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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보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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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우리를 보라(사도행전3:1-10) 

  한자 사자성어에 "괄목상대(刮目相對 : 刮:비빌 괄, 目:눈 목, 相:서로 상, 對:마주 볼 대할 대 ; 출전三國志)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전에 비하여 딴 사람으로 볼 만큼 부쩍 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時代)초엽, 오나라 왕(吳王) 손권(孫權:182∼252)의 신하 중에 여몽(呂蒙)이란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여몽은 자신을 장군으로 세워준 왕인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상인 노숙(魯肅)이 전지 시찰 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데 그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노숙이 여몽에게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옛날의 여몽이 아닐세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괄목상대"란 한문의 사자성어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할 만큼 전혀 달라진 사람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른 베드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과연 변했고, 베드로는 과연 거듭났고, 베드로는 과연 중생했고, 베드로는 과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괄목상대할만한 변화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에 기도하려 가는 길에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배신자요. 신앙으로 말하자면 배교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잡혀 끌려갈때 멀찌감치 따라가면서 관망이나 하고 결과를 보아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타산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까? 결국은 작은 계집 종(비자) 앞에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바라바 대신 사형수로 판결받게 될때도 변호하거나 변증하기는 커녕 입다물어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지 못했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도망쳐버렸고 친히 거두어 장사지내야 할 수제자가 아리마대요셉에게 그 책임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벌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도 그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이면서 수제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함량미달의 인간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인간 베드로는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한량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정도라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는 바와같이 이 배신자가 이 사명을 잃어버린 자가 성전 미문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예수를 부인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현장에서 서서 공개적으로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부인할 때의 그 모습과 음성과는 전혀 다른 베드로의 모습과 음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은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 줍니다. 오늘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외쳐진 "우리를 보라"는 음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던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고 외친 이 음성과 모습은 자기 부끄러움을 극복한 음성이며 모습이었습다. 
  이 세상에는 이만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평생 동안 나는 배신자요 배교자라는 딱지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증인들이 다 죽어없어진다고 해도 다른 제자들이 이해해주고 용서해 준다고 해도 자신 속에 감추어진 이 수치와 부끄러움은 사라질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끄러움 때문에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부끄러움은 인간이기에 갖는 수치의 감정입니다. 차시중문제로 전교조와 다툼이 있던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언론에 그 사실이 보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엇그제 춘천 야산에서 농약을 먹고 신음중인 20대의 여대생과 처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약을 먹고 자살한 이유가 눈과 코를 성형수술했는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자살사이트에서 동반자살할 사람을 구하여 함께 자살을 한 것이 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괜찮은데 성형수술을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냐 하면서 자기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이정도 부끄러움 때문에 자살을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세상 살다보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아픈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에 종종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슬픔과 불안과 절망과 고통의 감정을 우리들에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마른 뼈가 앙상히 남아 있는 죽음의 계곡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부끄러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술에 취하기 합니다. 마약에 취하고 세상에 취하여 진실과 담을 쌓기도 합니다. 자기 부끄러움 때문에 인생을 자포자기 하기도 하고 자폐증환자처럼 자기 안에 갖혀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다가 슬픈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수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죄책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부끄러움, 자기 수치, 자기 죄책감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자기 부끄러움과 죄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하고 애굽의 왕에게 그들의 아내를 들려보냈습니다. 자신들이 살고자 아내를 이용했습니다. 야곱은 탐욕 때문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이고 집을 떠났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간음을 하고 그리고 살인을 교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다 나열하자면 시간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극복해내느냐 못해내느냐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룟유다나 베드로나 둘다 배신자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50보 100보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자기 부끄러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대신 베드로는 자기 부끄러움을 극복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나지 아나히면 좋을뻔한 사람으로 전락하였고 한 사람은 지금 "우리를 보라"고 권세 있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자기 부끄러움과 가책을 벗어던져버리고 권세 있게 우리를 보라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부활신앙의 능력이 그에게 있는 후로는 가책은 사라졌습니다. 부끄러움은 극복되었습니다. 과거는 사라졌습니다. 과거는 깨끗이 극복되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신앙의 순결을 더렵힌 자라 지조없는 자라 힘이 없는 자라고 고발하고 송사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 모든 과거의 나를 무덤에 장사 지내버리고 새인격으로, 새 사람으로, 새신앙으로, 능력자로, 우리를 새롭게 새워줍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승리요, 이것이 믿음의 승리요, 이것이 은혜의 승리인 것입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같기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같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고 소리친 그 음성과 모습은 자기환경을 극복한 자의 음성이었으며 모습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힘든 환경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베드로는 두려워 했고 나약한 졸장부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포기, 자기학대, 자기 좌절, 자기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처해있는 환경은 결코 베드로에게 용기를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코 희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피가 씻겨져 나가지 않은채로 있었고 예수의 잔당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의 시체를 잃어버린 자들로부터 그 시체를 훔쳐간 사람들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보아도 나는 지금 네가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했습니다. 이 말은 사과의 말이 아닙니다. 구걸하는 거지 앞에 있으면서 은과 금 즉 돈이 없었습니다. 만약 거지가 "없으면 갈 것이지 왜 나를 보라고 하는냐 하면" 이 또 무슨 망신이며 무슨 창피이겠습니까?

  옛날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교회 바로 밑에서 냉면 집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늘 맷돌질을 하는 앉은뱅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앉은뱅이를 볼 때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저런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하는 생각이 늘 있었답니다. 그래서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다가 "나도 한번 해보자"하고서는 주위를 한번 휫 둘러 보았답니다. 혹시나 보는 사람이 없나 하고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앉은뱅이에게 가까이 사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앉은뱅이가 "뭐요"하자 "이크, 틀렸구나"하고 그냥 물러섰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얼마나 그 일 때문에 기도를 했더니 큰 능력을 받아서 한국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고 소리칠 때 성전미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넌 얼마전에 너의 스승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친 사람이 아니냐 하면 또 그 무슨 창피이겠습니까? 아마도 베드로의 귀에는 자신을 향한 험담들이 들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를 자랑했습니다. 진실로 베드로에게 은도 없고 금도 없었지만 그는 그보다도 훨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곧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고 능력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하게 하고 환경을 초월하게 하고 자신을 향하여 홍수처럼 밀려드러오는 험달들을 덮어버릴 수 있는 믿음의 파도를 일으키게 합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는 소리친 그 음성과 모습은 사명을 찾은 자의 음성이었으며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사명은 "우리를 보라"는 이 외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때 사명을 잃어버리고 흔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명을 잃어버렸을 때는 나는 갈릴리로 가리라, 나는 가서 어부노릇이나 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부활신앙의 능력이 있을 때에 사명을 다시 찾았습니다. 사명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심한 자기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고 죄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환경은 그를 한없이 비굴하고 했고 그의 한계를 좁혀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명을 잃어버렸고 옛사람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로 하여금 인간혁명을 일으키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자신의 모든 부끄러움과 환경과 처지와 죄와 허물과 인간 수치됨을 극복하게 했던 그 엄청난 힘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베드로로 하여금 담대히 "우리를 보라"고 권세있게 소리치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하루에 3000명씩이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했던 그 강한  능력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자신이나 세상이 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씩이나 물으시며 사랑을 확인하시고 "네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은 변하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으로 무장한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일들을 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제 내일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눈을 비비면서 우리의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이나 하고 있던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항하여, 아직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망의 권세에 지고 있는 앉은뱅이와 같은 자들을 향하여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떨고 있고 지고 있는 자가 있느냐? "우리를 보라". 그리고 너희들도 우리와 같이 되라고 외치는 메신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자기부끄러움과 죄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환경탓이나 하고 능력탓이나 하면서 사명을 외면하고 있는 이들을 향하여 아직도 그런 것 때문에 지고 있는 자가 있느냐?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부활의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은 극복되고 세상을 향하여서 "우리를 보라"고 소리치는 위풍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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