나서 쓰인 책입니다. 거기에 시몬을 소개할 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의 아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아들이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6 장에는 시몬의 아내 즉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사도에게 문안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경험한 시몬이 그 뒤에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증언해 주고 있는 단서들입니다. 시몬은 십자가 아래에서 구원의 주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십자가 주변에서 가장 극적으로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다른 한 강도입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이를 말리며 꾸짖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본문 40 절부터 43 절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자기도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는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은 바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강도짓을 했어도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니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이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구원은 착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것임을 보여준 증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옆에 좌우에 달린 두 사람은 죽는 것은 같아도 죽은 이후는 너무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는 영원한 불못에, 하나는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구원의 은혜의 사건으로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오늘 우리는 가슴을 두드려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 십자가를 그린 유명한 성화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성화 앞에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성화를 보았는데 도무지 명화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당의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 성화가 그렇게도 유명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그 성화는 무릎을 꿇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보시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다시 가서 무릎을 꿇고 보았습니다. 과연 그는 십자가 성화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십자가를 무릎 꿇는 마음 자세로 바라보십시다.

어느 연극단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그린 연극을 30 년 동안 장기 공연을 했습니다. ‘안톤 레이지’라는 배우가 예수님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느 날 미국인 부부가 여행 중에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안톤 레이지가 아주 실감나게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가는 장면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이 부부는 기념 촬영을 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올라가서 아까 배우가 졌던 십자가를 남편이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필사적으로 십자가를 들어 메려고 했지만 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 여행가가 물었습니다. “연극인데 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하십니까?”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 건성으로 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땀과 눈물과 고난을 겪으리란 각오로 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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