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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과 부활의 함수관계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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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전15:1-11
제목: 죽음과 부활의 함수관계
2004. 4. 11 (부활주일)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의 생애와 가정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침에 고린도전서 15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교회가 처음 세워졌던 1세기에는 오늘날과 달리 신학이 체계화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교회는 유대교와 헬라철학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대교는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어져 율법에 대한 해석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문제로 예수님과 심한 논쟁을 벌일 만큼 철저히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헬라사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부활을 믿지 않던 이들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는 적잖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가 대표적인 교회들이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외부적인 어려움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세워놓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소식보다도 이와 같이 흔들리는 소식을 접하고 이들에게 바른 교리와 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내의 여러 문제를 짚고 넘어가다가 여기 15장에 와서 드디어 부활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전체가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일명 '부활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부터 11절까지의 전반부는 '주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이고, 12절부터 34절까지의 중반부는 '우리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35절부터 58절까지 후반부는 '육체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육체의 부활, 바로 이것이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부활을 통해 당시 성도와 우리에게 소망과 은혜를 강조하고, 부활을 통해 나타날 세상 마지막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서 ‘부활’ 이란 단어만큼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본문은 물론이고, 뒷부분에서도 죽음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뗄 수 없는 관계,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둘은 마치 수학에서 배운 것처럼 ‘함수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과연 죽음과 부활은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 죽음과 부활은 정비례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곧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함께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죽음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이 둘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이것을 말합니다. 특히 3절 4절에 분명히 강조합니다. 주님이 성경대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바울이 말하려는 부활의 가장 확실한 선언입니다. 부활을 말하면서 죽음을 같이 언급합니다. 같은 비중을 두고, 같은 선상에 놓습니다. 죽음이 있고, 또한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반부, 후반부에서 부활을 말할 때에 동일하게 죽음을 언급합니다. 여기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록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죽음과 부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는 곳에 죽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이야기 뒤에 언제나 부활로 이어집니다. 부활을 말할 때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죽음과 부활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죽음이 고난이라면, 부활은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죽음과 부활이 함께 가는 것처럼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갑니다. 고난만 있지 않고, 부활만을 있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통해 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갑니다. 고난 없이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영광은 고난 후에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었기에, 만물을 주님의 무릎 앞에 꿇게 하는 영광에 이른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영광이 있고, 영광은 바로 고난 속에서 꽃피운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갑니다. 우리 삶에 언제나 영광만 있지 않습니다. 늘 즐거운 일만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 어려움이 없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습니다. 잘되던 사업이 곤두박질 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압박으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몸에 질병이 생깁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도 옵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왜'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된다고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느냐고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풀지 못하다가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 영광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를 때가 있고, 눈물의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시온의 대로처럼 잘 보이다가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두움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우리 삶에 병행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7:14)

  예수 믿고 영광만 얻으려는 것은 반쪽 신앙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때론 고난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대로 믿을수록 더 어려움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제대로 믿으려 할 때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아니었고, 물질의 복이 아니었습니다. 시련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현장에서 가운데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영광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릴 수 있어야 고난의 때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에도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영광만 있지 않은 것처럼, 또한 고난만 있지도 않습니다. 고난이 분명 있지만 고난은 끝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영광의 자리에 이를 때가 옵니다. 시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힘을 줍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의 시련은 감당할 수 있고, 피할 길이 있습니다. 믿는 자의 아픔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프면, 주님도 아파하시고, 통곡하면 성령님도 탄식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곳이 회복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세상에서 흘린 눈물과 땀을 닦아주고, 면류관을 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영광과 회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내도, 그 자리에 이를 때 회복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이 두 손을 벌리고 영접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픔이 없는 곳, 영광이 있는 곳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입니다.

  1세기, 혹독한 시련이 찾아올 때 신앙인들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하며 산것입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죽음과 부활이 함께 갑니다.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갑니다. 슬픔과 기쁨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영광은 고난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 진리를 새기시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죽음과 부활은 반비례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죽은 만큼 많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부터 11절까지가 바로 이것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말하면서 부활신학의 논리와 체계를 잡아가다가 갑자기 자신의 신앙체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신학’보다 ‘신앙’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여기서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겸손함이 몸에 베어 있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가리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의 나된 것, 지금까지 이렇게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가 열심히 일하고 땀흘려 얻은 영예와 공적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참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달라진 모습입니다. 옛사람은 자취를 감추고 주님을 만난 뒤 그의 새로운 삶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그는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폭행자요, 훼방자였던 사람입니다. 지식을 의지하고, 경험을 내세우고,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쥐고 보란 듯이 살던 사람입니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그 오만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무고히 헤쳤는지 모릅니다. 그 방자함으로 많은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는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결코 자아가 죽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어느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다메섹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뒤 평생 마음에 새기며 고백한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주님을 만난 뒤 그는 자기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죽어야 사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그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교만을 죽이고, 욕망을 죽이고, 분노를 죽이고, 경험과 지식을 죽이고, 자존심을 버리고, 옛사람을 죽입니다. 죽기를 연습하며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그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그는 누구보다 큰 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작은 자’ 라고 말합니다. 사도중에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는 부활의 메시지를 그의 삶으로, 인격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사는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아침에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의 신앙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내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끝나야 그때부터 하나님이 시작합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는 것입니다.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도 삽니다.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삽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나라가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보십시오. 모든 어려움과 혼란에는 대부분 아직까지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야 사는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로 죽으셨습니다. 한 알이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두가 자기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분노와 더러운 죄와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살면 결코 영원한 세계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버리고, 자기를 죽이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옛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까! 아직까지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정과 욕심이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을 따라가는 육신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를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모두 이렇게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살수 있도록,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맺습니다. 죽음이 부활과 함께 갑니다.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갑니다. 그리고 내가 죽어야 진정으로 삽니다. 2004년 부활의 뜻깊은 아침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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