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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도(2)-고통의 의미요법 (마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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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2)-고통의 의미요법 (마27:27-44)


2000년 전 예루살렘을 주둔했던 로마 군병들의 진영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꼬마를 가리켜서 점박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 유난히도 큰 점 하나가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꼬마 점박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얼굴의 점 때문에 "점박아! 점박아!"라고 놀리듯이 부르는 것이 왠지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하루는 꼬마 점박이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눈 먼자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도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도 낳게 하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게 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꼬마 점박이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내 얼굴에 나있는 점을 좀 빼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되겠다!"

그런데 워낙 심부름하는 일이 많아서 좀처럼 틈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마 점박이는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을 당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꼬마 점박이는 낙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내 얼굴에 있는 점도 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구나!"

그렇게 낙심해 있는 찰나에 로마의 백부장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불렀습니다. "얘, 점박아! 이 쓸개 탄 포도주를 가지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에 가서 오늘 처형을 당하도록 되어있는 예수 선생에게 이것을 드리고, 네 얼굴에 있는 점도 빼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무나!"

꼬마 점박이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쓸개 탄 포도주를 들고서 얼른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갔습니다. 한참 뒤에 꼬마 점박이가 다시금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까 아직도 그대로 점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백부장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놈아, 어떻게 네 얼굴에 점이 그대로 있느냐? 아니 예수 선생에게 점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하지 아니했느냐?"

그 말을 들은 꼬마 점박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제가 예수님께 드린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은 그저 입에 대는 시늉만 하시고는 마시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이마에 가시가 찔리시고, 또 온몸이 채찍에 맞으셔서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차마 제 얼굴에 있는 점을 빼달라고 부탁드릴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왔어요."

어느 상상력이 풍부한 한 동화 작가가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지은 성경 동화의 내용입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 꼬마 점박이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꼬마 점박이는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평생소원이었던 얼굴의 점을 빼달라는 부탁을 차마 하지 못하고서 그냥 왔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을 보면서 작은 고통은 넉넉히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을 보니 크게 생각한 자신의 아픔이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는 별거 아니라는 말입니다. 같은 문제라도 이렇게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 의미 추구>의 저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독일계 유태인 정신과 의사로서 수만 명이 살해당한 곳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아무 의료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동료 유태인들은 수없이 죽어갔지만 그는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석방된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지옥 같은 곳을 살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힘을 그는 갖고 있었는가? 어떻게 생존을 지속할 수 있었는가? 프랭클 박사는 대답했습니다.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난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난 절망을 선택할 수 있고 희망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에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난 내 아내의 손에 생각을 집중했습니다.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아 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 더 껴안을 수 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기를 난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 초 일 초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에 갇힌 다른 포로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배급되는 음식은 국 한 그릇에 완두콩 한 알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쓸모없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에 절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대신 그는 단 한 가지의 목표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주었으며, 그 이유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그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프랭클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자세는 삶의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Will to Meaning)’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왜 사느냐 하는 생에 의미를 주는 충족감이요 사명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거기에 생명이 주어지고 소망이 주어지고 그래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는 의미요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후 33년의 인성 안에서의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도록 구속하기 위하여 치루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체험케 합니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고통의 의미를 확인하고 자원 적으로 선택적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이 결정되자,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인간이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 고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성 앞에서 발가벗기는 극도의 수치감을 통하여, 억지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게 한 못된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발가벗기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많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덮고 가리워 주시려고, 자신이 벌거벗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입혀 줄 성결한 '흰 옷'을 위하여 자신이 벌거벗기 우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흰옷'은 물론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말합니다. 이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려고, 주님 자신은 모멸과 수치의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수치를 당할 때 십자가 앞에 우리의 수치를 들고 주앞에 나가면 우리는 이 수치스러운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7이나 요한복음 19:2에는 '자색 옷'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포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빌라도와 헤롯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낡은 주홍색 홍포를 입게 한 것은, 왕으로서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하신 데 대하여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롱거리가 되도록 홍포를 입힌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인격을 모독한 것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진홍과 같이 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홍포는 그의 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피 묻은 홍포로 덮어주시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덮으사 우리를 의롭다하심으로  아들의 신분으로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율법이 나를 정죄하고 고발하여 따돌림 받을 때  오직 홍포를 걸치시고 수치를 당하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우리는 정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누더기와 같은 허물을 벗기고 우리 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을 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의례히 수반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 채찍질은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보통 기다란 가죽 끝에 납이나 못을 달아 채찍질함으로 도중에 죽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나 유대인들은 무서운 강도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먼저 옷을 벗깁니다. 기둥에 묶어 놓은 다음 가죽 채찍으로 때립니다. 가죽 채찍 끝에 군데군데에 쇠붙이와 5개의 낚싯바늘은 회초리가 날릴 때마다 예수님의 가슴을 파고들어 살 조각이 떨어지고 피를 튀게 하였습니다. 한번 맞으면 땀과 피와 진액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말을 길들일 때에 사용되는 채찍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채찍을 예수님은 무려 39번이나 맞으셨습니다.  그뿐인가요 ?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백근 이상 되는 몹시 무거운 십자가였으며 온갖 배신감, 멸시, 천대, 야유, 모욕, 수치, 조소, 연민, 질투, 시기 등 등 많은 눈초리를 받아 가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 대신 찢기시고 상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하면 우리가 모든 상한 마음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억지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주님께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어 주었습니다. 갈대는 왕권을 상징한 홀을 대신한 것으로서, 이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며, 그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막대기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는 머리를 후려 쳤습니다. 피가 낭자하여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여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 쳤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도 희롱하여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 없도다 하면서 이스라엘 왕이여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면서 주님을 조롱합니다.  함께 못 박히는 강도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저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놀려 댔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의 삼중고에 우리 주님은 한 마리의 양처럼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수치와 모욕과 조롱과 고통을 다 당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십자가를 통한 율법의 요구를 응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이 우리 무리의 죄악의 대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당한 죄의 값인 치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고통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그 길을 가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마27:33-34)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법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 전에  쓸개탄 포도주(몰약을 탄 포도주)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덜어주는 마취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당할 수 있는 수치와 조롱과 희롱과 고통을 다 당하십니다. 사람의 도움이나 약품의 도움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을 덜어볼 생각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목적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쓸개탄 포도주를 먹으며 고난 없이 댓가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죄 없이 당하셨고 그 입에 변명이 없습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면서 지는 것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능력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자발적이고 선택적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사도는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십자가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앤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롬8:32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이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 구필(口筆) 화가 김준호씨 이야기

구필 화가-, 입으로 글씨를 쓰는 김 준호 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자서전을 읽어보고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기술병으로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탱크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미끄러져 거꾸로 땅에 떨어져 목이 부러졌습니다. 그 때문에 손과 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마비가 되었습니다. 부산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국군 통합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완치하지 못하고 원호 병원으로 이송되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한참 활동할 20대 젊은 나이에 그는 손발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 매일 절망과 슬픔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또한 너무 오래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엉덩이와 어깻죽지 부분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욕창으로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마취하지 않아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 아래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혀 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캄캄한 저녁을 맞기까지 오직 천장만 쳐다보고, 자신을 저주하고 언제나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은 손 발 하나 움직일 수 없었기에 자살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늘 이러한 자학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휠체어를 탄 두 전도사님이 심방을 왔습니다.

"예수를 믿고 마음에 평화를 얻으십시오. 예수님은 참 구세주가 되십니다. 당신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 져 주시는 분입니다."

간절한 전도에 이은 눈물어린 기도로 말미암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칠흑처럼 어둡던 그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의 빛이, 생명의 빛이 비쳐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희열이 솟아 올라왔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고, 탄식과 눈물이 기쁨과 웃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원호 병원에서 아름다운 간호 실습생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호병원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자니 입술이 부르터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아내의 격려와 설득으로 그는 다시 붓을 입에 물고 조금씩조금씩, 남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린 동양화와 서예 수십 점을 모아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에게 피 묻은 복음이 없었더라면,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어찌 행복이 왔겠습니까? 어찌 그리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림은커녕 좌절과 낙심에 빠져 보잘 것 인생을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처한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자로 서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23살의 평범한 여대생을 수십만 명의 팬을 거느린 '홈지기'로 거듭나게 한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발생한다. 2000년 7월30일 오후11시30분경 도서관에서 귀가하던 지선씨가 서울에서 일어난 한 6중 추돌사고의 피해자가 된다. 지선씨는 이 사고로 인해 전신의 55%에 화상을 입었다. 4~5년 만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중상(3도 화상)이어서 당시 의사들마저 손쓰기를 포기했다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난 결과는 더욱 지선씨의 마음을 후볐다. 무릎 위 온몸에 화상을 입은 덕에 곱디 고운 얼굴이모조리 형체를 잃었다. 양손의 손가락도 절단됐고 심리상담사가 되려던 꿈도 사라져 갔다. 그런데 그녀는 십자가의 주님의 치유하는 손길로 상처난 마음과 영혼이 주님의 영으로 빛을 찾아 행복전도사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주님을 영으로 만나 접촉한 사람은 어떤 고난도 시련도 아픔도 고통도 딛고 일어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 약한 것들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그 수치와 조롱과 모든 아픔을 몸소 겪으신 것입니다.  수치당하고 조롱당하고 멸시받은 우리의 모든 약함과 허물을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0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를 키워 준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결혼한 지 13년 만에 부인이 죽었고, 재혼을 한 그는 모두 20명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10명은 어려서 죽었고, 한 명은 스무 살 즈음되어 죽었고,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 작곡을 하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In Nomine Jesus: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는 실로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이처럼 극한 고난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자기 안에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분을 높이고 찬양하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을 그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만민의 죄를 홀로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못 박혀 돌아가신 구주만 믿으면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믿음과 확신은 특별히 마태 수난곡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모든 예술의 최고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곡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친히 계시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받으신 고난에 대한 마태의 음악적 묘사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으로 향해 가시는 것을 보고 있던 무리들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사랑에 대한 감격이 바로 바하의 심령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과 희롱과 모든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회복하게 하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인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고난의 결과도 압니다. 어떤 아픔도 십자가에 올려놓으면 감사로 바꾸어 줍니다. 어떤 수치도 조롱도 주님의 십자가에 올려놓으면 소망으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원망과 불평도 십자가에 올려놓으면 찬송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 욕을 처리하는 하치장입니다. 회복의 능력입니다. 새롭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사랑의 의미요법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엄청난 나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는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오늘의 시련과 고통을 십자가로 이기는 것이 믿음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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