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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이 고백한 부활 신앙 (욥 1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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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욥이 고백한 부활 신앙
본문 : 욥기 19:23~27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욥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가운데서 가장 많은 교훈을 주는 사람입니다. 특히 환난과 질고가 많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사람들에게 인내와 소망을 갖게 하는 표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5:11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흠잡을 데가 없는 대표적인 신앙가라고 인정하셨습니다(욥 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칭찬은 그가 사단의 시험에 걸려 극심한 환난을 겪으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욥기에 나오는 많은 기록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고백 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 말씀 중에는 그의 연약함과 육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원 불변하신 언약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26절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는 말씀은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의 진리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육체가 썩어져 가는 죽음의 현실을 겪으면서도 저를 위한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그분의 역사로 죽음 밖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뜻깊은 부활절에 고대의 실존인물이었던 욥의 고백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인 부활신앙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Ⅰ. 살아 계신 구속자

25절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구속자」의 뜻

구속(救贖)이라는 말의 구약적인 의미는 「대신 갚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다시 회복시켜주는 「고엘」(???)제도가 있습니다(신 25:5-10, 레 25:25). 가령 어떤 사람이 많은 부채를 지고 재산을 채권자에게 넘겨주었거나 그것도 못할 경우 가족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데 이때 가까운 친족 중 그 채무를 갚아주고 재산이나 가족을 회복시키는 경우입니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가 몰락한 엘리멜렉의 가정에 재산을 물어주고 끊어진 가계(家系)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룻 2:20). 여기 본문 말씀에 욥이 말하는 구속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43:1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14절에는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말하는 “구속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지칭하였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살아 계신 분입니다.

본문 말씀 중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계시다는 것은 죽음과 상관없는 자를 뜻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자존자 입니다(출 3:14).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신 생명이라고 하였고(요1 1:1),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이 공급되었다고 하였습니다(요1 : 3-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는 살아있다는 생명의 도리가 얼마나 절실하고 희망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살아 계신 구속자를 말하고 있는 욥은 지금 최악의 절망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한순간 모든 재산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들, 딸 십 남매를 잃었습니다. 자기 몸은 온통 피고름이 흐르는 질병으로 아픔이 극심했습니다. 가까운 친구들과 아내마저 저를 자극하며 다그치는 통에 깊은 갈등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잿더미에 앉아서 생일을 저주하고 모태에서 살아 나온 것을 원망하였습니다(욥 3:1-11).
이처럼 죽음과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 계신 구속자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비로운 믿음의 세계에서 가능한 일이며 생명과 부활의 신앙으로 얻게되는 환희인 것입니다.

(3) 살려 주는 구속자 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깊은 좌절과 슬픔에 빠져있는 마리아 마르다를 위로하시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불러 일으키셨습니다(요 11:43-44). 상여에 실려 장지로 향하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었습니다(눅 7:11-17).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방금 숨을 거둔 현장에서 「달리다굼」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살려주었습니다(막 5:38-41).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신 현장을 기록하면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가 크게 놀랐다고 증언하였습니다(눅 7:16). 그렇지만 이런 일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는 생명의 본체입니다(빌 2:6). 요한복음 6:40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Ⅱ. 육체 밖에서

26절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욥이 육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있는 부활의 확신을 피력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인간의 구조적 성질을 논할 때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었다는 이분설(Dichotomy)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체를 만드셨고 그 위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데 근거를 둡니다(창 2:7). 따라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사람이 된만큼 이것이 분리가 되는 것을 곧 죽음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1) 육체의 한계

창세기 3:19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판을 예고하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흙”이라는 말은 그의 육체를 뜻하는 것으로서 본래 흙을 빚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영혼이 떠나고 육체만 남은 것을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약 2:26). 이사야 선지는 코에 호흡이 끊어지면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2:22). 사실 사람에게 호흡이 멎어지면 그 순간부터 육체는 썩어지기 시작합니다. 숨을 쉬고 있더라도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기 때문에 질병이나 사고를 당할 때는 여지없이 망가집니다.

욥의 경우 그 당시 숨만 쉬고 있었을 뿐 온 몸은 악창으로 인하여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는 그 아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재에 앉은 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욥 2:8). 이와 같은 상황을 그는 자기의 가죽과 육체가 썩어져 가는 과정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영양섭취를 잘하고 완벽하게 건강관리를 한다하여도 썩어지고 망가져가는 육체를 지킬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히 9:27).

(2) 영혼불멸의 신앙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곧 흙을 소재로 하는 육체는 물질이고 하나님께로서 부여된 생명은 영혼입니다.
물질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노후화 되지만 하나님의 성품인 영혼은 시간이나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성질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질은 쇠잔해져도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혼은 하늘나라에까지 영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지 않는 영혼이 어떤 상태로 오래도록 지속되느냐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세계에서 두 종류의 생명이 전혀 다른 대조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는 불과 유황의 꺼지지 않는 연기 속에서 고통으로 인하여 쉼을 얻지 못하는 경우이고(계 14:10-11),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행한 일에 따르는 상급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3) 신비로운 부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의 진리는 참으로 신비로운 도리입니다. 일부 종교에서 영혼불멸을 말하고 윤회전생(輪回轉生)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변화된 몸으로 영생복락 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본문 26절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는 욥의 고백은 부활에 대한 그의 확신을 피력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4:16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육체로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적이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고는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15:52-53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Ⅲ. 부활신앙의 소망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면서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 신앙의 위대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6-19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1) 죽음 아래 있는 인간

지혜자 솔로몬은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전 1:13).
욥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욥 5:7). 욥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사람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은 최악의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욥기 3:25-26에 보면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죽음 아래서 당하는 고통의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고의 신음소리를 부활 소망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일 경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며 죽음을 재촉하는 파멸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계시의 환상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신기한 사건에 접하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이적을 볼 때마다 이를 기이히 여기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하고 경이감을 표했습니다(마 14;33).

한번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신비로운 천상의 정경을 바라보고 황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7:1-7). 바로 그 시간 산 아래서는 아홉 명의 제자들이 간질 병든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상존하는 현장에서도 성도들은 때때로 하늘이 열리고 천당의 황홀한 계시와 환상을 보게됩니다(고후 12:1-4). 말하자면 체질 세계에서의 당하는 고통과 다른 한편으로 죽음을 넘어선 부활과 영생의 소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 이와 같은 계시와 환상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7-18).

(3)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승리

성경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부활과 영생의 신앙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게 하여 주십니다. 로마서 8:35-37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욥은 확실히 부활 승리로 말미암아 이기는 삶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구속자를 믿었고 그의 육체가 썩어지고 없어지더라도 반드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모든 것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욥 42:7-9).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죽음과 직면하는 안타까운 현실의 연속이 되더라도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큰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며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15: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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