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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을 믿어야 산다(행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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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을 믿어야 산다 (행 5:27-3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최대의 뉴스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부활을 믿으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귀신에게 포로된 자가 자유함을 얻고, 가난한 자가 부요해집니다. 절망 가운데 빠진 자가 소망을 갖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자가 천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소식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시급하게 전해져야 합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고, 싸움과 다툼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지금 종말의 때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부활을 증거 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29절)고 반박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볼 때 부활을 증거하기가 어려운데 사도들은 용감하게 증거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부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믿음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않고 어떤 심증만 가지고 그렇게 담대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목숨을 바칠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예수님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만 이라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안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하신 것 자체에 의미가 있지, 보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랬을 것이고, 또 부활이 참말이다 거짓말이다 하는 논쟁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을 확인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메시야로 모신다고만 하면, 주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눅 4:18-19)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을 확인시키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완악하고 강퍅해서 부활한 사실을 보여 주어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할 것 같으면 벌써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신비한 기적들을 많이 베푸시며 활동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야 됨이 충분히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메시야로 영접하겠습니까?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만민이 볼 수 있도록 하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몇 번 보여 주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부활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그것을 믿느냐는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보통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죽은 자를 몇 번 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5)을 살리셨고, 야이로 회당장의 딸(막 6:42)을 살리셨고,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요 11:44)를 살리셨습니다. 이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과 주님의 부활은 다른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난 후에 때가 되어 또 죽었지만, 주님은 한번 부활하신 후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단순히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얽어맸던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다시 살아났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인류를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형벌입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끝났다고 하면 주님의 죽음은 의미가 없는데, 사흘만에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부활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을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이 내 죄를 해결하신 부활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내가 죄를 범했는데 나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예수님이 죽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청년 시절 철학을 공부하는 친구와 종종 논쟁을 했는데, 바로 이 부활에 대해 설득이 잘 안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믿어지는데, 그 친구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온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입니다. 즉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는 문제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영원히 살고, 부활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을, 호기심만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호기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호기심만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자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 호기심이 신앙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해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다가 고난을 당하실 때 다 흩어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예수 믿고 물질 축복 받는 것, 중병에 걸린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 신비한 영적 세계를 보는 것 등, 이런 것들만 관심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호기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호기심만으로 보면 안 되고, 그 사건 뒤에 숨어 있는 부활의 참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신앙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에는 현세적인 의미와 내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현세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모든 것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구속했던 걱정 근심 고통에서 해방을 받고, 죄와 질병과 사망이 나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인간을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걱정 근심 고민이 없는 자유하는 인생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 부활의 내세적인 의미는 부활을 믿으면 죽음 후에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해결 받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현실적으로 행복하다 할지라도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생이 허무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을 경험하고, 동시에 주님과 더불어 부활한 것입니다. 로마서 6: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지면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전 이화여대 총장 김 활란 박사는 자기가 죽어 장례식을 치를 때 천국으로 가는 환송 예배를 드려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 때 슬픈 조곡과 장례 찬송이 아닌 승리와 생명의 웅장한 할렐루야 노래를 불렀습니다. 죽음 너머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가진 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망이 있어야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괴테는 '인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아무리 화려한 성공일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부활을 믿는 것이 가장 소중한 자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 그 능력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그 무엇도 구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부활 신앙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방해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금 너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부활 신앙이 무력하게 되면 불안과 공포가 있고, 인생이 어둡게 됩니다. 인생을 사는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기쁨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고 일어나 담대히 복음을 외칠 때 세계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 5:42절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 같은 사람은 그 정열이 대단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성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수없이 환난과 핍박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열심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마한 나라,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부활의 소식이 온 세계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전해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개인이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부활 신앙 가게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을 봅니다. 지난날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자기 자랑 속에 살던 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또 부활 신앙이 전해지면 나라가 달라집니다. 영국이 타락으로 쇠퇴의 길을 걸을 때 웨슬레이의 신앙 운동은 빛을 발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영국 사회를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는 술집이 없어지고 카바레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위기의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등,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더군다나 정치인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사방 팔방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금번 4.15총선에서 그런 뜻이 반영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총선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활 신앙으로 무장된 성도들이 일어나서 우리 민족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지난 날 기독교는 반만년 동안 사망의 잠을 자던 우리 민족을 깨운 경험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미신을 몰아냈고, 무지한 사람들을 교육 시켰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 방면에서 큰 몫을 감당했습니다. 세계 속에 존재도 없던 우리나라를 온 세계가 깜짝 놀랄 나라로 만드는데 기독교가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이 다시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아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역사를 깨우던 그 용기를 본받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은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호기심의 차원도 아닙니다. 부활은 인류를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우주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을 믿고 전할 때 그 능력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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