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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부활과 내 삶의 의미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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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과 내 삶의 의미 (마 28:1-10)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가슴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본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지경을 헤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어 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어 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 흑암의 세계에서 은총과 빛의 세계로 우리를 옮겨 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이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들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의 시장을 방황하는 곤핍한 영혼들이 아닙니다. 의와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과 죄악의 시장을 방황하는 영혼이 아닌 이상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은총과 은혜를 소유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정지되었던 호흡이 다시 시작되고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물리적 재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장례를 치른 지 사흘이 되었고 물과 피가 빠져 버리고 다시 말하자면 이전으로의 복귀가 아닌 새로운 대 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처럼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등장하여 돌을 굴려내는 새로운 생명으로의 진입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동됐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죽음을 깨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신 것은 이 지상에 있는 인간 세계에 새로운 세계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백성들에게 더 이상 죽음은 공포가 아닙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이제는 누구든지 담대한 생명으로의 환희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5에서 담대히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자유와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보혈로 인하여 동일한 생명을 품은 우리들은 200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 속에 첫 번째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부활의 정서, 즉 부활에 대한 느낌입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리고 체험하고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무서움과 동시에 다가오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의 동시적인 느낌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부활이 왜 무서움으로 다가옵니까?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친히 가르치셨어도 이들은 믿지 못하니,알지 못했고, 알지 못하니 예상치 못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흘려 지나쳐 버렸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못할 만큼 깨닫지 못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인간들이 예측하지 못해도 불구하고 살아나셨단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지식이 짧고 하나님의 뜻을 미처 간파하지 못해서 예측하지 못해도, 주님은 권능으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보여 주신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측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해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권능으로 다가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상 못했던 이들에게 놀라운 일로 다가오시니 그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입니다.
더욱이 이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권능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파도를 잔잔케 하며, 자연을 정복하신 예수님, 야이로의 딸을,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이셨지만 그들은 적어도 그 일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이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있다면 나는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 라는 것을 그들은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제 세상을 떠났으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죽으셨기에 오히려 그 자체를 가지고 본인 스스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신이었던 것을 이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인가? 예수님은 그 권능 자체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갖지 못했던 어리석은 인간들, 그러나 그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 앞에 우리 인간들은 왜소하고 초라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총의 역사 앞에 인간들은 환호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약하고 범죄 한 모습 속에는 좌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떨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 앞에 환호할 뿐 아니라 두려움으로 전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번째 목격한 사람들은 이렇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상하지 못했던 역사가 이들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 무서워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큰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상한 어떤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그들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예측도 못했던 기쁨을 그들은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라도 부어드리고 싶어 무덤에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다못해 예수님의 시신 곁에라도 한 번 있어 보려고 아니면 예수님의 무덤 곁에서 예수님의 체취라도 느껴보고 싶어 그들은 갔지만 안타까움 속에서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갔지만 그들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쫓아다니던 사람들,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소망이요, 삶의 목표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이 없어졌으니 소망도 삶의 목표도 없는 공허한 삶이 되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쟁기를 든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이들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세상에 주님이 없어지니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낙심의 지경에서라도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한 번 가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신이라도 거둘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이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예상을 못했던, 그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는 기쁨이라도 얻기 위해서 갔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계획하고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크기는 전혀 우리의 마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을 고치러 나왔는데 병보다 더 큰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환난과 곤고를 해결하러 나왔는데 환난과 곤고를 능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소유하게 됩니다.
더욱이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현실들로 나타나 그들의 모든 욕구를 일거에 해결해 줍니다. 전혀 예측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가 생긴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달려갈 푯대가 생긴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드릴까요? 전쟁이 일어나서 사랑하는 남편이 전쟁터에 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가 열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전쟁이 끝나서 남편이 돌아올꼬?’ 생각했는데 안타깝게 다가온 것은 전쟁의 전사 통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너무 슬퍼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울다 울다 그 눈물도 마를 때가 되면 이제는 남편을 잃은 슬픔도 있지만 ‘아이들을 어찌할꼬?’ 하는 삶의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삶에 대한 자구책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괴로워 어려워하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중에 어느 날 문밖에 두드리는 소리 있어 밖에 나가보니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을 단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쯤은 우리는 전후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이 순간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니 그는 의식주의 문제, 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회복하게 되고 그 삶의 모든 기쁨과 소망을 송두리째 회복했던 것입니다.
예기치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 그 어려움을 다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의 심정은 조그마한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기 위해서 나갔는데 근본적으로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모든 목표를 새롭게, 모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슬픔과 비감을,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곤고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그들의 생활보다 더 큰 은혜요 힘입니다. 그들의 삶을 뒤바꿀 삶 자체보다 더 큰 힘이요 변화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보다 더 큰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는 것, 우리의 삶의 모든 느낌, 생각보다 더 크다 이 말입니다. 지금 현재의 우리의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 버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땅을 발로 차고 버티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해도 우리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우리를 끌고 가면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내 생활은 너무 곤고해! 너무 고통스러워! 나에겐 기쁨이 없어! 눈물밖에 없어!’ 라고 가슴 아파 하려고 작정을 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오시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 마음에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시는 기쁨이 없는 거야.’ 라고 우리 스스로 마음에 다짐을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웃지 않을 거야.’ 라고 마음에 다짐했던 사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면 이제 그 삶의 의미가 재구성되고 새로운 능력으로 주 앞에 기쁨과 도움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로 십자가를 따라 간 여인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구슬픈 눈망울로 그 십자가를 목격한 여인들, 가슴에 눈물을 품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 그러나 그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였습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더불어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이 큰 기쁨과 무서움이라는 두 가지 복합적 정서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도대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활의 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 부활을 전하라는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이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7절에 보니 ‘갈릴리로 가시니 너희가 거기서 주님을 볼 수 있으리라’ 빨리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을 때 그 여인은 뒤도 안 돌아 봤어요. 무슨 말이죠? 가슴에 너무 뜨거운 벅참이 있어 자신의 위치나 여건은 생각하지 않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뜨거운 가슴으로 달려갔다 이 말입니다.
이 때는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곳곳으로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이 전의 고향을 찾아 내려가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그들은 살기 위해서 급급했던 이와 같은 시대라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살풍경한 시대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변의 여건도, 주변의 사람도, 어떤 일이 있건, 이들은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감격이 체험되면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이라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권능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고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난 주님의 권세가 소유되는 한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이해관계도 능가하는 주님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의 마음의 색깔까지 바꿉니다.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려고 왔던 여인들, 걱정하며 근심스러운 어두운 빛깔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사실을 안 이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떠나 달음질 할새.’ 설레임, 기대와 부품과 가슴 한 가득한 소망의 마음, 바로 이와 같은 밝은 색깔로 이들의 마음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슬픔의 색깔에서 기쁨과 소망의 색깔로 바뀝니다. 낙심한 사람들, 소망을 잃은 사람들, 가슴 답답한 사람들, 새로운 기대를 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구원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분명히 마음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하셨듯이 우리의 모든 낙망과 인생의 좌절과 고통과 번뇌의 늪 속에서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달라지는 것 있죠? 우리 마음이 색깔이 바뀌어요.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이 되요. 불가능 속에 가능성의 작은 빛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멀리 보면 길이 없어 보이는데 분명히 그 가운데 확연한 길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막힌 담 가운데 헤쳐 나갈 길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높은 산도 헤쳐 나갈 마음의 용기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 믿으면 마음의 확신과 자신감과 긍정적으로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 믿으면 마음에 이런 생각 들죠?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마지막에는 주님이 결국 해결하시겠지요.’다시 한 번 ‘마지막에는 주님이 결국 해결해 주십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서 처리하시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에 가지는 생각, 이런 표현이 아주 어려운 표현이지만 용서하시고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아무리 어려워도 죽이기야 하시겠나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죽게 놔두게 하시겠나요?’
그래요. 삶의 언덕 위에 어려움이 있죠. 삶에 슬픔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깊은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놔두시지 않아요. 마지막 순간에는 손 내밀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의 백성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생명의 권세를 소유한 백성의 마음이라 이 말입니다.

야곱의 족속들이 세겜 족속들에게 쫓김을 당해요. 야곱의 아들들이 디나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의 딸 디나로 말미암아서 세겜 족속들에게 거짓말하고 그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요. 그랬더니 세겜 족속들이 수가 많은데 가만히 있겠어요? 야곱의 족속들을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겁니다. 야곱이 온 식구들을 불러서 ‘우리가 다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세겜 족속들이 쫓아와요.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죠? 사변 골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오게 하는 마음을 없애 버렸어요. ‘쫓아가지 말자.’ 하는 마음이 들게 했다 이 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가지고 늘 기도해요. ‘ 하나님, 우리 성도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다 성도들을 돕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우리 마음에 슬픔과 아픔을 끼친 자들이 다 기쁨과 즐거움을 끼치는 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주변 사람들이 다 기쁨 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놓는데 어떻게 견디겠느냐 이 말이에요. 모두가 돕는 사람들이 된다 이 말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을 보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으니 사십 년을 가고 또 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들은 ‘싸우다 보면 정복하겠지.’ 라고 생각하니 그들은 긴 정복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하루 이틀 싸우는 것도 아닌데 끝이 없이 지루한데 날마다 어떻게 용기백배 하겠습니까? 싸우고, 싸워도 싸울 거리가 끊이지 않은데 어떻게 지치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와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힘입니다. 예수 부활의 아름다운 능력과 소망을 근거로 삼는 백성에게는 이와 같은 인내와 기대와 소망의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의 색깔을 바꾸어 기쁨으로 만드는 것, 우리를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게 하신 것,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하고 그 권능과 권세에 동참했습니까?
오늘 부활을 목격한 이 여인들, 끊임없는 충성과 변함없는 헌신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 아니면 아무런 할 일이 없고, 예수 아니면 내 소망의 푯대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왜 중요합니까? 이 여인들의 모습.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챙긴다 한들 이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 좋아질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을 때,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릴 때, 기적의 떡을 먹여줄 때,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구름 떼 같이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을 쫓아다니면 마침내 그 나라가 임할 때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나는 이제 소망이 있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아니야. 예수님을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도 나는 그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엔 기쁨이 되는 거야.’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헌신했던 충성의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동기 속에서 이루어집니까? 누구랄 것도 없이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우리의 필요와 소용에 의해서 마음의 애절한 간절한 소원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주님 앞에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점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리면 부모의 보호를 받으나 장성하면 오히려 부모를 보호하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 성숙한 자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글이 있어 메모를 해 두었습니다. ‘내가 돈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졌던 십자가를 세신다. 내가 소득을 헤아릴 때, 하나님은 내가 희생한 것을 헤아리신다. 내가 세상의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셀 때, 주님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를 세신다. 내가 소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열매를 헤아릴 때, 하나님은 내가 주님께 받친 순종이 몇 번인가 헤아리신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간단하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불신앙이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이 신앙이다. 괴로워도 순종하는 길, 그것이 신앙의 길이다.
끊임없는 충성, 변함없는 충성, 기대할 수 없음에도 하는 충성, 정말 예수님이 좋아서 감사해서 이루어지는 섬김과 충성입니다.

더욱이 부활을 목격한 부활의 참여자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달려가는 이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나타날 필요도 없죠. 천사의 소리를 듣고 이미 그들의 눈으로 부활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달려가는 이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천사들이 한 말을 반복하여 ‘갈릴리로 가라. 내가 거기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뻐하는 자들에게 더 기뻐하도록 확증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감격을 더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려움에 부착했을 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살아계시다. 살아계시다. 무덤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다.’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하늘의 권능과 은총을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그는 늘 외치며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코자 합니다.
겨우내 숨죽였던 나뭇가지들을 보면 그 나뭇가지 가운데 죽은 가지들도 있고 살아있는 가지들도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가지인지 살아있는 가지인지 우리는 봄이 되면 압니다. 겨울에는 까맣게 말라 있어 모두가 다 똑같은 것 같으나 봄이 되면 죽어 있는 가지는 바싹하니 말라있다 외부에서 충격을 주면 부서지게 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가지는 봄이 오면 분명히 다르니 생명이 움돋아 녹색의 새싹을 틔우게 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대자연의 푸른 수목을 이루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엄밀히 말씀드리면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이 다시 솟아난 것뿐입니다. 무덤에 머물러 계시다 생명으로 다시 소생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다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차이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실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영원히 주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2004년 부활절!, 한 잎 피었다 지는 꽃과 같지 않고 영원히 피어 있어 우리 가슴 속에 생명의 지속함을 이루는 아름다운 꽃, 예수 그리스도!, 그 부활의 아름다움, 그 단어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이 절기에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민족 모든 백성 전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온 만방 민족들에게 주님의 살아계신 능력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24:7,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잠가 두었던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영광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총이 우리 가슴에 임하도록 우리 가슴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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