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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부활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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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요한복음 20:24-29)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내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부활절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죽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라면, “죽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아대국어사전에서 죽음은 ‘죽는 일’, ‘절명’(생명이 끊어짐을 의미) 그런 정도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하고 말합니다. “눈앞이 캄캄했다.”는 그 캄캄함이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끝났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이 있는데 그 딸이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딸을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율법을 낭독하고, 성전의 제사를 대신하는 회당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제사장이나 율법사들의 눈에 벗어나는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딸을 살리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회장장이라는 직책도 버릴 각오로, 심지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는 그런 비난을 받을 각오로, 그런 각오로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참람되게 하는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예수님께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내 딸이 병들었으니 오셔서 고쳐주십시오.”
그 별 볼일 없는 목수의 아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곤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입니다.
그때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방금 죽었으니,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당신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시고 온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죽었으니 어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죽었는데 어찌 하겠습니까? 어떻든 숨이라도 붙어있어야 살리지, 죽었는데 뭘 어찌하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의 마음은 복잡했을 겁니다. “진작에 예수님을 보시고 갈 걸. 괜히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망설이다가 예수님으로부터의 고침 받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거고, “그렇게 죽을 거라면 괜히 예수님을 찾아 갔네. 딸도 죽고, 이젠 회당장 자리도 내놓아야 하게 생겼으니……. 유대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딸 아리를 살릴 수 있는 기회도 이젠 끝났지만, 회당장으로서의 직무와 삶도 이젠 끝났구나 하는 순간입니다. 이 때 회당장은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찾아가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 무덤은 동굴인데, 그 문은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이들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죽었으니까, 이미 끝난 겁니다.”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그때는 그래도 숨 쉬고 있었으니까 고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늦었습니다.” “돌문을 열라니요? 열어서 뭘 어쩌시게요?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나는데, 이미 살이 썩기 시작했는데 뭘 어쩌시게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겁니다. 끝난 것,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목사님,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답니다.” 그리고 뒤따라온ㄴ 것이, “이젠 끝입니다.” 어떻게든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고 애쓰고 애쓰다가, “목사님,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부관계를 어떻게든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애쓰다가 “목사님,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났구나.” 하는 순간,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하는 순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끝났구나.” 하며 번민하는 회당장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끝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네 오라비는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끝났구나.” 하는 그 순간이 주님의 은혜를 받는 순간입니다.
보십시오.
화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하얗게 마른 뼈들도 살아났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인 겁니다. 사도 바울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그래서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랬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을 죽음에서, 끝났다고 하는 순간에서도 살리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이 땅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꿉니다. 전쟁을 평화로 바꿉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꿉니다. 불평과 원망을 감사로 바꿉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바꿉니다. 질병을 치유로 바꿉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보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이야기 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 손에 잇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얼마나 확실합니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손으로 창에 찔린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요. 제대로 믿으려면 그래야지요.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리 다 꼭 보고서야 믿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내가 꼭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전해주는 사람이 믿을 만 하면, 그가 전한 내용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고 잔해주고 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여인들이 보았습니다. 주 남자가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9절, 그 주간의 첫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사방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도마의 의중은 “웃기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 눈으로 그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 하겠소.” 하고 말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이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간 도마는,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볼 겨를도 없이,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 볼 경황도 없었을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 3절 이하에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한ㄴ 것입니다.” 그 후에 한 번에 500명, 다음엔 야고보, 그 다음엔 모든 사도, 맨 나중에는 바울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20)
그들은 이것을 보고, 이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20절에,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고, 우리는 그 전한 것으로 보고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수시로 하신 말씀은 고난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당한다는 것도, 더욱이 죽는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죽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있었다. 무덤이 비었다는 여인들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결국 무덤가지 달려가 눈으로 보고서야 여인들의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8절에서, 그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보다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죽으심과 부활인데 왜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까?
늘 인간의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힘든 사람 중 하나가 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어찌나 고집과 주장이 쌘 지……. 물론 세상 사는 데는 필요합니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식이란 별게 아닌 것입니다. 마치 태양 빛 앞에 반딧불이만도 못한 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조상을 자랑합니다. 우리 문중 몇 대 할아버지께서 정승, 판사 하시고 어쩌고 그럽니다. “보았어요?” 하고 물으면 대답은, 조상들로부터 전하진 이야기, 그리고 족보가 있으니 맞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분명하고, 수많은 사람이 공통적인 전해준 이야기와 성경은 왜 못 믿는지…….
그리고 보면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 못 받고는 본인의 책임인 겁니다. 못 믿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야 하는 진리 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안 믿었으니까 말입니다.

어떻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마리아가 (11절)“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2절)“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려 울고 있는 마리아 에게 (16절)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17절)에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하신 것을 보면 마리아의 너무 반가워서 덥석 예수님을 끌어안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19절)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모두 숨어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고 별의별 생각 다 하고 앉아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들이 그렇게 믿고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따랐던 병자를 살리시고 죽은 자 살리시던 그런 그분이 죽으셨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저녁시간, 방 안은 어두워지는데 누구 하나 일어나서 불을 켤 수 있는 그런 분위기도 못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 나타나신 예수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두 손가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성경은 (20절)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기록 했지만, 그 정도였을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가슴만 쿵쿵 뛰는 그런 기쁨이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이런 기쁨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을 경험하십시오.
2) 주님을 만난 자들은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그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31절)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33절)그들은 곧 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34절)모두들 말하기를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는 것이었습니다. (35절)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때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 베드로를 만난 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일전에 자기의 스승이신 예수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예수님을, 죽어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만나셨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나는 너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바울. 그러나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대제사장의 편지를 들고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주님의 진정한 일꾼 되십시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절망은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예수님, (32절)그들은 서로 말하셨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은 곧 바로 일어나서 예수님 게로 돌아갔다.
요한복음 21장 1이하, 시몬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디베랴 바닷가에 않았습니다. 멍하니 바다를 내게도 보고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우리도 함께 가겠소.”하고 따라서 일어납니다. 그 말이 무슨 힘이 있었을까? “에이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그럽시다.”
그런데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3년 동안 고기 잡는 기술까지 사라지고 만 걸까?
그때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더니, 너무 많이 고기가 걸려서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7절)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 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시몬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서 벗은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렸습니다. “저분이 주님이시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나, 겉옷을 두른 채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나, 그 마음은 어떠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감격을 경험하십시오. 이 부활의 감격을 간직하십시오. 이 감격이 있으면 우리도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없으면 쓸데없는 일에도 염려합니다. 슬퍼하며 낙심합니다.
마가복음 16장,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갑니다. (3절)“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의 입구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걱정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부활하신 주님 앞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걱정하십니까?
로마서 8장 33-36절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 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8-39절, “나는 확신 합니다. 죽음은,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일도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슬퍼하고 낙심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셨습니까? 그분의 시신이 눈앞에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죽음을 아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슬퍼하고 낙심합니까?
14절,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 하였다 고 기록 합니다. 마리가 우는 것은, 예수님이 거기 서 계심에도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기에 슬픈 겁니다.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기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시인 손명희님은 장애인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낙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찬양 합니다. 왜 그가 작심한 “나”를 보십시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개달았네.” 그렇게 찬양합니다.
보았고, 들었고, 사랑 받았고, 깨달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여인의 슬픔을 고통을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우린 어쩌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그래나 이 여인의 모습은 사람들 보기에는 언제나 캄캄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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