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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창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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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본문 : 창세기 3:17~21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생활요소를 의식주(衣食住)라고 말할 때 역시 입는 문제를 제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의상 문화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많이 변천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사람의 생활에 가장 민감하고 우선 시 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의복이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기능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멋과 아름다움의 수단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신분과 품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의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보면 인간의 범죄와 관련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때나 또는 자연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옷을 입지 않은 맨몸이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고 하였습니다(욥 1:21). 세상에 태어날 때 맨몸으로 나온 아이가 몸을 씻고 나면 곧바로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에는 최초 인간 아담의 범죄 사실과 그 후에 생겨난 두 가지 옷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이 스스로 만든 옷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혀주신 옷입니다. 창세기 3:7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21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되어진 일련의 일들을 보아서 나무 잎의 치마는 범죄한 인간이 벗은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작품인데 반하여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형벌 아래 있는 인간에게 구속과 사죄의 상징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류를 위해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고난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멸망하게되는 그 불행을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1) 벗은 자의 수치

단정한 옷이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옷을 벗은 상태는 스스로 사람의 가치를 포기한 것이며 이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부지중에 옷이 벗어졌을 경우 어떻게든지 몸을 가리우려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사람은 의도적으로 옷을 벗어버리거나 벗은 상태의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 경우는 실성하여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눅 8:27), 성적으로 타락하여 음행을 즐기려는 의도적인 범죄 행위일수도 있습니다(민 25:1). 어떤 경우이든지 이와 같은 현상은 범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불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계 3:18). 벗은 자의 수치심을 깨우쳐주고 그들에게 단정한 옷을 입게 하여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계시록 16:15에 보면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2) 수치를 덮어 주시는 것

옛날 노아는 홍수가 지나간 다음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아의 아들 중 함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비의 옷을 가지고 와서 뒷걸음을 치며 접근하여 그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이일을 알고 난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하였습니다(창 9:25-27). 벌거벗은 모습을 소문내거나 비방하는 사람은 평소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거나 미워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가까운 가족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 안타깝게 여기며 이를 보이지 않도록 덮어주고 감싸주게 됩니다.

이사야 1:18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의 모습도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덮어 주고 양털로 감싸버리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덮어 버리신다는 뜻입니다.

(3) 징벌 중에 내린 사랑

본문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내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곧 사탄인 뱀은 모든 짐승 중에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게 될 것이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당하며 남편을 섬길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먹을 것을 얻게 될 것과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처음 받은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하여 생명과 단절되는 징벌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시점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는 범죄한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곧 자기 백성에게 죄를 다스리시며 징벌을 내리시되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 놓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 주신 최상의 선물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요 3:16).


Ⅱ.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주기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들어내고 멸망의 불행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 사죄와 구속의 언약이 되는 상징으로써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1) 피흘림의 의미

옷을 만드는데는 여러 가지 소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목화나 삼과 모시와 같은 식물에서 길쌈을 하여 실을 뽑아 옷을 만들었고, 누에고치 또는 양털을 깎아 견직물과 모직물로 옷감을 만들었습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각종 화학 섬유까지 등장하여 다양한 재료들을 쓸 수가 있지만 유독 가죽으로 옷을 만들게 되면 반드시 피흘림의 희생이 따릅니다. 가죽으로 만든 옷이 벌거벗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준다고 할 때 이는 피흘림과 사죄의 도리를 말하는 성경진리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에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게 하였습니다. 레위기 17:11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대신 죽음의 원리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는 가죽을 제공하는 짐승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곧 죄로 인하여 죽어야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이 죽게 되는 또 하나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대신 죽음의 원리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도 어린양이 대신 죽게되었습니다(창 22:1-14). 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뽑아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때 죽음의 사자가 애굽전역을 휩쓸며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죽일 때 피가 묻어 있는 집은 넘어갔습니다(출 12:1-13). 이렇게 피를 흘린 유월절의 어린양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준 속죄의 양들입니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는 범죄한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대신 지워 처리하게 하는 속죄의 원리를 제도화 시켰습니다. 레위기 16:21-22에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세례요한은 그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그곳에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소리쳤습니다(요 1:29).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 아래 놓인 인류의 죄를 대신 맡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맡으시고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일을 두고 그가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3-24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Ⅲ.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행위인 동시에 아담으로서는 상상 밖의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사야 9:6에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에 대하여 인간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관계였음을 말해줍니다.

(1)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한 일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는 첫눈에 저희가 벗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창세기 3:7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가 어찌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우선 눈에 보이는 부분의 일부를 가려보자는 궁여지책에 불가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쫓겨나는 아담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작 저희들의 머리를 쓰고 고안해 낸 것이 무화과 잎의 치마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의 문명이고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얼마 못 가서 망가져 버리고 벌거벗은 모습은 그대로 수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완전한 것이며 영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롬 3:20-22).
 
(2)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요 1;12-13). 구약의 경우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선택된 백성(聖民)으로 불리 웁니다.
한편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또는 은혜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육체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바 되고 성령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뜻을 지닙니다. 로마서 6:6-7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성도의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사유함을 받고 하늘나라의 영생을 소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를 항상 죽이며 살아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요 거룩을 지향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로마서 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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