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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시는 왕 (눅 19: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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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19:28-44 
제목 : 우시는 왕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하시니라. (눅19:28-44)

최근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전 세계의 화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다녀온 요르단과 이라크는 벌써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더군요. 모슬렘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꼭 보십시오. 저도 보았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보았으면 해서 영화사에 알아보았더니 교회에서 상영하기는 기계의 문제도 있고 해서 어렵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 교회에 와서 영화를 보러가라고 권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 1부 예배를 마치니까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제게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번 주 동안에 가족과 함께 그 영화를 보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고난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 새벽기도에 모두 오셔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발자취를 함께 거닐며 그 뜻을 묵상하며 기도시간을 가집시다. 이번 성금요일은 예수님이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으니, 여러분은 해가 있는 동안 한 두 끼 금식하시고 밤에는 온 가족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그날 성가대는 하이든 곡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합창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는 노는 것을 자제하며 거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부활주일 아침에는 모두 함께 모여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오후에는 성남 실내체육관에 모여 성남지역 교회 연합 부활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십시다.

어제 밤에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셨습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두 가족이 있었는데,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가족과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시몬의 가족입니다. 그들이 함께 예수님께 저녁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주무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난의 첫걸음을 내디디신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는 2km 정도 거리인데 그 중간에 벳바게라는 동네에 도착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하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자들은 그 동네에서 매여 있던 나귀새끼를 보았고, 풀어가려니까 주인이 왜 그러냐고 물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했더니 허락하여 제자들이 당당하게 그 나귀를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우리는 벽을 투시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셨어도 거기에 나귀가 있다는 것과, 또 주인에게 뭐라고 말하면 보내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미래를 아시고 영의 세계도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 보통 사람이 우리를 위해 죽는다고 하면 아마 “당신이 뭔데?” 할 것입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세를 무슨 돈으로 낼까요?” 했더니 예수님께서 “요 밑에서 그물을 던지면 고기가 잡힐 것인데 그 입을 열면 동전이 들어있을 것이니 그 동전으로 세금을 내자” 하셨습니다.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참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분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 정복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차고 입성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 섬기러 오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를 타려니까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기의 옷을 벗어 나귀등에 깔고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무슨 옷을 골라 입을까 고민하지만 그 때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나귀안장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이 아침에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도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앉혀드리는 사랑과 헌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원합니다.

예루살렘에 다 오면 마지막에 언덕이 있습니다. 그 언덕에 서면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그 꼭대기에 오르시자 예루살렘의 순박한 대중들과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마음껏 환영했습니다.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37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인간이 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기적들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대속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환호를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환영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가시는 길을 격려해드리며 “호산나”와 “영광”을 외칩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나오는데, 성경에 따르면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가까이서 섬기며 동행한 사람들이 어찌 그리 이해를 못했을까요? 너무 바빠서, 너무 급해서, 너무 일에만 열심이다 보니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지는 않습니까? 제가 보아온 바로는 교회에서 일을 하는 것은 주심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매일 나오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가까이 있다가 영적인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원도 교회에 매일 출근하니까 그만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로서 장로로서 안수집사로서 권사로서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회장으로서 너무 바쁘게 일하다가 영적인 은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 그랬다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도록 날마다 도전하여주시옵소서. 늘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또 한 그룹은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예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화를 내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좀 야단치세요”(눅19:39) 하고 나무랐습니다. 이에 오히려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을 냈습니다(마21:15). 이에 예수님은 “아이들과 젖먹이들에게서 찬양을 완성했다는 성경말씀을 읽지 못했는가?”반문하셨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히 “Yes!"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No!”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모르고 거부하는 가족, 친척, 동료, 이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학의 이름으로 복음을 거부합니다. 제 후배 한 사람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썼더군요. 이런 분들이 아직도 세상에 많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주위에도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지난주에 세례 받으신 남자 성도 중에 제가 참 오랫동안 기도하고 기다려 왔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난 지 십 몇 년 만에 그분이 세례 받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제 마음이 기뻤는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저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Yes!" 하셨는데 우리가 뭔데 "No!" 합니까? 모두 마음 문을 열고 하늘에서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그분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보시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지요.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또한 예수님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43) 탄식하셨습니다. 영적 무지가 세상을 휘두르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만연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나와 나 자신이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이 복음을 전해서 다른 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를 통해 깨닫게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때가 A.D. 30년 쯤 되었는데 40년 뒤인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포위당했습니다. 이 기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성 안에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항복을 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애국자들은 죽어도 항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해서 결국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잡혀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어린 아기들을 내동댕이쳐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도시의 멸망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일제 36년도 원통하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서 소위 'Diaspora Jew'가 되어 남의 나라에서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까지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이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만들자 유대인들이 “이것은 반 유대 운동이다”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그가 무죄함을 세 번이나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 바나바를 내어 놓으면서까지 예수를 구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바나바를 선택했지요.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 죽였습니다. 그들만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온 인류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죄 때문에! 온 인류라고 하니까 내가 안 끼어있는 것 같습니까? 피너츠(Peanuts)라는 만화에 보니 챨리 브라운이란 개가 “I love humanity. But I hate people”(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증오한다)라고 하더군요. 나 또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죄 때문에,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내 생명을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0:18).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이 또 있습니다. 자기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몰라본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늘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땅의 사람들이 하늘에 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건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면 이제는 2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하나님과 영원히 등지고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은 2천년 전 예루살렘의 멸망과 비교할 수도 없는 비극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인간의 죄 사함과 구원과 천국을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 옛날 순진하게 예수님을 맞이하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오늘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합시다.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깊은 영적 깨달음의 은혜가 있어 영혼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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